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묘 “마음이 기우는 것들을 사려 깊게 그려가고 있다. 고운 인상이 남은 것들로 작고 적은 무언가를 만들기도 한다.”
작가님 저자 소개글에는 늘 이 문장이 들어가요. 좀 더 풀어서 소개해 주실 수 있을까요?
혜미 쉽게 지나치지 못하고 들여다보게 되는 것, 그래서 계속 생각하게 되는 것이 기울어진 마음이겠죠. 그렇게 기울어진 마음들 중에서도 특히 고운 인상을 잘 담아내고 싶어요. 작고 적은 무언가는 독립출판과 가까운 것을 의미해요. 홀로 만드는 것들은 작은 크기에 적은 수량으로 만들어질 수밖에 없지만, 늘 최선을 다해 만들어요.
소묘 이렇게 소묘랑 찰떡이야. 오후의 소묘 모토가 작고 짙은 온기를 전한다-잖아요.
그림은 언제부터 그리셨어요? 책에서 특히 친구들과의 에피소드를 보면 어릴 적부터 그림 그리는 사람이 꿈이었던 것 같아요.
혜미 저 원래는 만화를 하고 싶었어요.
소묘 맞아, 만화 얘기도 나오고.
혜미 어릴 때 아빠의 직장으로 인해 전학을 많이 다녔어요. 친구 사귈 시간이 거의 없고, 혼자 있는 시간이 너무 많아서 그림을 그렸어요. 그림을 그리니 사람들과 쉽게 어울리게 됐어요. 중학교 때 만화책 보는 걸 좋아했는데, 그때 박희정의 만화책을 보고, 만화를 해야겠다 마음먹었죠.
소묘 <호텔 아프리카> 제가 제일 좋아해요.
혜미 진짜 좋아요. 당시에 그분이 만화책과 함께 일러스트집도 내기도 했는데, 그게 제 방향성이라고 생각했어요. 만화가가 되고 싶어서 애니메이션 고등학교에 진학하길 희망했는데, 뜻대로 되지 않았고, 부모님도 그림 그리는 걸 만류하고, 그래서 그리는 일을 포기했어요.
소묘 그럼 그림 쪽으로 완전히 진로를 정하신 건.
혜미 고등학생 때 선생님이 갑자기 너 이거 한번 해볼래 하셨는데, 그게 동양화였고. 대학을 동양화과로 진학했는데 졸업까지 했지만 저랑은 잘 안 맞더라고요.
소묘 아니, 작가님 그림은 동양화적인 데가 있다고 항상 생각했어요. 이번 책이 특히 그렇고.
혜미 어떤 의미냐면, 회화 쪽에서는 너는 디자인을 하는 게 맞을 것 같다고 하고, 디자인과로 가면 너는 회화를 하는 게 맞겠다고 하고. 항상 그 중간에서 맴돌았던 것 같아요. 나에게 맞는 게 뭔지 몰라 찾기 바빴죠. 그래서 도서관으로 서점으로 책을 보러 많이 갔어요. 우연히 그림책 한 권을 만났는데, 그게 아이완 선생님의 책이었죠.
소묘 <구멍>(마루벌, 2005) 너무 좋죠.
혜미 맞아요. <구멍>도 너무 좋죠. 그때 전 <워터보이>(아트북스, 2004)를 보며 이런 책을 만들어야겠다. 이게 내가 갈 길이다, 그 순간 마음먹었어요.
소묘 우와, 결정적 순간이네요. 어떤 지점에서요?
혜미 그 책을 보기 전까지 저는 그림책 하면 아이들이 보는 책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 책은 제가 좋아하는 만화와 일러스트의 사이에 있었고.
소묘 지금이라면 그래픽 노블이라고 할 텐데.
혜미 네, 그땐 그런 개념이 없었고. 무엇보다 제 마음을 크게 울렸어요. 그래서 대학 졸업하자마자 무작정 아이완 선생님이 수업하시는 데를 찾아갔어요.
소묘 용감하시다.
혜미 아니요. 그때도 혼자 마음먹은 게 아니라, 친구가 해준 말 덕분에.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사람한테 배울 수 있는 기회라면 네 전부를 걸어봐도 괜찮지 않을까? 그런다고 네가 망하지 않아. 그래? 안 망해? 그래서 무턱대고 짐 싸가지고 상경한 거죠.
소묘 용감하신 거예요.
