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소묘: 레터] 12월의 편지 ‘연말정산’

  “숲이 그토록 매력적인 것은 계절의 순환에 따라 달라지는 색깔 때문만은 아니다. 똑같은 나무가 어제와 사뭇 달라 보이기도 하고, 같은 날도 시간에 따라 달라 보이기도 한다. (...) 어쩌면 이 모든 경험들이 일종의 정신적인 부엽토가 되어 조용히 내면에 쌓였는지 모른다.” -피오나 스태퍼드 <길고 긴 나무의 삶>   이달은 한 해를 마무리하며 ‘연말정산’ 특집으로 꾸렸습니다. 연말정산이라 하면 소득과 납부 세액을 따져 모자란 세금은 더 내고 넘친 것은 돌려받는 일을 떠올릴 텐데요. 이런 오해의 소지가 ...

[월간소묘: 레터] 11월의 편지 ‘그 속에는’

  일 년 365일 중 300일을 훌쩍 넘기고서 이제 스산한 계절 속에 있습니다. 저마다 시에 가깝다고 여기는 날씨가 있을 텐데, 제게는 이맘때가 그래요. 제 몸을 떨구는 가을 안에서 조용히 빈속을 들여다봅니다. “강도를 높여가는 겨울의 질문”을 만났을 때 “태울 것이”, “재가 될 때까지 들여다볼 것이” 아주 많기를 바라며 ‘겨울의 재료들’을 미리 수집해요.(안희연 <밤이라고 부르는 것들 속에는>)     그곳엔 두고 온 것이 많다. ... 유년이라는 단어가 거느린 숱한 문들 가운데 겨우 몇 개를 열어보았을 뿐인데 거대 ...

[월간소묘: 레터] 시월의 편지 ‘herbarium’

  “잠든 채 살고 싶다 인생의 부드러운 소음에 둘러싸여”*   잠든 식물들의 장소. 약용식물을 뜻하는 herb와 ~에 관한 물건 혹은 장소를 뜻하는 -arium이 만난 이 단어는 식물표본 그 자체를 가리키기도 하고, 식물지 혹은 식물표본실(관)을 일컫기도 하죠. 아직 국어사전에는 등재된 단어가 아니지만 외래어표기법에 따르면 허베어리엄(혹은 허버리엄, 라틴어를 따른다면 헤르바리움) 정도가 될 텐데, ‘허바륨’이나 ‘하바리움’으로 통용되고 있어요. 하바리움은 투명한 병 안에 특수용액으로 식물을 보존한 형태가 일본에서 ...

[월간소묘: 레터] 9월의 편지 ‘어스름’

  “우리 위에 펼쳐진 저물녘 별들의 그물. / 이것이 나를 집으로, 야생의 새들의 집으로 끌어간다. ... / 경험의 가장자리, 영혼의 경계 ...” -뮤리얼 루카이저, ‘ 아우터 뱅크스’ 중에서, <어둠의 속도>   해가 조금씩 짧아지더니 어둠이 빠르게 찾아옵니다. 이제 7시만 되어도 어슴푸레하지요. 24절기 중 9월의 추분은 낮과 밤의 길이가 같고 그날을 기점으로 밤이 더 길어질 것을 실감하게 해요. 어슬녘은 경계의 시간, 경계 너머 밤은 고양이의 시간. 땅거미가 지면 집 밖 고양이들의 식사를 준비 ...

[월간소묘: 레터] 8월의 편지 ‘빨강’

  오래 준비한 비올레타 로피즈의 그림책 <노래하는 꼬리>를 선보이며 빨강에 대해 생각한 날들이에요. 로피즈가 사랑하는 팬톤 컬러 ‘warm red’가 쨍하게 인쇄된 그림을 보면서 왜 빨강일까, 묻고 답하고 또 물어요. 빨간색은 가시광선 중 파장이 가장 긴 빛의 색이죠. 파장波長. 물결의 길이. 그러니까 빨강은 멀리 가는 파도, 천천히 치는 파도. ‘노래하는 꼬리’마냥 지구 한 바퀴를 돌고 돌아오는 파도. 또한 모험, 저항, 정열, 열정, 금지, 경고, 신성, 고귀, 장미, 퇴폐, 피, 헌신, 혁명, 삶, 죽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