문이영

 

서울 북동쪽에 내가 아는 동네가 있다. 지도를 보면 낯설게 느껴지는 그곳은 눈을 감으면 외려 선명해진다. 비좁은 골목을 떠올리면 어깨를 한쪽으로 틀게 되고 가파른 내리막길을 생각하면 발끝에 힘이 들어간다. 사시사철 해가 들지 않는 모퉁이를 상상하면 방 안에서도 소름이 돋는 것 같다. 땡볕에서 버스를 기다리던 정류장을 생각하면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고 싶다.

 

몸으로 익힌 장소라서 그렇다. 하도 많이 걸어 다녀서 알게 된 구체적인 사실들에 몸이 먼저 반응하는 것이다. ‘눈 감고도 갈 수 있다’는 말은 나에게 다른 무엇보다도 진실로 다가온다. 서울에서 처음으로 머문 동네이자 가장 오래 머문 동네였다. 그곳에서 세 번을 이사하며 이십 대의 절반을 보냈다.

 

마지막으로 살았던 집을 보러 가던 날을 기억한다. 한낮의 열기가 모든 것을 녹여버릴 것 같은 팔월의 오후에 길을 나섰다. 방중이라 고향으로 내려간 학생들이 많아서 거리는 한산했다. 매미마저 울음을 그친 거리에 여름의 더위만이 광광댔다. 적막하고도 시끄러운 여름날이었다.

 

한 동네에서 꼬박 삼 년 반을 살았지만 집은 이전에 가본 적 없는 곳에 있었다. 그늘 하나 없는 도로 위에서 지도를 보느라 연신 걸음을 멈췄다. 굉음 가득한 도로 위를 가르는 덩치 큰 육교를 건넌 후에는, 달리는 기차 소리에 그 굉음마저 묻히는 철길을 건넜다. 연이어 무언가를 건너야만 도착하는 동네의 남쪽 끝자락이었다. 이십 분 거리가 멀게만 느껴졌다. 이윽고 오래된 주택가 골목으로 들어섰을 때는 바로 전까지 쟁쟁하던 소음이 하나도 들리지 않고 내 발소리가 가장 크게 들렸다.

 

집은 다른 주택들 가운데 둘러싸여 있어 골목 어귀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미로처럼 자꾸만 중심부로 꺾여 들어가는 골목 끝에 새로 칠을 한 대문이 여름 하늘처럼 새파랬다. 대문을 열어젖히자 아담한 한옥 한 채가 마당을 안고 ㄱ 자로 굽어 있었다. 현관도 없이 툇마루로 올라가는 디딤돌이 그대로 남아 있는 오래된 한옥이었다. 그 집에서 처음 보는 이십 대 여자 네 명과 일 년 반을 살았다.

 

Photo by Timothy Ries on Unsplash

 

한때 생판 모르는 여자 네 명과 방이 세 개뿐인 한옥에서 살았다고 얘기하면 사람들은 꼭 물어본다. 집이 낡아서 불편하지 않았냐. 남과 함께 사느라 힘들지 않았냐. 사람들의 질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다. 분명 낡은 집에 사는 건 손이 많이 가는 일이다. 남과 함께 사는 일은 아무리 반복해도 여전히 어렵다. 그럼에도 매번 시원하게 답할 수가 없다. 그 시기는 설명하자면 말문이 막힌다.

 

실제로도 말도 안 되는 시기였다. 이사 온 첫날 밤부터 천장 위를 내달리는 쥐들의 발소리를 들으며 잠을 청해야 했던 일은 지금 생각해도 경악스럽다. 어둠 속에서 천장과 서로를 번갈아 쳐다보던 불안한 눈빛은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지만, 당시엔 정말 심각했다. 대체 이를 어찌하면 좋겠냐는 탄식이 말하지 않아도 전해졌다.