혜미 <구멍>, <워터보이>랑 아이완 선생님 책 여러 권 들고 처음 사인받는 데 제 손이. 혜미 씨 왜 그렇게 떨어? ㅎㅎ 그렇게 아이완 선생님한테 이것저것 배우다가 같은 학원에서 이지선 선생님께도 배우게 됐어요. <검은 사자>(한솔수북, 2010) 그리신.
선정 신기한 게, 이지선 선배는 대학 때 저한테 그림책을 알려준 사람이에요. 이렇게 우리한테 영향을 준 게 같다는 게 너무 신기해.
혜미 제가 아이완 선생님, 이지선 선생님, 두 분의 영향을 되게 많이 받았어요. 여러 사정으로 학원을 그만두게 됐고, 그게 아쉬워 힐스(*HILLS: 한국일러스트레이션학교)에 입학해 그림책 한 권을 완성했어요. 이혼을 결심한 부모가 물건을 둘로 나누기 시작했고, 집에 있는 모든 물건을 나눈 부모가 마지막엔 자식도 나누기 위해 두 팔을 잡고 싸우다 결국 아이가 찢어져요. 놀란 부모는 여러 방법으로 두개로 찢어진 아이를 다시 하나로 이었지만, 아이에게는 찢어진 상처가 흉터로 남아 아이로 어른으로 살아가는 책을 만들었죠. 그 더미로 여러 출판사와 계약 이야기가 오갔는데, 어디든 비슷한 얘길 하는 거예요. 결말을 바꾸자, 혹은 흉터를 없앴음 좋겠다. 이야기의 핵심은 흉터를 지닌 채 살아가는 건데? 그래서 결국 책은 계약이 이뤄지지 않았죠.
소묘 몇 년쯤이에요?
혜미 2013년인가.
소묘 그때는 그림책이 아이를 위한 거고 어린이책은 밝아야 하고 그런 분위기였죠. 지금은 그대로 나올 수 있을 텐데.
혜미 네, 맞아요. 10년 전까지만 해도 그랬으니까. 당시엔 그림책 세계가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어요. 이곳에서 내 이야기는 너무 어둡다.
소묘 그래서 독립출판을 시작하신 거예요?
혜미 네.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하고 싶은 작업을 직접 만들면서, 그렇게 계속해서 해 나갔어요. 그러면서 여기까지 오게 됐고요.
소묘 사실 이번 저희 책 <사적인 계절>은 그동안 작가님이 작업해 온 그림 위주의 책들과는 다르게 에세이 비중이 굉장히 높잖아요. 에세이 화집 출간을 마음먹게 된 계기랑 글 작업을 어떻게 하셨는지도 궁금해요.
혜미 한 번씩 이상한 용기가 생겨가지고.
소묘 이상한 용기 너무 좋다.
혜미 글을 잘 쓴다 생각해 본 적 없는데, 소묘랑 <빛이 사라지기 전에>(2021) 내고 나서 에필로그에 작가의 말도 좋았다는 이야기를 많이들 해주셨어요. 노석미 작가님 산문집 <서른 살의 집>(마음산책, 2011)이나 <매우 초록>(난다, 2019)을 읽고, 언젠가 그런 책을 내보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도 있었고. 소묘에서 에세이 화집 제안 주셨을 때 이 기회가 마지막일지 모르는데 사람들이 준 용기를 덥석 잡아보자 싶었죠. 그렇게 무작정 잡았는데. 진짜 후회를 많이 했죠. 너… 제정신이야?
소묘 왜요. 이렇게 잘 쓰셔놓고. 물론 저희가 이 책 계약을 2021년 겨울에 하긴 했어. 원고도 원래는 2023년에 들어왔어야 해.
혜미 그러니까 그게 그림이 아니라 다 글 때문에. 마음먹고 쓰기 시작한 건 2년 전인데 그때 동료 그림 작가들이랑 같이 남지은 시인님한테 글쓰기 수업을 듣게 됐어요. 저는 시인님이 내주시는 주제랑 안 맞게 우리 책 주제로… 계절 글을 1년 동안 써서 보여드렸고 피드백 받고 한 게 이 책에 실렸죠. 책 받자마자 그날 저녁에 바로 시인님한테 전해드렸는데, 돌아오는 길에 울컥하더라고요.
소묘 오늘 같이 모셨어야 했네요. 감사하다. 책 펴낸 소감도 여느 때랑 다를 것 같아요. 연휴 동안 리뷰가 제법 올라왔는데 혹시 기억 나는 후기 있으세요?
