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이영

 

나무를 보며 계절을 센다. 나무만큼 계절의 변화를 여실히 드러내는 존재가 또 있을까. 마른 나뭇가지를 뚫고 연한 새순이 돋아나면 그것은 사월이다. 비와 햇빛을 번갈아 맞으며 기세 좋게 뻗어 나가는 진녹색 잎사귀는 칠월의 다른 이름이다. 그러다 찬바람 불어 그 많던 잎사귀들 죄 떨어지고 나면 나는 어느새 십일월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것이다. 나보다 커다란 존재를 보고, 그가 내는 소리를 듣고, 그가 떨구는 존재의 일부를 밟거나 혹은 주워서 책 사이에 끼우며 네 번의 계절을 보낸다. 그렇게 한 해를 산다.

 

때로 그 거대한 생명체가 지나온 숱한 계절을 헤아리고 또 금세 포기하는 일은 나의 공연한 취미다. 어디서 읽은 바에 의하면 현존하는 나무 중 수령이 가장 오래된 나무가 캘리포니아에 있다는데 사람으로 치면 사천팔백 살이 넘는다 한다.1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나무가 그토록 오래 산다는 게 위안이 된다. 내 삶보다 유구한 무언가, 이를테면 한 그루의 나무에 비하면 내 인생은 찰나라는 것. 그런 걸 생각하면 버거운 삶도 잠시나마 가뿐해진다.

 

Cypresses, Vincent van Gogh [출처]

 

또 다른 곳에서 최초의 나무는 어쩌면 오늘날의 야자수와 비슷하게 생겼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2 나무라면 매일 보는 데다가 야자수라니 언젠가 본 것처럼 친근하게 여겨지기도 하지만 키가 십 미터나 된다고 하니 홀로 그렇게까지 자라야만 했던 이유가 따로 있었던 건지 무척 궁금하다. 게다가 데본기 중엽이라는, 이름조차 생소한 시대 그러니까 약 3억 9000만 년 전에 살았다는데, 이쯤 되면 최초의 나무란 우리 집 앞에 있는 이팝나무보다는 우주 저 멀리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는 미지의 행성에 오히려 더 가깝게 생각되는 것이다. 과학자들이 화석을 토대로 재구성하여 밝혀냈다는 이와 같은 사실을 오래 곱씹다 보면 나무가 살아 있는 공룡 같은 존재로 생각되어서 나무에 가만히 손을 갖다 대는 일이 전과 다르게 신비롭게 느껴진다.

 

동시에 슬프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처럼 유구한 존재에게 허락된 자리가 너무도 초라해서다. 빼곡히 깔린 보도블록 사이로 파헤쳐진 한 평 남짓한 흙바닥에 마치 수감되듯 심긴 나무를 보며 나는 종종 치욕스럽다. 외세에 의해 주권을 찬탈당한 나라의 왕좌처럼, 위엄을 거세당한 도시의 나무는 한낱 눈요깃거리에 불과하다. 도시라는 공간의 특성 때문인지도 모른다. 도시는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공간이므로 도시에는 오직 인간과 인간이 만든 것으로 가득하다. 둘러보면 사방이 우리 아니면 우리를 닮은 것뿐이다. 낯선 존재가 사라진 세계에서 우리는 어딜 가도 우리 자신과 마주친다. 우리는 우리로부터 벗어날 곳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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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전 일이다. 날씨가 좋길래 마침 한가하던 차에 근방에서 제법 유명하다는 산에 갔다. 걸어가기엔 먼 거리라 버스를 타고 산 입구까지 가기로 했다. 평소 이용하지 않는 정류장에서 잘 모르는 노선의 버스를 타고 생소한 길을 달리자니 차로 십오 분 거리인데도 멀리 나서는 듯했다. 산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나고 자랐기에 산에 대해 특별한 감정은 없다고 생각해왔는데 시간이 흘러 너른 들이 흔한 지방에 수년째 살아보니 문득문득 산이 그립다.

 

도시에 있는 나지막한 산이라 큰 기대를 하지 않았음에도 가까이 가서 보니 산은 산이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다가갈수록 크고 높아지는 산 앞에서 나는 점차로 작아졌다. 누가 멀리서 봤다면 내가 산속으로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산속으로 사라진다’는 표현은 여러모로 알맞다. 실제로도 사라지는 느낌이기 때문이다. 바깥에서 볼 때만이 아니라 내면에서도 많은 것들이 잊혀져 사라진다. 예로부터 사람들이 무언가를 잊으려 산으로 들어갔던 건 우연이 아니다. 잘 모르는 이들은 그게 산에 뭐가 없어서라고 생각하겠지만 실은 정반대다. 산에서 무언가를 잊을 수 있는 이유는 산에 뭐가 많기 때문이다.

