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을 연습한 시간> 신유진 작가와의 여담(feat. 이치코 실장)

쓰고, 살고, 모든 것은 사랑하기 위해

(모두가 한창 이안이‘랑’ 이야기하다가 이안이 잠든 후-)
유진 내가 쓰는 걸 진짜 좋아한다는 걸 최근에 알게 됐어. 오래전부터 계속 써왔는데 예전엔 뭔가 쓰고 싶다라는 열망만 있었지, 쓰는 걸 좋아한다고는 생각 안 했거든. 그래, <사랑을 연습하는 시간>(이하 사연시) 쓰면서부터 쓰는 것에 대한 생각도 많이 달라졌고 내가 이걸 진짜 좋아하는구나를 깨달았어.
소묘 와, 우리 책 하면서.
유진 <사연시> 쓰면서 내 안에서 쓰기에 대한 무언가가 바뀌었어. 그 책을 쓰고 싶다는 열망이 크게 있었지만 그게 뭔지를 잘 몰라서 처음 쓰기 시작할 때 이렇게 쓰는 게 맞나,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까 자신이 없었는데, 이제는 좀 알 것 같아요. 내가 왜 쓰는지도 알겠고 어디로 나아가는지도 알겠어.
소묘 뭘까요.
유진 기본적으로 나는 예술을 위해서 쓰는 사람이 아니야. 쓰면서 내가 알고 있는 세계가 조금 더 깊어지고 보이지 않았던 게 보이는, 그 자체가 좋아요. 모호했던 게 쓰면서 좀 선명해지잖아요. 그게 너무 좋아. 그러니까 이게 사실은 삶이랑 연결되어 있어.
소묘 어머님이 써주신 편지에 적혀 있던 표현이 떠올라요. “펜을 들고 책상에 앉아 있는 작가의 뒷모습이 아니라, 곡괭이를 들고 의자 위에 서서 숨 가쁘게 글을 캐고 있는 너의 살아 있는 모습….” 유진 작가님 글이랑 쓰는 태도를 그대로 보여주는 문장이라 정말 좋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말씀하신 것과도 맞닿아 있는 것 같아요.
유진 나한테 되게 힘든 시간이 있었거든요. 책 읽고 쓰고, 우리가 생각하는 작가의 삶이 있잖아요. 근데 내 현실은 그냥 책상에 앉아서 쓸 수 없는 삶이니까.
소묘 그렇죠. 카페 일도 있으시고, 우리 이안이도 돌봐야 하고.
유진 쓰는 거 말고도 할 일이 너무 많아. 삼시 세끼 밥에 청소에, 나는 집안일도 중요한 사람이란 말이에요. 근데 이 책 쓰면서 어쨌든 그걸 느꼈어요. 나는 내 삶을 어떻게 사는가가 중요하고, 내가 쓰는 글은 내 삶을 위해서 쓰는 것이구나.
소묘 우리 책 3부 제목이 ‘삶을 쓰기’잖아요. 그 제목이 나올 수밖에 없었어. 그 방향으로 가시는 게 너무나 명확히 보여요.

유진 긍정적인 마음으로 잘 살자 이런 게 아니라 삶을 좀 깊이 보고 더 알기 위해서 쓰는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고. 예를 들어서 춘포 이야기도 내가 자주 쓰잖아요. 더 자주 쓰게 될 거고. 처음에는 그냥 내가 여기를 좋아해서 이렇게 쓰고 싶은 거구나 싶었는데 이 이야기를 쓰는 이유나 이곳에 대해서 찾다 보니까 장소 인식의 개념이랄지 생태주의랄지, 또 다른 세계로 확장하게 되더라고요. 머릿속에 어렴풋이 품고 있었던 어떤 마음과 감정이 언어로 조금 더 명확해지는 거지.
유진 아 진짜요? 이런 마음들이 뭐고 왜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거지? 했었던 질문들에 대한 답을 계속 찾아가고 있는 거지. 그래서 쓰는 걸 좋아해.
소묘 유진 작가님은 선명해지고 있어요, 질문들이?
유진 질문들이 선명해지고 거기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면 그 답이 또 다른 질문을 가지고 오고 그럼 또 나는 답을 찾아야 하고. 그렇게 나는 나를 위해서 쓰는 것 같아.
소묘 요즘 품고 계신 질문은 뭐예요?