혜미 사실 좀 어벙벙했어요. 이렇게 긴 리뷰를 전에 본 적이 없어서. 그동안 냈던 그림책이나 독립출판물 후기랑은 정말 다르더라고요. 처음 리뷰 올라왔을 때 깜짝 놀랐고 계속 깜짝깜짝 놀라고 있어요. 에세이 리뷰는 이렇게 길구나, 다들 글을 잘 쓰시는구나. 저도 생각하지 못한 부분까지 깊게 읽어주시고 진심이 전해지니까, 감사하다, 너무 감사하다. 그리고 저를 오래 봐오신 분들의 리뷰도 있지만 소묘 책을 좋아하시는 분들이 많이 봐주셨구나 알겠더라고요. 서로에게 참 좋은 일이었다, 이런 생각도 들고.
소묘 저는 이번 겨우내 작가님 그림 안에서 사는 기분이었어요. 우리 책 겨울 장면이 다 눈이잖아요. 사실 책 작업 시작할 때만 해도 이 그림들이 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는데, 첫눈부터 폭설이더니 눈이 많이 자주 왔어요. 내 눈앞에 펼쳐진 게 다 그림 같고 믿기지가 않고, 내가 이 계절을 혜미 작가님 그림으로 통과하고 있구나. 잊지 못할 겨울이겠다. 작가님에게 특별한 계절은 언제예요?
혜미 봄이요. 추웠다가 따뜻해질 때 그 기분 그 냄새 그런 게 좋아요. 싹이 움트고 꽃이 만개하는 것도.
소묘 책에도 쓰셨는데, 원래 이름이 향기였다고.
혜미 네, 봄에 태어나서. 엄마는 아직도 향기라고 불러요. 그래서 그런가, 봄이면 좋은 기분이 돼요.
그런데 그림은 여름 장면을 더 많이 그리게 되더라고요. 여름을 좋아하진 않지만 기억들은 여름에 더 선명하게 남아서인 것 같아요.
소묘 그러고 보니 저희 <빛사전>도 여름이고.
선정 저도 계절로서의 여름은 안 좋아했는데, 책에서 여름 장면들이 정말 아름다웠어요. 특히 선풍기 틀고 누워서 책 보는 장면.
소묘 아, 너무 좋죠. 그 옆에 조각 그림들도. 수박이랑 포도랑 모기향이랑.
혜미 그 조각 그림은 저도 그리면서 어, 왜 이렇게 잘 나오지… 했어요. 큰 그림이 잘 나왔어야 했는데. 후후.
소묘 작가님 작업 영상 보면 한 땀 한 땀 점점이 세밀하고 섬세하게 작업하시잖아요. 감탄과 동시에 걱정도 들어요. 연필로 스케치하고 그 단종됐다는 펜으로 먹선 그리고 그 위에 색연필이랑 물감으로 채색하시는데, 한 장면 완성하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한 걸까. 이번 책은 일 년 내내 작업하셨죠.
혜미 네, 이 책은 한 컷 한 컷 완성하기보다는, 섬네일이랑 더미북을 만들어놓고 모든 장면을 우선 스케치한 후에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식으로 작업해서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보통 표지 한 장 하는 데는 한 달이 걸려요. 운동 같은 일상생활을 영위하면서 건강하게 작업할 때 한 달인데, 이 책 작업할 때는 아무것도 못 했죠. 산책도 안 하고 밤도 매일 새고.
선정 저희가 작업할 때 자주 통화하는 편인데, 그림 마감 앞두셨을 때 한 달은 연락을 못 드리겠더라고요. 마지막 통화 때 서로 웃다가 끊었죠.
혜미 웃음이 계속 나.
소묘 체념… 실성… 흐흐. 우리 이 책 마감한 게 기적이었어. 근데 잘 나왔죠. (*뒤늦게 지원사업에 선정된 바람에(?) 지원사업 마감일에 맞추느라 모두의 한 달이 송두리째 사라진….)
소묘 책 작업하는 동안은 역설적으로 계절을 느낄 새가 없으셨을 텐데 그럼에도 기억에 남는 계절의 순간이 있으실까요?
혜미 바깥에서 느끼는 계절도 있지만 집 안에서도 계절의 변화를 알아챌 수 있어요. 우선 햇빛의 각도가 달라지잖아요. 해가 뜨고 지는 시각이 달라지고, 창문을 열어놓는 시간도 달라지고, 그때 들어오는 바람도 달라지고, 그래서 식물이 놓여지는 자리가 바뀌고.
