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엔딩까지 천천히> 미화리 작가와의 작은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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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면 또 쓰고, 계속해서 쓰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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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딩까지 천천히>로 삶의 다양한 고민과 사연에 꼭 맞는 영화를 처방해 주었던 우리의 영화처방사 미화리 작가님과 이야기 나눴다. 혜은 작가님과 오래 운영해 온 ‘작업책방 씀’의 문을 닫고 어떤 날들 보내고 계실지 궁금했는데, 붙잡았던 한 이야기의 끝에서 또 다른 이야기를 찾아내고 기대하고 믿으며 나아가는 모양이 여전했다. 늘 이야기와 영화를 곁에 두고 삶과 글을 이으며 나아가는 모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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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어른이 되려고 했구나!”
미화 씀을 완전히 정리한 지는 이제 막 한 달이 되었어요.(10월 5일) 문을 닫자마자 추석 연휴라서 친척들과 시간을 보내느라 문을 닫았다는 실감이 안 나다가, 인스타그램에서 다른 책방이 올린 추석 영업 공지 게시글을 보는데 ‘아 우리는 (연휴에) 언제부터 열지? 혜은한테 연락해 볼까?’ 하는 생각이 든 거예요. 그때 실감이 났어요. 아, 맞다 우리 이제 계속 연휴지 ㅎㅎ 이후에는 놀랍게도 씀을 생각하는 시간이 거의 없어요. 아쉽거나 그립거나 다시 돌아가고 싶다거나 후회되거나 하는 불순물이 하나도 없는 마음이에요. 이건 아마 혜은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해요. 세상에 이런 엔딩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깨끗한 엔딩. 마음의 불순물들은 1년이라는 이별의 시간을 가지면서 모두 채로 걸러낸 것 같아요.
그리고 요즘엔 본격적으로.. 시나리오 작업을 하고 있어요… 놀랍게도 한 달 동안 두 편의 이야기를 구성했는데 두 편 모두 제작사에 거절당했어요ㅋㅋㅋ 제작사 미팅 -> 이야기 구상 -> 거절 -> 새로운 이야기 구상의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미화 굉장히 어려운 질문인 게 특별한 계기가 없어서 그런 것 같아요. 저는 영화관에서 처음 본 영화도 기억이 안 나요. TV로도 영화를 봤으니까 영화관에서 본 게 저의 첫 영화는 아닐 거예요. 영화가 좋은 이유 같은 건 오히려 글을 쓰면서 찾은 거고, 영화를 본격적으로 보기 전부터 이야기 자체를 좋아했던 것 같아요. 만화책, 애니메이션, 드라마, 영화까지, 나이에 따라서 매체만 달라질 뿐이지 그게 이야기라는 건 똑같거든요. 영화가 두 시간이라는 러닝타임 안에 주인공의 변화를 보여주는 극적인 장르라서 글의 소재로 영화를 선택한 것이지, 영화를 드라마보다, 애니메이션보다 더 좋아해서 글을 쓰는 건 아니에요.
영화를 언제 어떻게 좋아했는지는 확실히 기억이 안 나지만 만화책에 대해서 또렷이 기억하는 장면이 있어요. 제가 중학교 때 수업시간에 자주 만화책을 보는 청소년이었는데요.. 그래서 뺏긴 만화책이 한두 권이 아닌데.. 한번은 학원에서도 읽다가 걸려서 선생님한테 만화책으로 뚜드려 맞았거든요. 넌 커서 뭐가 되려고 이러냐?!고 막 혼났는데.. 제작년에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보고.. 이런 어른이 되려고..!!! 어린 시절 <슬램덩크>를 봤던 어른이 되려고 했구나!!! 깨달음을 얻었답니다. 어려서 슬램덩크를 안 봤다면, <더 퍼스트 슬램덩크>에 우는 어른은 안 되었을 것 같더라고요. 저는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보고 우는 어른이 된 게 좋거든요.
