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이라는 지명은 없는 그러나 익숙하고도 낯선 우울의 지형으로 이루어진 아름답고도 너른 지도

[우울이라 쓰지 않고] 가을과 농담 혹은 농담(濃淡)

글 문이영   입추는 옛날에 지났고 백로가 닷새 전이었으므로 사실 여름은 오래전에 끝났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뉘엿뉘엿한 해를 보다가 맥없이 가버린 여름이 불현듯 아쉬워 쌀 한 컵에 보리 반 컵을 씻어서 불려 놓고 바깥으로 나왔다. 겪어본 중 손에 꼽게 맹숭맹숭한 여름이었다. 연일 퍼붓던 비가 그치고 뒤늦게 찾아온 무더위도 잠시, 쌀쌀한 새벽 공기에 자다 일어나 창을 닫았던 것이 이미 보름 전 일이다. 여름은 떠났으나 들녘에는 축축한 여름 냄새가 남아 있다. 태양이 황도를 따라 멀어진 거리만큼, 서늘해진 땅 위에서 여름의 냄새가 천천 ...

[우울이라 쓰지 않고] 유월이 하는 일

글 문이영   저녁을 먹고 공원을 산책했다. 안개 낀 유월 저녁이었다. 이곳 평야 지대는 빛이 사라지는 시간에 안개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늦은 밤부터 동트기 전까지 자욱하게 깔리지만, 해가 높이 뜨면 감쪽같이 사라지는 여기 안개에 익숙해진 지도 어느덧 사 년이 되었다. 잦은 비 소식 끝에 찾아온 맑은 날이어서일까, 밤이 깊어 적막할 줄 알았으나 꼭 그렇지는 않았다. 어둠과 안개 속에 모습을 감추고 있다가 산책로 방향이 달라질 때마다 나타나는 사람들과 더러 마주치기도 했다. 무표정하게 혼자 걷는 사람들과 스쳐 지나가며 알 수 없는 ...

[우울이라 쓰지 않고] 공통의 기원

글 문이영   고대인들은 햇빛에 치유 능력이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헬리오테라피Heliotherapy’는 고대에 시행되었던 광선치료를 일컫는 단어로, 그리스 태양의 신 헬리오스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2세기에 살았던 한 그리스 의사는 이렇게 썼다.   “무기력증에 시달리는 사람은 빛이 드는 곳에 눕히고 햇볕을 쬐도록 해야 한다. 어둠은 병의 원인이다.” (Lethargics are to be laid in the light and exposed to the rays of the sun (for the disease is g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