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소요 이경란 북디자이너와의 깊은 이야기

 

아주 작지만 분명한 이정표를 남기는 것

 

팀 소묘에서 귀여움과 웃김과 사랑스러움을 맡고 있는 분. 우리의 책들에 단단하고 아름다운 옷을 지어주시는 분. 오후의 소묘를 이야기할 때 디자인소요의 이경란 실장님을 빼놓을 수 없다. 올해는 무루 님 신작 에세이 <우리가 모르는 낙원>과 <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 개정판, 그리고 리브레리아Q 서점원 에세이 <고르는 마음>까지 세 권의 책을 함께 작업했다. 게다가 <고르는 마음>은 오후의 소묘의 마흔 번째 책이자, 경란 실장님이 디자인해 주신 스무 번째 책이라는 사실을 책이 나올 즈음 알게 되어 더욱 애틋한 마음이 들었다. 소묘의 절반을 담당해 주신 셈이다. 오후의 소묘라는 세계를 시각적으로 구현하며 소묘에 작고 짙은 흔적을 남겨주시는 분과 이야기 나눴다.

 

 

“한 권의 이야기를 한 컷의 언어로 번역하는 일”

소묘 소묘 레터 독자분들에게 자기소개 부탁드려요.
경란 안녕하세요. 북디자이너 이경란입니다. 18년째 책과 함께하며 책의 다양한 모습들을 만들고 있습니다. 읽는 경험이 어떻게 시각의 언어로 번역될 수 있을까, 그 여백과 결을 들여다보는 일을 하고 있어요.
소묘 늘 바쁘게 작업하고 계시고 올해는 특히 도서전에서 타 출판사와 협업 프로젝트도 진행하셨지요. 요즘 근황은 어떠신지 여쭤보아요.

경란 올해 상반기는 정말 쉼 없이 달렸던 시기였어요. 본업인 북디자인뿐 아니라 도서전 팝업의 브랜딩과 아트 디렉팅까지 함께 진행하면서, 하루하루가 마치 현장 속을 뛰어다니는 듯했어요. 책이라는 정적인 세계 안에서 머물던 감각이, 공간과 오브제, 그리고 관람객의 취향으로까지 확장된 작업이었어요.

도서전이라는 공간은 책의 물성과 그에 대한 굿즈, 그리고 사람이 만나는 자리잖아요. 그 안에서 브랜드를 시각적으로 구현한다는 건, 단순히 ‘보이는 것’을 만드는 일이 아니라 ‘어떤 리듬과 경험으로 기억될 것인가’를 설계하는 일이라 더욱 어려웠어요

낯설지만 자극적이었고, 몸은 지쳤지만 마음은 오래 남을 에너지로 찼죠. 정신없이 바쁘면서도 매 순간이 흥미롭고 신나는 경험이었습니다. 좋은 기회를 주신 안온북스에 지금도 감사한 마음이에요. 그 시기는 제게 일의 확장기이자, 디자인의 현장으로 나오는 전환점이었어요.

상반기를 바쁘게 보낸 덕분에, 하반기는 조금 숨을 고르며 지내고 있습니다. 미뤄두었던 공부를 시작했고, 그 연장선으로 여유 있는 프로젝트들에서 여러 가지 실험을 시도해 보고 있어요. 오랜 시간 쌓인 루틴에서 벗어나, 디자인의 ‘다른 얼굴’을 관찰하는 시기이기도 해요.

소묘 그래서일까요? 최근엔 실장님 포트폴리오 계정에 재밌는 작업이 많이 올라왔어요. 움직이는 책 표지라니! 저희 책들 <우모낙> <이로운 할머니> <고르는 마음> 표지 속 이미지들이 이상하고 자유롭게 생동하고 있더라고요. 표지 모션은 오래전부터 구상하고 해보고 싶어 했던 작업으로 알고 있는데, 실제로 구현하신 걸 보고 놀랐습니다. 이런 재밌는 아이디어들은 어디서 비롯되는 걸까요?