미화 ‘부먹클럽’은 올해까지만 진행하지만, 혜은과 함께 (또 혜은) 라디오를 시작하게 되었어요. TBS 교통방송에서 격주 화요일 4시에 ‘씀 라디오’라는 이름의 코너를 맡게 되었어요. 둘이서 한 권의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데 각자의 정체성에 맞게 저는 책과 어울리는 영화를, 혜은은 책에 맞는 음악을 추천합니다. 다시듣기는 팟빵에서 가능하니 많관부입니다~! (11월 4일 첫방송)
*씀 라디오 청취하기 https://www.podbbang.com/channels/1793540
“김칫국을 마시는 동안 아주 새콤하고 짜릿했으니”
미화 무브드바이무비(moved by movie) 프로젝트는 영화의 촬영지로 여행을 떠나서 영화에 나온 장면을 글과 사진으로 담는 프로젝트예요. 베를린에서 지낼 때 유럽 국가를 배경으로 한 영화(비엔나 <비포선라이즈>, 파리 <비포선셋> <미드나잇인파리>, 런던 <노팅힐> <클로저> <어바웃타임>, 더블린 <원스>, 리스본 <리스본행 야간열차>, 헬싱키 <카모메식당>)들을 작업해서 나온 책이 《당신이 나와 같은 시간 속에 있기를》이에요.
유튜브를 시작한 후로는 촬영지를 찾아가는 과정도 함께 담아서 영화여행 브이로그로 만들고 있어요.(<퍼펙트 데이즈>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바닷마을 다이어리> <윤희에게> <해피엔드> <귀에 맞으신다면> <상견니>) 이제는 사진보다는 영상이 더 메인이 된 것 같아요.

소묘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바닷마을 다이어리> 같은 일본 영화들은 아예 프로젝트의 이름을 그대로 쓴 《Moved by Movie》 책으로도 내셨죠. 그 책에 담긴 영화 다섯 편 모두 좋아해서 더 깊이 빠져들며 봤던 기억이 나요. <걸어도 걸어도> <러브레터>까지요. 그동안 또 쌓인 여행이 많으실 텐데 다음 책도 기대하게 돼요.
그러고 보니 이번 <해피엔드>도 일본 영화였네요. 그리고 혜은과의 이별 여행이기도 했어요. 미화리 작가님에게 혜은이란?ㅎㅎ
미화 저의 원동력은 김칫국 마시기예요. 김칫국을 마신다는 말에는 ‘실망’이 예견되어 있잖아요. 기대하는 일만으로는 김칫국이라고 하지 않고, 실망을 해야만 김칫국의 완성이니까요. 그런데 사실 김칫국 마시기의 장점은 실망이 크지 않다는 점이에요. 결과가 기대에 못 미치긴 하겠지만 김칫국을 마시는 동안 아주 새콤하고 짜릿했으니 그 기억으로 다음을 도모하고 또 기대하고 또 김칫국을 마실 수 있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제가 무언가를 그만해도 되겠다고 생각되는 시기는 다음을 기대할 수 없을 것 같을 때예요. 나의 기대가 수명을 다하는 시기라고 해야 할까. 부먹클럽도, 책방도 그래서 후련하게 그만둘 수 있는 것 같아요. 김칫국을 마시는 동안에 마음을 다해 기대할 수 있어서 기뻤어요.

“또 다른 이야기를 찾아낼 수 있다”
미화 솔직히 책은 아직도 제 취향을 모르겠어요. 책에 있어서만큼은 조금 겸손해지는 것 같아요. 진짜 잘 쓴 글 앞에서는 취향이 무색해지더라고요. 옷을 예로 들면 장인이 만든 옷이더라도 제 체형이나 얼굴에 안 맞으면 제 옷은 아닌 건데, 너무 훌륭한 책은… 바로 내 책이 되어버려요ㅎㅎ 갑자기 내 취향이 되어버리는..? 그래서 더 취향에 갇히지 않으려고 독서모임을 하는 것 같아요.
