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지도]는 오후의 소묘에서 출간한 그림책 제목이지만, 앞으로 펴낼 ‘마음/감정’에 관한 에세이 시리즈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월간소묘 : 레터]에 연재하고 있습니다.

[마음의 지도] 가을과 농담 혹은 농담(濃淡)

글 문이영   입추는 옛날에 지났고 백로가 닷새 전이었으므로 사실 여름은 오래전에 끝났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뉘엿뉘엿한 해를 보다가 맥없이 가버린 여름이 불현듯 아쉬워 쌀 한 컵에 보리 반 컵을 씻어서 불려 놓고 바깥으로 나왔다. 겪어본 중 손에 꼽게 맹숭맹숭한 여름이었다. 연일 퍼붓던 비가 그치고 뒤늦게 찾아온 무더위도 잠시, 쌀쌀한 새벽 공기에 자다 일어나 창을 닫았던 것이 이미 보름 전 일이다. 여름은 떠났으나 들녘에는 축축한 여름 냄새가 남아 있다. 태양이 황도를 따라 멀어진 거리만큼, 서늘해진 땅 위에서 여름의 냄 ...

[마음의 지도] 어둠으로 올라가는 길

글 문이영   해 질 무렵 삼청동에 갔다. 날이 좋아 걷다 보니 광화문에서 시작한 산책이 길어졌다. 산책을 좋아한다. 풍경의 변화 속에서 생각이야 제멋대로 흘러가게 내버려 두고 그저 몸을 움직여 나아가는 일을 즐긴다. 그것은 무언가로 깊이 빠져들면서 동시에 끊임없이 빠져나오는 일, 일어나는 생각을 알아차리고 또 그 생각에서 풀려나는 일이라는 점에서 명상과도 닮았다.   거리에 옅은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가파르게 솟은 언덕 너머로 저녁노을이 섞여들고, 비탈 아래 빼곡히 들어선 가게 하나둘씩 불을 밝혔다. 나는 곧 파스타 가게 오른편 ...

[마음의 지도] 노래하는 마음으로

글 문이영   새벽 바다를 보러 갔다. 해 뜰 무렵의 바다를 보고 싶어서 겨우 눈곱만 떼고 서쪽으로 향했다. 차는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도심을 벗어났고 바다에 가까워질수록 검푸른 하늘 아래 벌판만이 광막했다. 불어오는 바람에서 달고 짠 맛이 났다. 오랜만에 느끼는 고요한 기분 속에서 생각보다 가까운 이곳을 자주 찾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그리운 마음 열두 달을 모아 일여 년 만에 보러 간 바다였다. 아직 많은 사람들이 잠들어 있을 시간. 푸르스름한 새벽안개 속에서 부드럽게 들락날락하는 파도를 바라보다 문득 맨발로 걷고 싶다는 ...

[마음의 지도] 화이트 노이즈

글 문이영   오후 여섯 시, 현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섰다. 낮 동안 밀폐된 채 달구어진 집은 그야말로 찜통이다. 땀으로 불쾌해진 운동화를 아무렇게나 벗어던지고 거실 창문을 있는 대로 활짝 열었다. 더운 바람이 느리게 불어와 투명한 열기를 조금씩 흐트러뜨리는 시간. 여름이 또 하루만큼 저물고 있었다. 병원에서부터 걸어오느라 땀에 절은 옷을 벗고 속옷 차림으로 거실 바닥에 드러누웠다. 끈적한 등허리 밑으로 서늘한 기운을 느끼며 뱅글뱅글 정신없이 돌아가는 아이보리색 천장을 맥없이 바라보았다. 그러다 나도 모르게 속이 울렁거려 눈을 질 ...

[마음의 지도] 유월이 하는 일

글 문이영   저녁을 먹고 공원을 산책했다. 안개 낀 유월 저녁이었다. 이곳 평야 지대는 빛이 사라지는 시간에 안개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늦은 밤부터 동트기 전까지 자욱하게 깔리지만, 해가 높이 뜨면 감쪽같이 사라지는 여기 안개에 익숙해진 지도 어느덧 사 년이 되었다. 잦은 비 소식 끝에 찾아온 맑은 날이어서일까, 밤이 깊어 적막할 줄 알았으나 꼭 그렇지는 않았다. 어둠과 안개 속에 모습을 감추고 있다가 산책로 방향이 달라질 때마다 나타나는 사람들과 더러 마주치기도 했다. 무표정하게 혼자 걷는 사람들과 스쳐 지나가며 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