경란 모션 표지의 시작이 언제였는지 아는 거의 유일한 분이 대표님이시죠. 한때 에프터이펙트를 공부하며 시도했지만 기술적 한계를 느껴 잠시 멈춰 있었어요. 그런데 새로운 기술이 등장하면서 훨씬 수월하게 구현할 수 있게 되어, 다시 도전해 보고 있습니다.

책을 디자인할 때 저는 한 권의 이야기를 ‘컷cut’보다는 ‘신scene’으로 떠올려요. 기억 속 장면들은 언제나 소리, 냄새, 온도처럼 여러 감각이 함께하니까요. 그 공감각적인 신 속에서 하나의 컷을 건져내는 일이 제 작업의 시작입니다.

이를테면 제가 작업한 책 표지가 일종의 컷이라면 그 컷이 존재하는 저만의 신이 있는데, 그걸 영상으로 구현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했었어요. 그래서 모션 표지는 결국, 제가 바라본 이야기의 감각을 조금 더 온전히 담아보려는 시도죠. 움직임이라는 새로운 언어를 통해 책이 가진 세계의 ‘공기’를 표현해 보고 싶었어요. 예상치 못한 배움과 즐거움이 많아서, 앞으로도 계속 실험해 보고 싶은 작업이에요.

 

 

소묘 하나의 컷을 건져내는 일, 인상적이네요. 문학동네에서 인하우스 디자이너로 작업하신 소설들 표지를 기억해요. 은유적인 이미지와 단정한 타이포가 어우러진 직관적인 표지들이었던 것 같아요. <지도와 영토>(구판)도 그렇고, <희랍어 시간>도 2011년에 나왔는데 여전히 제일 좋아하는 한강 작가님 책 중 하나예요. 이렇게 보니까 정말 실장님 디자인은 타임리스다..!

‘디자인소요’라는 이름으로 독립하셨을 때가 2013년이었나요? 그때 처음 실장님께 책 디자인을 의뢰드렸죠. (막상 저희가 작업한 첫 책에는 이미지 없이 타이포로만 갔던 것 안 비밀 ㅎㅎ)

오랫동안 북디자인을 업으로 삼으면서 지금까지 지키고 있는 나만의 색깔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그리고 실장님이 생각하는 좋은 디자인이란?

경란 크흙 저도 좋아하는 작업들 꼽아주셔서 넘나 영광이고요!!

처음 디자인을 시작했을 땐, 자신만의 색깔과 기준이 있는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어요. 특히 그래픽 스타일에 대한 욕심이 컸어요.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 생각은 조금 달라졌어요. 지금도 저만의 색깔과 기준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그 기준이 이제는 ‘그래픽 스타일’보다는 ‘책을 바라보는 태도’ 쪽으로 옮겨 갔어요. 이제는 어떤 시각적 표현이든, 책의 성격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다면 주저하지 않고 차용해요.

다만 콘텐츠를 바라보는 관점에서는 나만의 스타일이 담기길 바랍니다. 북디자인은 결국 텍스트의 세계를 읽고, 그 세계의 내러티브를 시각적으로 다시 세우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텍스트의 결을 따라가며 그 안에 숨어 있는 정서나 호흡을 시각으로 번역하는 것, 그 흐름 속에 아주 작지만 분명한 이정표를 남기는 것, 그게 제가 생각하는 ‘좋은 디자인’에 가까운 순간이에요.

소묘 북디자인의 경향이나 스스로의 작업 스타일에도 흐름과 변화가 있었을 것 같아요. 최근에는 어떤 것에 중점을 두고 작업하시는지, 앞으로는 또 어떤 실험들을 해보고 싶으신지 궁금합니다.

경란 요즘은 새로운 기술과 매체, 특히 인공지능과 영상 작업에 많은 관심을 두고 있어요.

긴 텍스트를 시각 언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편견과 관습을 자주 생각하게 돼요. 우리는 어떤 문장을 읽을 때 무엇을 떠올리고, 또 어떤 이미지를 볼 때 무엇을 느끼는가. 그 인식의 층위와 감각의 연결을 고민하는 일이 제게는 점점 더 어려우면서도 중요한 과제가 되고 있어요.