최근에 중국문학을 읽는 독서모임에서 홍콩의 우산혁명을 배경으로 한 《동생》이라는 소설을 읽었는데 정말 좋더라고요. 혁명의 최전선에서 싸우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동생을 바라보는 누나의 시점에서 쓰인 책인데… 열네 살 차이 나는 저의 막내 동생이 생각나면서 저 또한 어떤 상황에서든 동생의 편에 설 거라는 걸 이 책으로 알게 됐어요. 심지어 동생이 저와 반대 진영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 아이의 편을 들어주고 싶을 거라는 걸 알게 돼서… 그런 상황이 오지 않기만을 바라고 싶었어요ㅠ

미화 <틱, 틱… 붐!>이 아주 간절한 요즘입니다. 토니상과 퓰리처상을 휩쓴 뮤지컬 <렌트>의 작가 조너선 라슨이 <렌트>를 쓰기 전의 상황을 담은 영화인데요. <렌트>를 쓰기 전까지 계속해서 실패만 하는 조너선 라슨을 보면서… 저도 계속 써야겠지요..? 연필을 날카롭게 갈아야겠지요..?
“다음 작품을 써. 그게 끝나면 또 쓰고. 계속해서 쓰는 거지. 그게 작가야. 그렇게 계속 써재끼면서 언젠가 하나 터지길 바라는 거라고. 이봐, 이 바닥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 조언 하나 할까? 다음 작품은 네가 잘 아는 것에 대해 써. 알았지? 연필 날카롭게 갈아.”
미화 이야기.
믿어보고 싶은 존재인 것 같아요. 세상에 아름다운 이야기, 용기를 주는 이야기, 삶을 바꾸는 이야기는 얼마든지 있잖아요. 붙잡고 있던 하나의 이야기에 효력이 끝나는 날에는 또 다른 이야기를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이, 저로 하여금 또 믿어보게 만드는 것 같아요. 세상이든, 사람이든, 나 자신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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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딩을 깨끗하게 맞는 마음 앞에는 김칫국을 마시는 마음이 있었다. 나는 실망이 두려워서 좀처럼 어떤 기대도 하지 않는 편인데, 미화리 작가님은 나와는 정 반대편에, 온 마음을 다해 기대하는 편에 선 사람이다. 아주 새콤하고 짜릿하게 김칫국을 벌컥벌컥 마시고 후련하게 내려놓는 그 모양이 너무나 시원하고 사랑스러워서, 나도 따라하고 싶어진다.
그러다 우리의 대화 속에서 나 역시 언제나 기대를 품고 마는 존재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바로 이야기, 우리는 결국 이야기에 둘러싸여 이야기의 힘을 믿으며 나아가는 사람이라는 걸. 그리고 미화리는 나에게 제일 가는 이야기꾼이다. 그가 어떤 이야기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주면 나는 덮어놓고 그 이야기를 쫓아가게 되니까.(게슈탈트 붕괴가 오고 있다…이야기 뭘까) 그러니 미화리, “계속 써재끼세요. 연필 날카롭게 갈아요.”

‘소묘의 여자들’은 [월간소묘 : 레터]에 연재되고 있습니다.
[소묘의 여자들]
박혜미, 어디선가 이상한 용기가 (feat. 정선정) • 신유진, 충분히 사랑하고 있나요? • 이미나, 계속 그리고 싶은 어린아이 하나가 • 요안나 카르포비치, 저편에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 정한샘, 작은 고집으로 지켜온 시간 • 정한샘, 작은 고집으로 지켜온 시간 • 무루, 질문이 되는 이야기를 따라 • 이경란, 소묘의 책들에 이정표를 남기는 디자인 • 이미화, 엔딩 다음에 오는 것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