유진 얼마 전 북토크 때 말했었잖아요. 무언가를 시작할 때, 내가 사랑하고 있는가. 끝날 때, 내가 충분히 사랑하는가. 이 질문을 진짜 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어떤 책을 쓸 때 내가 이 책을 글로 쓸 만큼 이 이야기를 사랑하고 있는가라는 질문과, 그 책이 끝날 때쯤에는 충분히 사랑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할 수 있어야 돼. 이걸 내 기준으로 정했어. 책만이 아니라 사람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고, 내 삶의 모든 것에 대한 기준. 그래서 사랑하고 있는가에 대한 대답에서 망설여지면 그건 안 하는 게 맞아. 물론 어쩔 수 없이 해야 되는 일도 있어요. 그런 일들은 끝나고 나서 충분히 사랑했는가에 대한 답을 할 수 있을 정도로는 해야 되겠구나라고 생각해.
소묘 (이치코 실장에게) 충분히 사랑하고 있나요? 근데 그런 질문을 안 할 것 같아.
유진 나는 사실 이실장님이 너무 궁금해. 왜냐하면 전혀 다른 사고와 능력으로 움직여. 내가 잘 모르는 부류의 사람이야.
이치코 상황에 맞게 작동하는 펑션들이 들어가 있는 기계에 가깝다고 보시면 돼요.
소묘 AI야. 저는 그 질문 하는 걸 좋아해요, 삶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단어가 뭔지. 이실장은 질서래요. 나는 상상도 해보지 못했어. 내 사전에 떠올릴 수 없는 단어인데 이제 질서, 그 말을 듣는 순간 모든 게 이해됐지.
유진 어떻게 삶에서 중요한 단어가 질서에 있지. 처음 봤어. 나는 마르땅을 봤을 때도 처음 보는 인간이다라고 생각했는데 여긴 더 하는구나 질서라니. 너무 쓰고 싶은 사람이야.
소묘 아니 이실장 인터뷰야?(웃음) 유진 작가님한테 중요한 단어는 뭐예요?
유진 사랑이지. 근데 저도 사랑이 되게 중요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최근에 하게 됐어요. 아마도 여기에 살면서.
소묘 춘포에서요? 근데 저는 유진 작가님 예전 작업들에서도 그걸 느꼈던 것 같아요. 이렇게 명확하게 사랑이라고 큰 소리로 얘기하지는 않았지만 그동안 써온 유진 작가님 글에 다 조각으로 있었던 거지.
유진 흩어져 있던 내 퍼즐이 여기 살면서 하나씩 완성돼 가고 있어. 저는 글을 쓰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사랑이 없으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삶이 싫은데 그 삶을 이야기할 수는 없는 거죠. 사실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있으니까 계속 이야기를 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 30대까지만 해도 아직 어리니까 그걸 잘 몰랐었는데 작년부터 여기 살게 되면서 뭔가 내 마음에 흩어져 있었던 게 맞춰지고 완성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소묘 춘포 오시고 얼굴도 엄청 편안해지셨어요.
유진 저는 각자 다 자기한테 주어진 삶이 있는 것 같거든요. 크든 작든 자기 몫의 삶이 있는데 예전에 나는 그 몫이 뭔지를 몰랐었던 것 같아. 근데 이제 좀 알겠어요. 내 몫의 삶이라는 걸. 그게 선명해지니까 나 자신과의 큰 갈등이 없어졌고, 이 주어진 삶 안에서 내가 어떻게 움직여야 하고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고 내가 뭘 해야 하는지 알겠어요.
소묘 쓰는 일일까요?
유진 쓰는 건 내가 살아야 하는 삶을 위한 하나의 도구예요. 그냥 쓰는 게 목적은 아니에요. 내 삶에서 나한테 가장 크게 주어진 게 무엇인지를 생각했을 때 난 사랑이 맞아요. 어떤 사랑을 해나가는지가 중요한 사람인 것 같아. 이안이도 마르땅도 또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도 그렇고, 사람만이 아니라 이 환경, 예를 들어 춘포라는 이곳도 잘 사랑해야 한다라고 생각하고 있고, 쓰는 건 그걸 도와주는 일인 거지.
소묘 도구라는 말이 이렇게 아름다웠나 싶어.