결국 제가 시도해 보고 싶은 건, 인간의 생각과 시각, 감정이 하나의 점으로 모이는 그 지점을 시각적으로 포착하는 일입니다. 그 교차점에서 디자인은 단순한 형식이 아니라, 감각과 사고가 만나는 구조로 확장될 수 있다고 믿어요.

 

“팀 소묘로 함께한 이상하고 웃긴 시간들”

소묘 올해 저희가 함께 만든 책이 세 권이에요. 오래 함께했다 보니 제가 실장님에게 많이 의지를 하는 편이잖아요.(?!) <우리가 모르는 낙원> 일러스트 관련해서도 책 작업 들어가기 전부터 두 후보를 놓고 의견 여쭙기도 했었고. 고민하던 지점들이 있었는데 실장님 말씀 덕분에 딱 결정할 수 있었거든요. 제가 보여드렸던 두 그림 작가 중 요안나 카르포비치 언니로 강하게 의견 주셨던 이유 기억하실까요?
경란 일상의 순간 속에서 만나는 낯선 존재들이, 무루 작가님의 이야기 속 인물들과 닮아 있다고 느꼈어요. 요안나 카르포비치의 그림은 그 낯섦을 따뜻하게 안아주죠. 묘하게 생동하는 시선, 미묘한 거리감… 조용한 표정 속에 서늘한 빛이 머물고, 그 안에서 신비로운 이야기가 천천히 깨어나는 느낌이었어요. <우리가 모르는 낙원>이 가진 정서도 그런 빛과 닮아 있다고 생각했어요.

 

 

소묘 <이로운 할머니>는 이번 개정판으로 네 번째 옷을 입었어요. 산책 에디션, 예스24 리커버 까지 5년간 한 책으로 네 번의 표지 작업을 하는 일이 흔치는 않지요. 책의 여정을 함께해 온 소회를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그리고 실장님이 되고 싶은 할머니의 모습은? :)

경란 맞아요. 한 명의 디자이너가 한 종의 도서를 네 번이나 디자인하는 일, 또 있을까요? 감히 저만의 자랑이라 불러봅니다.^^ 이렇게 소중한 기회를 꾸준히 주신 소묘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를 처음 작업하던 시절은 제게 여러모로 특별한 때였어요. 오래 머물던 작업실을 떠나 새 공간으로 옮겼고, 삶에서도 크고 작은 변화들이 이어지던 시기였거든요. 그래서인지 이 책에는 제 삶의 사건들이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나이 들어가는 일에 대한 제 시선을 조금은 다정하게 바꿔준 것 같아요.

그치만 저는 언제나처럼 이상하고 웃긴 할머니가 되고 싶습니다.

소묘 <고르는 마음> 같은 경우에는 작가노트 시리즈의 한 권이죠. 이 시리즈에 관해 출판잡지인 <기획회의>에 글을 싣게 됐는데 디자인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었어요.

“장정은 얇은 합지를 쓴 마루 양장에 오래된 노트를 연상시키는 앤틱한 형태로, 내지는 매거진처럼 도판을 다채롭게 배치하면서도 클래식한 서체와 적절한 여백을 활용한 단정한 레이아웃으로 가져갔다. 다소 모순적으로 느껴지는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은 편집자의 요구를 ‘디자인소요’의 이경란 실장님은 세심하고 균형 있게 구현해 주었다. 패턴으로 확장한 이 시리즈의 로고는 선과 면을 이루며 표지와 내기 곳곳에서 ‘작가노트’ 시리즈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어우려져 작가들이 애써 일궈온 작업과 그 기록이 단단하고 아름다운 집을 갖게 됐다.”

정말 뜨거운 아아 만들어주시는 분, 새록새록 감사한 마음이 들었답니다, 후후.