소묘 슬프지만 다행이다.
혜미 작업하면서 밤을 새는데 5시에 들어오던 빛이 이제 6시에 들어와 점점 슬퍼지는 거. 그러다 7시에 들어오면 정말로 계절이 바뀌었구나 알게 되는 거. 저는 사실 그게 좋아요. 모를 수도 있는데 그걸 내가 알아채고 있다는 게. 원래 그랬던 건 아니고 이 책 작업하면서 더 생각하게 됐어요. 일출 시간이나 일몰 시간도 확인하게 되고, 해가 이만큼이나 길어지는구나 이만큼이나 빨리 지는구나. 겨울 글에도 썼는데 어느 날은 일몰이 4시 35분에 시작돼요. 그전엔 겨울에 해가 그렇게 빨리 지는지 몰랐어요.
소묘 2019년의 사적인 계절과 2025년의 사적인 계절 사이에 달라진 점이기도 할까요?
혜미 네, 애정인 것 같아요.
소묘 2019년의 <사적인 계절>엔 에필로그에 이렇게 쓰셨거든요. “어릴 땐 사계절이 있는 게 싫었다. 적응할만하면 계절이 바뀌었고 나는 늘 계절을 쫓아 살아가는 기분이었다.”
혜미 맞아요. 맞아요. 많이 바뀌었어. 예전엔 계절이 그냥 배경이었던 것 같아요. 어딜 지나갈 때 보이는 건물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계절을 기억하는 감각도 뭉뚱했죠. 그사이 시간도 흐르고 나이도 먹고, 그러면서 관계에 대한 생각도 바뀌고 만나는 사람들과 더 깊어지고, 풍경을 바라보는 시선도 그만큼 달라졌어요. 이 책 작업하면서는 뭐랄까, 빵 굽는 것처럼 제 마음이 이스트처럼 부풀어 올랐달까. 예를 들면, 옛날엔 그냥 덥다 하고 끝났을 텐데 더울 때 뭘 하면 좋을까 생각하기도 하고, 맞아 그때 그 애랑 그랬을 때 좋았는데 떠오르기도 하고, 이런 게 켜켜이 쌓이면서 페이스트리처럼. 잘 익어간 것 같아요. 이게 다 뭘까, 짚어보면 결국 애정.
소묘 너무 아름다운 답변이다. 그래서 제가 이 책을 편지 같다고 느꼈나 봐요. 편지엔 애정이 들어가니까.
저는 이 책의 중요한 키워드로 ‘우리’를 첫손에 꼽았거든요. 에피소드에서 친구나 동료 이야기가 자주 등장하고 작가님에게 소중한 존재이자 작가님 삶에서 큰 공간을 차지하고 있구나 느껴졌어요. 제목이 ‘사적인 계절’인데, 실은 ‘우리의 사적인 계절’이겠구나. 선정 실장님은 디자인하실 때 컨셉을 ‘산책’으로 잡아주셨죠.
선정 혜미 작가님 하면 걷는 사람, 저한테 이런 이미지가 있어요. 계절을 통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산책일 텐데, 작가님은 걸으면서 계절을 예민하게 느끼고 보이는 아름다운 것들을 담아내는 사람이에요. 이 책 작업하면서 제일 신경 쓴 부분이 당연히 표지였고 또 서체도.
소묘 서체요. 시안 여럿 주셨는데 이 서체가 젤 좋았어요. 이 서체 이름도 예쁘잖아요.
혜미 저도 궁금해서 물어봤어요. 단편선이라고.
선정 네. 한 번도 책에 써본 적은 없었는데, 작가님 그림이랑 너무 잘 어울렸어요. 서체만이 아니라 글자색 고민도 컸어요. 일반 책처럼 그냥 먹으로 가기보다는 여러 톤이 섞인 그레이가 좋겠다. 아까 작가님 그림이 동양화적이라는 이야기도 나왔는데, 표지랑 본문에서 여백도 충분히 살리고 싶었어요. 작가님도 소묘도 오래 알고 여러 권 같이 작업해 왔고, 이 책은 또 새로워서 좀 신났던 것 같아요. 이것저것 해보려고 시도하고. 표지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됐으면 좋겠다, 그래서 시안에서 컨셉으로 잡은 산책 장면들을 담았었죠.