 

Photo by Paul Gilmore on Unsplash

 

나는 이왕 온 김에 정상까지 가보기로 하고 꼭대기에 있다는 정자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질거나 마른 흙, 크기와 모양이 제각기 다른 돌, 종류별로 무리 지어 자라난 풀이며 꽃과 그 사이를 기어 다니는 벌레 등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나와 전혀 다른 존재들이 주변을 빽빽하게 에워쌌다. 도시에서는 볼 수 없었던, 설령 있다 하더라도 미처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 존재들이 저마다 생명력 가득한 모습을 뽐내고 있어서 나는 나에 대한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기꺼운 마음으로 나를 잊었다. 스스로를 잊음으로써 얻어지는 기쁨은 산을 오르며 알게 된 여러 기쁨 중 하나다. 그것은 또한 지리학 책을 읽으면서 누렸던 즐거움과도 닮았다.

 

지리학(Geography)은 지구(geo)와 기술하다(graphy)라는 단어가 합쳐져 만들어진 이름으로 ‘지구에 대한 기술(description)’을 의미하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했다. 지구에 대해 기술하는 학문이라니, 이보다 아름다운 학문의 정의를 본 적이 없다. 날마다 지구에 대해 무언가를 적어 내려가던 지리학자들은 말하자면 ‘지구 기술가(Earth describer)’였던 셈이다. 그들의 관찰과 기록 덕분에 우리는 강이 굽이치며 흘러가는 이유나 깎아지른 절벽의 기원을 쉽게 납득한다. 태양과 달의 움직임에 따라 오르내리는 바닷물의 높이와 계속해서 달라지는 해안의 모양을 당연하게 예측한다. 다만 내가 짐작하기 어려운 것은 매일 눈을 뜨면 온통 낯선 것, 미지의 것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살았을 지구 기술가들의 삶이다. 뭐든 쉽고 당연한 세상에서만 살아온 나로서는 크고 둥근 지구를 탐구하며 그들이 느꼈던 기쁨을 감히 이해하기 어렵다. 그리고 지리학 책을 읽는 즐거움의 절반은 그 기쁨을 막연하게나마 그려보는 데 있다.

 

Photo by Viktor Forgacs on Unsplash

 

지리학 책에서는 열대우림기후를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열대 우림 기후의 특징을 가장 단순하게 표현하면 ‘단조로움’이다. 이것은 계절이 없는 기후다. … 밤이 열대의 겨울이다.” 이런 설명도 있다. “아침은 전형적으로 쾌청하게 시작한다. 적운은 아침 늦게 발생하여 오후에 적란운 모루구름으로 발달하면서 맹렬한 대류성 폭풍우가 된다. 늦은 오후에 구름은 점차 흩어져서 저녁 하늘에 부분적으로 있고 현란한 일몰이 나타난다. 구름은 밤에 다시 나타나 야간 뇌우를 생성한다. 다음 날도 쾌청하게 동이 터서 이 패턴이 반복된다.”3

 

인류 최초로 열대우림의 기후를 관찰하는 한 연구자를 상상해본다. 연구자는 낯설고 신비로운 정글 속에서 저 자신에 관한 것은 까맣게 잊은 지 오래다. 그는 여러 낮과 밤을 거치며 보고 들은 것을 그때그때 수첩에 잘 메모한다. 아침의 공기, 일몰의 빛깔, 구름의 모양, 비와 바람의 세기 같은 것들. 연구 주제와는 관련이 없지만 높은 확률로 이런 것들도 적혀 있을 것 같다. 이곳에서 초록색은 하나의 색이 아니라는 것. 다양한 초록색만큼 혹은 그보다 더 많은 종류의 새들이 있다는 것. 또 새들이 우는 소리와 날거나 잠드는 몸짓에 대한 것.

 

자연과학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것이 기본적으로 바깥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비록 후에 악용될지라도 그 시작에는 어떤 순수함이 있다. 나를 둘러싼 낯선 대상-나무, 산, 암석, 강, 바다, 날씨, 동물, 식물, 곤충, 그 밖의 모든 미생물-에 대한 순수한 관심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 모든 바깥의 것들이 내 안에도 있다는 자각에서 우리는 완전한 기쁨을 얻는다.