 

마당에 족제비가 나타나서 집 안에서 발이 묶인 일도 있었다. 처음엔 동물의 정체를 몰라서 청솔모 아니면 수달일 거라며 머리를 맞대고 인터넷에 한참을 검색했다. 그리고 허리가 긴 그 동물이 마침내 족제비라는 것을 알아냈을 때, 우리는 직접 쫓아내기를 포기했다. 인터넷에서 귀여운 외모 뒤에 숨겨진 맹수성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정한 맹수성은 서로 간에 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 되었다.

 

Feathered Tunic, Peru [출처]

 

우리에겐 다툴 일이 차고 넘쳤다. 갈등의 소재는 잡초 같아서 없애기 무섭게 새로 생겼다. 달이 바뀌면 날씨가 바뀌고 그게 몇 번 반복되면 계절이 바뀌었다. 그때마다 오래된 한옥에서는 새로운 결함이 발견되었다. 이사 들어온 여름에는 쥐를 몰아내느라 바빴다. 가을이 되자 개미들이 추위를 피해 집으로 기어들어 왔다. 겨울에는 외풍이 심해 코가 시렸다.

 

바뀐 계절과 함께 각자의 새로운 습관이나 생활 방식도 드러났다. 날이 추워지면서 모두의 샤워 시간이 조금씩 길어졌다. 발이 시려 급히 들어오느라 툇마루 위 신발들은 엉망진창이 되어갔다. 입는 옷이 두꺼워지자 빨래 건조대 독점에 관한 문제가 대두되었다. 긴긴 겨울밤 심심한 입을 달래느라 양껏 먹은 탓에 뱃살과 함께 설거짓거리도 늘어났다.

“설거지는 제때 하는 게 좋지 않을까?”

새롭게 등장한 문제에 대해 누군가 운을 떼면 나머지 사람들도 문제의식에 공감을 표했다. 그렇지만 해결이 어려웠던 이유는 단어에 대한 감각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다.

“난 제때 했어, 설거지.”

“다음 날 하는 게 제때 하는 거야? 너 때문에 내가 요리하기 전에 설거지부터 하고 시작해야 한다고.”

 

무릇 함께 산다는 건 어떤 단어에 결부된 감각을 구체적으로 조율하는 일임을 그때 알았다. 이를테면 ‘제때’ ‘지저분하다’ ‘꽉 차다’ ‘조용하다’ 같은 단어들. 익숙한 단어에 관해 서로가 느끼는 감각이 너무도 달라서 늘 그 간극에 놀랐다.

 

누군가는 지저분한 화장실이 나에게는 그럭저럭 쓸 만했다. 내 눈에는 꽉 차서 진작에 비웠어야 할 것 같은 쓰레기통도 어떤 사람에겐 며칠은 더 버틸 수 있을 것처럼 생각되었다. 반대로 나로서는 조용했다고 생각한 이른 아침의 화장실 사용 건은 몇몇의 단잠을 방해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여기까지 말하면 사람들의 반응은 한결같다.

“난 절대 남이랑 같이 못 살 것 같아.”

“역시, 한옥이 보기에만 좋지 실제로 살면 불편하다니까.”

이게 아닌데.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그게 아닌데. 나는 혼자 어찌할 바를 모른다.

사람들의 관심은 이제 다른 이야기로 옮겨 갔다. 새로운 화제에 눈이 반짝인다. 더는 한옥이니 남과 함께 사는 일에 흥미가 없다. 그리하여 나에게는 마음속으로만 만지작거리는 이야기가 남게 되는 것이다.