유진 왜냐하면 이해를 해야 하니까 사랑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나한테 뭐가 주어졌는지를 알아야 하고. 사랑이라는 게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유동적인 것이니까 좀 더 나아가야 하는데, 쓰는 일이 큰 도움이 되죠. 쓰는 일에는 많은 게 포함돼 있어요. 쓰려면 읽어야 하고 경험해야 하고 알아야 하고 이해해야 하고, 그 모든 것이 다 합쳐져서 쓰기니까. 나는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쓰는 사람은 아니에요. 내가 모르는 것을 쓰는 사람에 더 가깝지. 모르는 것을 쓰기 위해서 알려고 노력해야 하잖아.
소묘 지금은 뭘 쓰고 싶으세요?
유진 나는 진짜 쓰고 싶은 병에 걸렸나 봐. 얼마 전에 소설을 탈고했는데 또 소설이 쓰고 싶은 거예요. 춘포에 철새 보호소가 있어요. 거기 지키는 분을 쓰고 싶다. 그분이 춘포에서 나고 자랐고 서울에서 지내시다가 다시 돌아오셨대요. 그분이랑 길에서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데 눈물을 흘리시더라고. 이곳에 아름다운 것만 있는 게 당연히 아니죠. 저 억새풀밭에서 온갖 일들이 일어나는데 그걸 관찰하는 사람인 거고, 지금은 둑이 있는데 예전에는 물이 다 들어와서 죽은 사람도 많았대요. 그 죽음과 이곳에서 일어났던 많은 일들을 그 사람이 다 목격한 거예요.
소묘 우리 책에 쓰셨잖아요. 작가님도 목격자로서 쓴다는.
유진 맞아. 이걸로 내가 뭔가 메시지를 전하겠다는 게 아니야. 화가들이 어떤 풍경 보면 그리고 싶다고 하잖아요. 그냥 표현하고 싶은 거지. 내가 정말 표현하고 싶은 것은 어떤 삶인 것 같아요. 나한테 강렬하게 다가오는 삶. 그 삶을 담고 싶고 표현하고 싶고, 이 열망이 정확하게 무엇인지 아직 잘 모르겠지만 내 안에 그런 게 있어요.
소묘 진짜 삶 이야기네요. 제가 되게 좋았던 책 중 하나가 마르땅이랑 같이 쓰신 <우리가 사랑한 얼굴들>인데, 그 책이 삶을 오롯이 담고 있잖아요. 특히 연극하는 세르지 인상적이었고, 마르땅이 쓴 프롤로그도 좋았어요. 그 문장도 생각나. 모든 삶은 커다랗고 고유하다라고.
*2021년 첫 편지에 소개했던 <우리가 사랑한 얼굴들>
유진 나도 좋았어. 세르지, 그 사람의 인생도 제대로 써보고 싶어. 근데 그때는 잘 몰랐어요. 제가 거기서 살았던 시기는 고립된 상태였거든요. 교류도 별로 없었고 완전 그 세계 안에 딱 갇혀 있었고 외부인이었고, 바깥에 존재하면서 그 안에 절대 들어갈 수 없는 사람으로 관찰자로 있었던 거지. 지금 그 사람들이 우리한테 다 중요한 사람들이고 프랑스에 가면 지금도 연락하고 만나거든요. 인생의 선배들이잖아요.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쓰는 게 참 소중했구나.

소묘 오늘도 글 쓰셨어요?
유진 오늘은 못 썼는데. 제가 못 쓰는 날이 있어요. 사람을 많이 만나는 날은 못 써요. 왜냐하면 그 언어의 총량이라는 게 확실히 있고, 특히 북토크, 강연, 독서 모임 이런 거 하는 날은 그냥 마음 편히 안 써. 대신 그런 날은 좀 더 읽으려고 하죠.
소묘 그럼 오늘은 뭐 읽으셨어요?
유진 엘렌 식수. 연재 때문에 써야 하니까 읽어야 해요. 근데 안 썼으면 안 읽었을걸. 쓰려면 내가 소화를 해야 하니까 읽고 찾아보고 그리고 내 식으로 해석해 보고 그래서 그 쓰기라는 결과물까지 이어지는 이 과정이 재밌는 것 같아. 이게 좋은 글인지 좋지 않은 글인지 그건 내가 알 수 없는 거지만, 그걸 쓰기 전과 후의 나는 완전히 다르잖아. 이게 정말 재밌는 일이에요. 이게 끝인 줄 알았는데 한 사람의 세계가 계속 열린다는 게.