 

Photo by Subtle Cinematics on Unsplash

 

인체 생리학을 공부하면서 새삼스럽게 놀랐던 점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내가 자연으로부터 섭취해야 하는 물질, 바로 그 물질들로 나 자신이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인체는 물, 단백질, 지질, 탄수화물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미량이긴 하지만 칼슘, 구리, 코발트와 같은 광물질도 중요한 구성 요소다. 그리고 이는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 자연으로부터 섭취해야 하는 물질의 종류와도 같다. 매일 밥 먹을 때마다 숟가락 위에 얹힌 것들을 보며 생각한다. ‘나’다! 내지는 ‘머잖아 내가 될 것들’이다! 체내 세포들이 짧게는 수일에서 수주, 길게는 수년에 걸쳐 신체가 흡수한 물질을 바탕으로 새로이 생성된다는 걸 생각하면 정말로 그러하다.

 

내가 이 땅의 모든 것들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바깥의 낯선 존재들과 내가 조금씩 닮아 있고 또 연결되어 있다는 걸 의미한다. 나는 그 사실을 내 식대로 해석해 내 안에 하늘도 있고 바다도 있고 돌도 있고 나무도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러므로 인간인 내가 인간 아닌 이 땅의 수많은 존재, 가령 한 그루의 나무보다 특별할 이유는 조금도 없는 것이다. 기쁨에 종류가 있다면 이런 깨달음이 선사하는 기쁨은 내 존재를 부풀리고 과시하면서 얻는 기쁨과는 분명 다른 기쁨, 말하자면 차갑고 고요한 기쁨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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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많이 불던 지난 일요일에는 시가지 끝자락으로 가서 시간을 보냈다. 나는 벽돌 무더기 위에 앉아서 구름이 빠르게 지나가는 모습을 바라봤다. 잿빛 하늘에 흩어진 여러 구름 중 하나를 마음속으로 정하고 구름이 가는 길을 눈으로 좇았다. 구름은 너머로 펼쳐진 황무지 끝에서 등장해 내가 있는 곳 위를 지나 아파트 뒤편으로 사라졌다.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는 데 십 분도 채 걸리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새로운 구름의 등장과 퇴장을 거듭 지켜보았다. 내가 앉아 있는 벽돌 무더기는 도로 보수 공사가 끝난 후 남은 벽돌들을 아무렇게나 쌓아둔 것인데 이쪽으로는 사람이 오지 않아 혼자 있기 좋았다. 게다가 그 높이가 제법 되어서 위에 올라가면 담장 뒤편으로 펼쳐진 황무지가 멀리까지 보였다.

 

Tree Trunks (study for La Grande Jatte), Georges Seurat [출처]

 

사람 손을 타지 않은 땅이 대개 그렇듯 너머의 황무지에는 다양한 존재들이 산다. 작은 참새나 회갈색의 비둘기는 물론이고 밤마다 구우구우 하고 우는 이름 모를 새도 그중 하나다. 여름이 가까워 오면 온갖 풀벌레들이 떼창을 하는데 소리만 들릴 뿐 보이지는 않는다. 멀리서 가만히 응시하고 있으면 숨은 존재들이 만들어 내는 풀이나 나무의 작은 움직임이 보인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면 도망칠 게 분명하다. 자신만의 영역을 만들고 그곳에 제 몸을 숨기는 일은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이 본능이다.

 

황무지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이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나뭇가지들이 서로 엉겨 부딪히며 뚜두닥딱 소리를 냈다. 여린 풀들은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일제히 바닥으로 누웠다. 새들이 여기저기서 소란스럽게 날아올랐다. 저마다 보금자리로 찾아드느라 분주했다. 당장이라도 빗방울이 떨어질 것 같았다.

 

아직 길들여지지 않은 세계가 남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을 때마다 이곳에 온다. 내가 여전히 모르는 게 많고 결코 다 알 수도 없다는 사실이 위안과 기쁨이 된다. 신비하고 낯선 무언가, 경외할 무언가가 아직 남아있다는 것. 그것은 ‘나’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구원이자 한 그루의 나무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과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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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존하는 세계 최고령 나무에 관한 내용은 Tatiana Schlossberg, “Celebrate Earth Day With a 4,800-Year-Old Tree(If You Can Find It)”, The New York Times (2016. 4. 22)를 참고했다. [본문으로]
2 지구 최초의 나무에 관한 내용은 Ker Than, “World’s First Tree Reconstructed”, Live Science (2007. 4. 18)를 참고했다. [본문으로]
3 지리학 및 지리학자에 대한 정의, 열대 우림 기후에 대한 설명은 ⟪McKnight의 자연지리학⟫에서 인용했다.
Darrel Hess, McKnight의 자연지리학(제12판), 윤순옥 등 옮김, 시그마프레스, 2019 [본문으로]

 

 

 

‘마음의 지도’는 [월간소묘 : 레터]에 연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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