사실 책뿐 아니라 소묘의 시작부터 함께해 주셨잖아요. 커피 상점일 때부터요. 저희 로고부터해서 전반적인 디자인 콘셉트를 잡아주셨어요. 이후 스무 종의 책에 이르기까지, 소묘의 색깔을 정립해 주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텐데요. 저희 책을 디자인할 때 특별히 떠올리는 감각이나 기준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경란 그야 당연히 우리 작은 고양이님이요…ㅋㅋ

커피 상점 시절부터 지금의 디자인 콘셉트까지 함께 만들며, 소묘만의 색을 차곡차곡 쌓아온 시간을 더듬어보면, 제가 소묘의 책을 디자인할 때 떠올리는 기준은 한마디로 ‘작고 온기 있는 장난기’예요. 소묘의 로고가 된 고양이 히루가 보여준 똥꼬발랄함과 팀 소묘가 지닌 친근한 결이 작업 전반의 길잡이가 됩니다. 장난스럽고 따뜻하게, 그러면서도 포근하게 안아주는 느낌.

저는 스스로를 몽글하다고 보진 않지만, 소묘에는 그런 몽글한 귀여움이 가득하니까요. 결국 큰 그림은 책을 만드는 사람과 닮은 디자인이에요. 작고 따듯하고 가끔은 막 괴롭히고 싶을 만큼 사랑스러우면서도 진실한, 그런 성격이 책의 이미지, 여백의 호흡, 타이포의 리듬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도록 신경 써요. 세심한 질감과 소소한 디테일을 통해 독자가 책을 ‘만지고 싶은 감각’까지 느끼게 하는 것이 제 바람입니다.

 

[월간소묘의 편지하는 마음] 전시가 열렸던 디자인소요의 스튜디오

 

소묘 함께한 시간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작업이나 순간이 있을까요?

경란 모든 책들이 저마다의 과정과 이야기를 지니고 있어서 하나만 고르기 어렵지만, 개인적으로는 함께 진행했던 고양이 플립북 텀블벅 프로젝트가 가장 기억에 남아요. 작은 플립북 세트를 만들며 설레는 마음으로 준비했지만, 목표 금액을 채우지 못해 결국 제작이 무산됐죠. 책으로 완성되진 못하고 샘플만 남아 더욱 애틋하게 기억되는 작업이에요.

그 프로젝트는 디자이너로서의 일이 아니라, 기획자이자 작업자로서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걸어간 배움의 여정이었어요. 완성된 결과보다, 서로의 생각을 나누며 한 장면씩 구체화시켜 간 그 시간이 오래 마음에 남았습니다.

 

“좋아하는 일에 깊이 잠긴 사람이 남긴 흔적들”

소묘 말씀주신 플립북 프로젝트도 그렇고 개인 작업 이야기를 빠뜨릴 수가 없는데요. 연말마다 특정 주제로 굿즈를 만들거나 전시를 하기도 하고, 아예 ‘북스터프’라는 브랜드도 만드셨어요. 그동안 재미난 일들을 많이 벌리셨는데, 그 동력은 무엇일까요? 관심 두고 계신 개인 프로젝트나 앞으로 도모하는 작업이 있다면?

경란 저의 모든 동력은 호기심과 동경인 것 같아요. 대부분 쓸데없어 보이는 호기심에, 닿을 수 없는 찬사가 함께하죠. 저는 언제나 ‘무언가를 흠뻑 좋아하는 사람들’에 대한 깊은 동경이 있어요. 좋아하는 일에 몰두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 열정이 만들어내는 세계의 밀도를 느끼게 돼요.

그 감정이 제게도 어떤 원동력이 됩니다. 저 역시 그처럼 ‘좋아하는 일에 깊이 잠기는 사람’이고 싶어요. 그래서 개인 프로젝트들도 결국 그 호기심의 방향을 따라 흘러가요. 지금은 ‘이야기를 둘러싼 시각적 경험’을 확장하는 실험들을 조금씩 시도하고 있습니다. 이제 곧 연말이니 올해도 굿즈를 준비하는 중인데, 아직 구체적인 아이디어가 안 떠올라서 고민이에요.