소묘 공교롭게도 산책 그림들이 다 회색인 거예요. 앞표지에는 풀린 끈 운동화, 뒤표지에는 묶인 끈 운동화 이렇게 넣어주시고, 너무 좋은 메타포잖아요. 웬만하면 살리고 싶었는데.
혜미 내가 잘못했네. 나중에 그런 일이 생기면 얘기해요. 내가 색을 바꿔볼게.
소묘 (웃음) 저희가 그래서 표지 조각 그림들을 절충했어요. 산책과 우리로. 재킷 그림은 혜미 작가님이 골라주셨잖아요. 선정 실장님과 저도 그거다 생각했어요.
혜미 버드나무. 그게 마지막으로 그린 그림이에요. 사실 너무 시간이 촉박해서 본문에서 빼려고 했었잖아요.
소묘 제가 안 된다고. 스케치 때부터 반했고 그 장면 글도 좋아서.
혜미 네, 저도 아쉬워서 여기까지만 힘을 내보자 하면서 그렸어요. 제가 버드나무를 좋아하기도 하고, 다른 계절 장면들보다 계절의 영향을 크게 안 받는 그림이기도 해서 재킷으로 골랐어요. 버드나무가 몸집도 몸짓도 되게 크거든요. 그런데 의외로 사람들이 유심히 지켜보는 나무는 아니에요. 그냥 산책길에 스쳐 지나가는 나무지. 그러다 봄에 홀씨 날릴 때 그제야 버드나무 홀씨네 하고 보게 되는 아이. 친구가 책을 보더니 그러더라고요. 바람이 부는 것 같아.
소묘 맞아요. 바람이 부는 것 같아요.
혜미 그 말이 너무 좋은 거예요. 이 책이 그랬으면 좋겠다. 바람 불 때 한번 돌아보는, 그때 귀 기울여서 봐주면 참 좋겠다.
선정 바람 부는 표지 좋다. 저는 이 초록도 좋았어요. 작가님이 색을 아름답게 잘 쓰시는 분인데 특히 나무, 풀, 녹색이 다 예쁘더라고요. 다채로운데 차분한 느낌이고, 중간톤도 풍부하고, 볼수록 작가님을 잘 표현한 색 같다, 아름답다.
혜미 식물 돌보는 거나 산책길에 나무 보는 걸 좋아하고, 저는 하루에 서너 시간도 걸어요.
항상 같은 길을 걷는데, 책에도 썼지만 한강을 나가잖아요. 제가 좋아하니까 친구들 데려가 같이 걷기도 하고 혼자 걷더라도 통화를 자주 해서, 계절이 다시 돌아오면 그때 친구들이랑 나눈 대화가 그 길을 지나는 동안 떠올라요. 그래서 산책이랑 우리에 더하자면, 저한테 <사적인 계절>의 중요한 키워드는 ‘기억’이에요.
소묘 책에도 어떤 기억들이 생생하게 묘사돼 있고. 일기를 쓰시니까 그 영향인 건지 아니면 자연스레 작가님 안에 쌓이는 건지 그것도 궁금했어요.
혜미 많이 안 나가서인 것 같아요. 집에서 혼자 작업하거나 산책을 나가거나 둘 중 하나예요. 그러니까 일단 누군가를 만나고 새로운 일이 생기면 기억을 또렷이 할 수밖에 없어요. 예전엔 그래서 늘 저만 분명하게 기억하는 것 같고 상대는 잊거나 잘못 기억해서 서운하고 혼란스러웠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그게 흐려지더라고요. 그 친구랑 있었던 어떤 사건들이 말들이 저한테 선명하다면, 이젠 너무 좋아요. 나만 갖고 있는 선물 같은 거니까. 이 책에 그런 이야기들을 쓸 수 있어서 또 좋았어요.
혜미 이름을 불러줘야지 그게 나에게 의미가 되는 것처럼, 저는 누군가의 관계를 통해서 그 풍경이 온전히 제 것이 된다는 걸 깨달았어요. 액자로 보는 배경 같던 계절이, 누구와 있었던 추억이 되는 순간 온전히 그 계절로 불리면서 액자 속으로 들어가는 느낌. 마지막에 쓴 것처럼 “혼자여도 둘이 되어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이 문장이 제가 생각하는 ‘사적인’이 아닐까.