소묘 좋다. 그렇게 읽고 준비하시면서 특별히 와닿은 무언가가 있었을까요?
유진 글쎄, 아직 쓰고 있는 중이라서…. 나는 다 쓰고 난 후에야 제 안에서 더 명확해지는 것 같은데, 어쨌든 이번 칼럼의 제목은 ‘엘렌 식수의 여성명사’예요. 한국어에는 여성명사와 남성명사가 없지만, 그래도 우리 사고 체계 안에 어떤 계급이 있어요. 예를 들어 권력은 남성적이야, 하는 것들. 태양은 남성명사, 달은 여성명사 같은 이분법적인 사고가 있는데, 자크 데리다 같은 사상가는 이 이분법적인 사고를 없애야 한다는 주의고, 엘렌 식수는 그 질서를 전복하기 위해서 오히려 더 여성적인 것에 강점을 부각해야 된다는 사람이에요. 또 신기한 게 글쓰기는 여성명사예요. 삶도. 그렇다면 여성적 글쓰기란 무엇인가, 더 생각해 보는 거죠.
소묘 <사연시>에도 그 이야기 써주셨는데 확장판이네요.
유진 책 쓸 때도 내 머릿속에 그 이야기가 있었으니까 썼단 말이에요. 근데 더 깊이 공부를 하면서 그때는 아직 언어화가 되지 않았던 부분들, 내 속에 이야기로만 간직하고 있었던 것들이 개념화되고 언어화되면서 내가 이렇게 생각했었구나 깨닫게 돼. 거기서 조금 더 나아가 볼 수 있는 거죠.
*나아간 이야기: 한겨레, “[신유진의 프랑스 문학 식탁] 삶, 회복, 해방, 평등, 연대…엘렌 식수의 ‘여성 명사들’”
소묘 내가 가지고 있는 모호하고 불투명한 생각을 선명하게 담아낸 언어를 만났을 때 느끼는 희열이 있는 것 같아요. 철학 개념도 그렇지만 우리가 시를 만날 때도 그렇잖아요. 1월에 있었던 북토크 때 유진 작가님이 아침마다 시집을 읽으신다고, 거기서 만난 어떤 시어나 이미지를 가지고 하루를 보내신다고 이야기했어요. 그다음 날부터 저도 아침에 눈뜨면 시 읽거든요.
유진 어때요?
이치코 출근 시간이 30분 늦어졌죠.
유진 (빵 터진다.) 진짜 기능적 인간이구나. 나는 이 출력값이 놀라워. 아침에 시집 읽는 거 어떠셨어요? 물어봤는데 30분 늦게 나온대. 정말 쓰고 싶은 사람이야.
소묘 (이실장을 흘기며) 다른 건 아직 잘 모르겠고 하나는 알았어요. 저는 지금 계속 한국 시를 읽고 있었는데 아침에는 외국 시를 읽어야 되는구나, 그걸 깨달았어요. 동시대 한국 시는 그 이미지나 단어들이 나랑 딱 붙어 있어. 특히 죽음의 이미지가 굉장히 강해요. 아침부터 계속 죽어. 물론 그런 효과는 있어요. 김영민 교수님이 쓰셨잖아요.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유진 나는 정말 아침에 산책하면서 죽음을 많이 생각해. 아침에 산책하는 시간이 제일 좋으니까 그런가 봐요. 너무 아름답고 고요하고. 눈 오고 추우면 사람이 아무도 없거든요. 아무도 없는데 안개 낀 길을 딱 우리 셋만 걸어. 그럼 나 죽었나 이렇게 생각할 때가 있어요. 진짜 비현실적인 공간이어서 그게 아름답다고 느낄 때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나 봐.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이 너무 좋은데, 좋은 것들이 하나씩 지워지는 상상을 자꾸 하게 돼요. 이안이가 앞에 걸어가고 있으면 언젠가 이안이가 없어질 거고, 여기가 변할 거고. 그런데 이런 것들을 생각하는 게 마냥 절망이나 슬픔은 아니에요.
소묘 사랑일 거 같아요. 더 사랑하자.