 

‘북스터프’라는 이름으로 열었던 개인 작업 포스터들, 오래된 것들을 사랑한다 :)

 

소묘 작업 말고도 넷플릭스, 사주명리학 기타 등등- 실장님은 ‘좋아하는 일에 깊이 잠기는 사람’이잖아요. 언젠가 넷플릭스 작품의 오프닝 크레딧들에 대해 디자인적으로 풀어주셨던 글도 무척 흥미로웠는데, 최근 시각적으로 인상 깊었던 작품이 있으신지?

경란 거의 모든 OTT 플랫폼을 두루 보는 편이지만, 요즘은 서사 자체가 흥미로운 작품이나 시대물에 끌려요. 서사에 따라 변화하는 시각적 요소들을 관찰하다 보면, 그 안에서 디자인과 이야기의 관계를 새롭게 발견하곤 합니다.

최근에 다시 본 작품은 〈높은 성의 사나이〉예요. 1962년에 발표된 필립 K. 딕의 대체 역사 소설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인데, 독일과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이 되어 미국을 양분한 세계라는 설정이에요. 익숙한 역사를 낯선 구조로 뒤집는 이 서사는, 우리가 ‘현실’을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져요. 이미 알고 있는 세계를 다시 낯설게 바라보게 만드는 힘이 있죠.

시각적으로는 다소 아쉬운 부분은 있지만, 그 애매한 완성도가 매력적이기도 해요. 뒤집힌 서사에 비해 클리셰로 가득한 비주얼 속에서 ‘진짜 같지 않은 진짜 세계’를 만들어내는 방식, 그 진부함이 오히려 상상의 여백을 만들어내는 것 같아요. 저는 그런 틈을 보는 걸 좋아해요. 디자인에서도 종종 완결된 형태보다, 불안정한 틈 사이에 생기는 의미의 움직임이 더 흥미롭거든요.

또 한 작품은 〈업로드〉입니다. 인간의 사후를 양자 기술을 통해 가상 세계로 옮긴다는 설정의 미래 서사인데, 죽음과 기술, 감정과 데이터의 경계가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지를 보여줘요. 이 작품을 보면서 새삼 깨달은 건, 우리가 ‘죽음’이라는 개념을 육체의 소멸로만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점이에요. 일 년에 한 번만 만나더라도 SNS나 통화를 통해 연결되어 있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잃었다’고 생각하지 않잖아요. 반면, 육체는 함께 있지만 마음이 닿지 않을 때 우리는 그를 잃었다고 느껴요. 그 인식의 역설이 지금 시대의 죽음과 존재, 그리고 감각과 기술의 관계를 잘 드러내는 것 같아요.

더불어 존재가 사라진 이후에도 남아 있는 잔향과 잔상을 어떻게 시각적으로 다룰 수 있을지 질문하게 됐습니다. ‘존재의 흔적’을 어떻게 남길 것인가, 그것을 단순한 이미지에 그치지 않고 어떻게 기억과 공감으로 이어지게 할 수 있을까. 이 물음이 요즘 제 작업의 근원적인 동력 중 하나예요. 디자인에서도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끊임없이 시각화하려 하니까요.

요즘은 이렇게 ‘가상의 과거’와 ‘미래의 가능성’을 오가며 인식의 구조를 시각적으로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지를 자주 고민합니다. 무엇이 실제이고, 무엇이 재현이며,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본다’고 믿는가. 그 질문을 자주 해보고 있어요.

소묘 역시 실장님,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시는! 지금 들려주신 이야기도 그렇고, 사주명리학이나 별점에서도 탁월한 스토리텔링 능력을 보여주시잖아요. 결국 ‘패턴과 구조’를 읽고 해석하는 일이라는 점에서, 디자인과 비슷한 결이 느껴져요.