2019년의 사적인 계절은 저다운 계절을, 그러니까 자연과 계절을 어떻게 그려야 할지 탐구하는 과정에서 나온 결과물이었어요. 근데 이 스타일로 작업을 지속하는 게 무척 힘들고, 그림 스타일을 바꿔야 한다는 생각을 해왔는데, 이번 책 작업 하면서 정리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어요. 소묘한테 좀 고마운 게 지금 그림 스타일을 꽃 피우게 된 게 사적인 계절(2019)인데, 사적인 계절(2025)로 충분히 잘 마무리를 할 수 있어서.
소묘 너무 아쉽기도 하고 다행이기도 하고 여러 가지 마음이 드네요. 더 소중한 책이 되어버렸어. 그림 스타일 조금 편안하게 바꾸시는 건 좋을 것 같고. 그래도 저희 계절 그림책은 계속 만들어요. 여름은 <빛사전>이 있으니까, 이제 봄 가을 겨울 하면 돼.
혜미 네? 그러고 보니 이번 책도 <빛사전> 내고 아무 생각 없이 소묘 사무실 놀러 갔다가 갑자기 얼렁뚱땅 정신없이 계약서 썼던 기억이 나네요. 또 이렇게… 전 당분간은…
소묘 (안 된다고 하시기 전에 급히 말을 돌린다) 그럼 올해는 그림 스타일 바꾸는 실험들을 하시겠네요.
혜미 아직 올해 계획을 못 세웠는데, 그동안 수년을 숨 가쁘게 해온 책 작업들이 다 끝나서 당분간 쉼을 갖고 생각해 보려고요. 그림 스타일도 바꾸려면 시간이 필요하고. 제가 생각해도 저는 좀 심하다 할 정도로 몰입해서 작업하는 편인데 일과 쉼을 잘해야지 오래 갈 수 있을 것 같고, 일단은 루틴을 만들고 싶어요. 그리고 다양한 것들을 배우고 싶고. 지금은 금속 공예 생각하고 있어요.
소묘 잘 어울려요. 제 주변에 금손이 참 많은데 작가님이 탑 오브 탑이에요.
혜미 뭐든 허투루 만들려고 하지는 않아요.
소묘 너무너무. 저희가 몹시 장시간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이제 진짜진짜 마지막 질문 드릴게요. 오후의 소묘의 모토가 ‘작고 짙은 온기’를 전한다인데, 작가님에게 온기란.
혜미 동물의 머리를 만지거나 쓰다듬을 때, 식물의 잎사귀를 만졌을 때, 햇볕에 닿았을 때 아니면 사랑하고 악수할 때, 손을 잡고 걸을 때, 그럴 때 온기라는 말을 쓰지 않나. 그럼 내 온기는 뭘까 곰곰 생각했을 때 제가 만들어내는 것들이겠구나. 누군가한테 전해주고 싶은 마음으로 만들고 있고, 그 마음이 따뜻했으면 좋겠다에서 출발해요. 그렇게 만들고 전하는 온기는 제 용기하고도 닮아 있는 것 같아요. 저는 항상 뭐 만들 때마다 걱정과 고민과 고려를 정말 많이 하기 때문에, 그것들이 내 용기고 온기다. 지금 누군가 내 책을 읽고 있거나 제가 만든 무엇을 갖고 있다면 그건 제 온기들을 하나둘 품고 계시는 거 아닐까 생각해요. 소묘 작가님이 만든 것이 곧 온기다. 좋아요.
– 우리는 2월의 한파가 닥친 날 한 시에 만나 일곱 시에 헤어졌다. 장장 여섯 시간에 걸쳐 먹고 마시고 이야기 나누며 온기를 가득 나눴다. 가만히 앉아 긴 산책을 한 기분. 소소한 이야기들을 빼고도 녹취를 풀었더니 A4 70장이 나왔는데 그걸 사흘 꼬박 들여 다섯 장으로 줄였다. 어쩌면 누락된 65장이, 아니 어쩌면 70장 밖의 이야기가 더 중요했을지 모른다. 고양이와 댕댕이, 임보와 입양, 철새와 탐조와 감탄, 맛집과 여행과 좋아하는 장소, 커피와 디저트, 삶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와 소중히 여기는 단어, 친구와 동료와 자매들, 책 속 장면마다 얽힌 에피소드, 빠질 수 없는 MBTI(혜미 작가님과 소묘는 같고 선정 실장님은 정반대…), 절망과 희망의 다채로운 순간들, 그리고 이놈의 시국 시국 시국- 분노와 희망을 번갈아 저글링하며. 그럼에도 우리는 아름다움을 놓고 싶지 않아서 기어이 서로가 내어준 온기를 잡고, 용기를 내고, 용감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