유진 이게 내가 받은 엄청나게 큰 선물이구나 싶어. 그동안 나는 내가 삶에서 뭔가를 계속해야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게 아니라 삶은 나한테 주어진 선물이 맞는 것 같고, 나는 이걸 누리기 위해서 태어난 게 분명하구나. 물론 집에 돌아와서 밥하고 뭐 하고 하면 막 정신없고 나는 왜 이렇게 사는가 이러는데, 아침 산책 30분은 그래요. 그 30분이 없으면 못 살지. 그때 마르땅이랑 주고받는 대화가 또 그런 대화예요. 그런 이야기가 나올 만큼 아름다워요, 그 풍경이.
소묘 아무렴요. 사진으로만 봐도 그런데.
유진 해 질 때도 진짜 아름다워요. 해 지는 게 미치게 아름다운데 강아지들은 붉은색을 못 보잖아요.
소묘 색은 못 보더라도 그걸 느낄 수 있을 것 같아.
유진 응. 마르땅한테 이안이가 이 아름다운 걸 못 보는 게 슬퍼, 이렇게 말했더니 마르땅이 이안이는 네가 냄새를 못 맡는다는 게 슬플걸, 이안이가 냄새로 발견하는 세상은 네가 눈으로 보는 세상과 비교가 안 될 거야라고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그때 또 깨달았어. 얘는 알고 나는 모르는 세상이 있겠지. 내가 이렇게 아름다운 걸 발견하는 것처럼 얘도 냄새로 뭔가 아름다운 뭔가를 발견할까, 머릿속에서 막 그 상상들이 그려지면서, 이렇게 다른 우리가 함께 산다는 게 참 좋잖아요. 내가 모르는 세계를 얘가 알고 있고 나는 얘를 사랑하니까 그 세계를 내가 상상해 본다는 게. 이안이도 볼 수 없지만 내가 좋아하니까 이 세계를 상상해 볼 거야.
소묘 이안이는 그럴 것 같아. 우리 야옹이들은 안 그러겠지만. 강아지들은 같이 사는 인간을 온 힘으로 사랑하고 그 사랑하는 인간을 이해하려고 노력해. 나 요즘에 개파 돼가지고 댕댕이 정말 너무 좋아.
유진 진짜 이안이는 나를 이해하려고 노력해. 내가 너무너무 힘들었을 때 혼자 펑펑 우는데 이안이가 어쩔 줄을 모르고 자기 장난감을 가져와서 자꾸 나한테 주는 거야. 걔가 줄 수 있는 가장 큰 거니까 내 입술에다 막 갖다 대, 울지 말라고 안아주면서. 그게 마음이 미치겠더라고.
소묘 정말 엄청난 존재다. 강아지랑 있으면 사랑이라는 단어를 계속 생각하게 될 거 같아요.
유진 강아지도 그렇고. 저한테는, 사랑을 생각하기 위해서 자연도 필요했던 것 같아요. 엄청나요. 그 풍경이, 매일 내가 이걸 볼 수 있다는 게 늘 놀라워.

✲
두 번째 춘포행이었다. 첫 춘포는 2022년 가을과 겨울 사이. 유진과 마르땅 함께 미술관이 된 도정공장을 걷고 골목 곳곳을 누비고 해 지는 억새밭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때는 우리 모두 춘포에게 외지인일 따름이었다. 2025년 겨울과 봄 사이. 이제 유진과 마르땅은 그 장소에 속했고, 이안은 이안의 정원에서 야성을 뽐내며 우짖고 뛰놀았다. 우리는 그 이안의 정원이 내다보이는 집 안에 마주앉아, 유진 작가님이 정성껏 끓인 단호박수프와 갖가지 초콜릿을 두고서 말들을 나눴다. 쓰고, 살고, 사랑하는 일을. 미처 다 담지 못했지만 유진 작가님은 쓰고 싶은 사람들을, 삶들을 지침 없이 열띠게 이야기했다. 그곳 철새 보호소의 관리인처럼 유진 작가님은 목격하고 지키는 곳에 자신의 쓰는 자리를 마련한 건 아닐까. 덩굴처럼 멀리 오래 뻗어나와 있던 삶과 쓰기가, 뿌리를 단단히 내리는 모습을 보고 있는 것 같았고. 앞으로 피워낼 그의 사랑이 어떤 모양을 하고 있을지 기다려져. 나는 그의 오랜 목격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소묘의 여자들’은 [월간소묘 : 레터]에 연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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