경란 사주명리는 몇 가지 단서들이 모여 하나의 인물이 완성된다는 점에서 책과 닮아 있는 것 같아요. 같은 재료에서 출발하더라도, 관계성에 따라 전혀 다른 서사를 가지게 되죠. 그 구조는 책의 컨텍스트를 읽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아요. 명리를 공부하고 해석하는 일은, 결국 표지를 보고 책의 내용을 가늠하는 방식과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북디자인은 그와 반대로, 서사를 발현시키는 표면의 언어를 찾고 조합하는 과정이에요. 결국 둘 다 ‘이야기’를 다루지만, 접근 방식이 다를 뿐이에요. 디자인은 이야기를 시각으로 풀어내는 작업이라면, 명리학은 이야기를 구조로 추측하고 읽어내는 일이죠. 서로의 방향은 다르지만, 모두 이야기를 해석하고 재구성한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같은 세계에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이야기를 좋아해서 북디자인을 시작했고, 이야기가 궁금해서 명리학에 끌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명리학을 미래를 예측하는 도구로 여기지만, 저에게 명리학은 오히려 ‘나라는 존재를 읽는 텍스트’에 가까워요. 목화토금수 오행이 지닌 색과 형태, 그리고 성질들이 얽혀 하나의 ‘나’를 구성하고, 그 요소들의 관계를 통해 나의 본질을 추측해 보는 일. 그 각각의 서사를 상상해 보는 일이야말로, 제게는 디자인과 다르지 않은 흥미로운 작업이에요.

결국 책이든 사주든, 저는 언제나 하나의 서사를 읽고 있는 독자인 셈이네요.

소묘 이 밖에도 어떤 게 실장님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나요?
경란 이거슨 비밀이에요 ㅋㅋ
소묘 ㅋㅋㅋ 그렇다면, 요즘 실장님의 사소한 기쁨은 무엇인가요?
경란 요즘 가장 큰 기쁨은 큰 곰을 떠올리는 일이에요. 그냥 마음속에서 함께 천천히 걸어다니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거든요. 거대하지만 다정하고, 묵묵하지만 온기 있는 존재. 그 이미지를 떠올릴 때마다 제 마음도 조금은 단단해지는 것 같아요.
소묘 ‘소묘의 여자들’ 공식 질문입니다. 가장 아끼는 단어는 무엇인가요?

경란 제일 어려운 질문이라 한참 생각했는데요, 가장 아낀다기보다는 가장 자주 떠올리는 단어는 ‘자리’예요.

내가 좋아하는 자리, 그리고 나에게 맞는 자리에 대해 자주 생각합니다. 사람마다 머무는 자리가 다르고, 그 자리가 결국 그 사람의 시선과 태도를 만들어주니까요.

그 자리에 앉는 ‘자세’에 대해서도 많이 생각해요. 어떤 마음으로 얼마나 편하게 앉아 있는가, 그게 결국 제가 세상과 관계 맺는 방식이 되는 것 같아요.

 

 

 

작고 온기 있는 ‘장난기’라니, 정말 생각지도 못한 답을 들었고 그게 너무나 기뻤다. 히루의 똥꼬발랄함이 경란 실장님의 손을 거쳐 오후의 소묘의 흔적으로 남는다. 함께한 시간 속에서 쌓인 그 흔적들이 책 곳곳에 스며들어 독자분들께 만지고 싶은 감각을 선사한다. 사라졌지만 만질 수 있다, 느낄 수 있다.

‘존재의 흔적을 단순히 이미지만이 아니라 기억과 공감으로 이어지게 할 수 있을까.’ 요즘 경란 실장님이 품고 있다는 이 물음의 답을, 동력의 이유를 얕게나마 알 것 같은 기분이다.
넓은 호기심과 깊은 몰두로 언제나 이야기를 사랑하는 사람. 사랑하는 이야기들에 온기와 장난기를 불어넣는 사람. 그 온기를 오래도록 이어지게 하는 사람. 그가 작은 곰처럼 묵묵하게 걸어온 길을 떠올리면 내 마음도 든든하다. 오늘은 그가 좋아하는 자리에서 원하는 만큼 편한 자세로 앉아 있기를.

 

 

 

‘소묘의 여자들’은 [월간소묘 : 레터]에 연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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