 

The Bedroom, Vincent van Gogh [출처]

 

해가 바뀌고 파란 대문의 한옥에도 봄이 찾아왔다. 비좁은 골목 어귀에 이름 모를 잔꽃이 피었다. 가파른 내리막길 끝에 붕어빵 팔던 자리가 텅 비었다. 해가 들지 않는 모퉁이에 겨우내 얼어 있던 눈이 자취를 감췄다. 양지바른 버스 정류장 벤치에는 어르신들이 잠시 다리를 쉬며 볕을 쬐고 가셨다. 계절이 바뀌고 해가 바뀌면 익숙한 배경 속에서 새로운 사실들을 알게 된다. 사소하고 구체적인 사실만이 지나온 시간을 감각하게 한다. 사람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봄이 완연해졌을 때 나는 골목을 울리는 발걸음 소리만으로도 누가 대문을 열고 들어올지 알아맞혔다. 어떤 이의 기분을 나아지게 하기 위해 사 가야 하는 아이스크림의 이름을 외웠고, 수시로 식탁 위를 굴러다니는 형광색 머리끈은 굳이 물어보지 않고도 알아서 주인 책상에 갖다두었다. 네 명의 양말과 속옷을 구분했고, 화장실에서 나는 샴푸 냄새만으로 방금 전에 샤워한 사람을 골라낼 수 있었다. 이외에도 침대 머리맡에 붙은 사진에 얽힌 추억이라든가, 고향 친구들을 부르는 별명 같은 자질구레한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좁은 집에서 부대끼며 몸으로 익힌 사실들은 사소하지만 구체적이어서 이후에 알게 된 다른 어떤 사람에게서도 그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없게 했다. 바로 그러한 점 때문에 나는 눈을 감으면 언제든 파란 대문의 한옥, 다섯 명의 여자들이 모여 살았던 집으로 갈 수 있다. 사소하고 구체적인 사실들이 그 시기를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게 한다.

 

하지만 발소리, 아이스크림 맛, 샴푸 냄새, 머리끈 색깔- 이런 것들로 어떤 사람을 안다고 해도 될까. 디딤돌 위를 나뒹구는 신발들, 마루 한편에서 게으르게 말라가는 빨래, 씻어서 엎어 놓은 밥공기의 둥근 선- 이런 것들로 어떤 시절을 설명하는 데 성공할 수 있을까.

 

Photo by Marie-Lou Wechsler on Unsplash

 

오늘처럼 공기가 달게 느껴지는 밤이면 우리는 맨발에 슬리퍼를 끌고 동네 마실을 나서곤 했다. 민둥한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며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았다. 이룬 게 없어서 자랑할 게 없었다. 가진 게 없어서 숨길 게 없었다. 우리가 꿈꾸는 것은 우리로부터 멀리 있었고, 살아온 시간보다 살아갈 시간이 길어서 우리는 영원처럼 웃고 떠들었다. 잘 먹고 잘 자고 열심히 다투며 날마다 마음이 자랐다.

 

내가 서울 북동쪽의 어느 동네에서 이십 대의 절반을 보냈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꼭 물어본다. 동네가 허름해서 서울인데 서울 같지 않다면서요? 아무래도 교통이 불편하죠?

말문이 막힌다. 하고 싶은 말이 할 수 있는 말을 초과하는 어린아이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벌린 채 침을 꼴딱꼴딱 삼킨다. 잠시 횡설수설하다 결국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답을 내어준다. 그들은 비로소 명쾌한 기분을 느끼며 새로운 화제로 옮겨간다.

 

그리하여 나에게는 마음속으로만 만지작거리는 동네가 있다. 하도 만져서 닳아버린 동네, 그 낡은 동네가 그리운 날엔 눈을 감는다. 눈을 감으면 마음속에서 동네는 점차로 작아지고 둥글어진다. 어린아이가 가지고 노는 장난감 같다. 한 손에 들어올 정도로 작지만, 깜짝 놀랄 만큼 세밀하다. 우리가 무심코 들여다본 장난감 자동차의 정교함에 놀라듯 말이다. 이따금 마음속으로 그것을 손에 쥐어본다. 닳도록 어루만져서 매끄럽고 윤이 난다. 나는 아이가 자신의 장난감을 기억하듯 그 동네를 기억한다. 장난감 주인이 아니면 알지 못하는 그것에 관한 사소한 사실 같은 것을 잘 알고 있다.

 

 

 

‘마음의 지도’는 [월간소묘 : 레터]에 2020년 10월까지 연재되었으며, 추후 단행본으로 출간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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