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책]은 독서 기록입니다. 고양이에 관한 책일 필요는 없고 그저 고양이란 단어가 등장하기만 하면 됩니다. 독서 기록이지만 책 이야기가 될지는 두고 볼 일입니다. 고양이 이야기는 확실합니다.

─────────

 

<총, 균, 쇠>는 유명한 책입니다. 그 책 나도 알지, 집에 있는데, 라고 하실 분들이 제법 많으실 거예요. 하지만 난 다 읽었지, 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의외로 적을지 모릅니다. 1998년에 한국어 번역판이 나오고 2019년까지 50만 부가 팔렸다고 해요. 많이 팔렸으니까 많은 사람이 읽었을 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총, 균, 쇠>가 20여 년 동안 50만 부가 팔렸다면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는 국내에 ‘정의’ 열풍을 일으키며 출간 11개월 만에 100만 부가 판매된 책인데요. <정의란 무엇인가>가 한창 유행할 때에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었다는 사람을 거의 만나지 못했습니다. 팔리지만 읽히지 않는다, 이것은 두껍고 유명한 책의 숙명 같은 게 아닐까 싶습니다. 저 역시 <총, 균, 쇠>를 읽은 척 얼버무리고 살아오다가 이제서야, 책이 책장에 꽂힌 지 10년 만에 다 읽었습니다. 뿌듯하네요. 으쓱.

 

책의 내용은, 친절하게도 책 표지에 모두 설명되어 있습니다.(참 촌스럽다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그 때문인지 여전히 광고의 메인 카피로 사용되고 있는 ‘XXX 대출 도서 1위’가 큼지막하게 적힌 띠지를 벗겨내야 보입니다.)

“(크고 두꺼운 글씨로) 인류 문명의 수수께끼를 새로운 시각으로 풀어낸 명저 (그보단 작고 가는 글씨로) 왜 어떤 민족들은 정복과 지배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았는가. 왜 원주민들은 유라시아인들에게 도태되고 말았는가. 왜 각 대륙들마다 문명의 발달 속도에 차이가 생겨났을까. 인간 사회의 다양한 문명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를 명쾌하게 분석한 명저.”

 

두껍고 유명한 책 <GUNS, GERMS, AND STEEL>

 

책의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두 가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첫째, 제목이 애매하다. 책의 부제가 “무기•병균•금속은 인류의 문명을 어떻게 바꿨는가”인데 그게 중요한 내용이긴 해요. 하지만 저자가 책에서 공들여 얘기하고 있는 건 무기, 병균, 금속의 역할이 아니라 그것들이 어떻게, 그것도 특정한 문명에만 선택적으로 등장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에요. 반복적으로 책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건 농사, 가축, 지리에 관한 이야기들이죠. 농사의 시작이 빠를수록 문명의 발달에 유리했고, 대형 포유동물의 가축화를 통해 농업 생산력을 폭발적으로 향상한 문명이 전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서게 되었으며, 지리적 제약 없이 다른 지역과 활발하게 교류할 수 있었던 문명이 결국은 역사 속 정복과 지배의 주체로 부상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목도 <총, 균, 쇠>가 아니라 <농사, 가축, 지리>… 음, <총, 균, 쇠>가 낫네요.

 

두 번째는 책이 너무 평이한(?) 내용이라 놀랐습니다. 이 정도로 퓰리처상을? 꼴랑 이 얘기를 700쪽이나 넘게 하고 있다고? 대단한 내용이 담겨 있을 거라 기대했던 터라 책을 읽는 동안 조금은 실망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종의 기원>이 떠올랐어요. 당대의 혁명이라고도 불리는 <종의 기원>은 내용의 서술이 지나치게 늘어지고 반복적이어서 좀처럼 끝까지 읽기 힘든, 만약 읽으려는 사람이 있다면 말입니다, 책으로 유명합니다. 당연하죠. 우린 안 읽어도 다 아는 내용이니까요. 다윈 이후로 많은 학자가 더 깊이 연구하고 발견한 내용을 누구나 알 수 있도록 쉽게 다듬은 이론으로 (교과서를 통해) 이미 배운 입장에서, 150년도 더 전에 쓰인 최초의 이야기가 지루하지 않다면 그게 더 이상할 거예요. <총, 균, 쇠>를 읽는 동안에도 비슷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거 어디서 본 내용 같은데… 역시 당연한 일입니다. 지난 25년 동안 이 책의 영향을 받은 책들이 얼마나 많았겠어요. 출간됐을 때 읽었다면 훨씬 강렬한 지적 충격을 경험했을 텐데 말이에요. 아휴, 진작에 읽을걸. 1998년이면 한글을 떼고도 남았을 나이였는데…

 

그런데 <총, 균, 쇠>가 왜 고양이 책이 된 걸까요? 고양이가 인류 문명의 수립과 발전에 어떤 기여를 했는지 명명백백하게 밝히고 있을까요? 선사와 역사에 남겨진 인류와 고양이의 상호교류를 끈질기게 추적하고 있을까요? 고고학적 증거를 통해 고양이들이 언제부터 이렇게 귀여웠는지 증명하고 있을까요? 아닙니다. 모두 아니에요. 752페이지를 통틀어 ‘고양이’란 단어가 겨우 두세 번 언급되고 있을 뿐입니다. 이 책은 고양이랑 연관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책이에요. 하지만 고양이에 관해 단 한 번 등장하는 서술이 너무 이상하게 임팩트 있어서 제 맘대로 고양이 책이라고 정했습니다.

 

이래 봬도 사냥은 내가 짱이지 by 송오즈

 

“세력권을 갖고 혼자 사는 포유류 중에서 가축화된 것은 고양이와 흰족제비뿐이다. 우리가 그들을 가축화한 동기는 식용으로 한꺼번에 큰 집단을 기르면서 몰고 다니기 위해서가 아니라 저 혼자 다니면서 사냥을 하게 하거나 애완동물로 삼기 위해서였다.”(256쪽)

다이아몬드 선생님, ‘저 혼자 다니면서 사냥을 하게 하’는 게 어떻게 가축화인가요? 그건 그냥 야생동물과 다를 바가 없는 것 같은데요.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어요. 인류가 수렵채집에서 농사로 넘어가면서 곡물을 저장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각종 해충이나 설치류로부터 식량을 지키기 위해 뛰어난 사냥꾼이 필요했고 마침 고양이가 그 역할을 맡게 되면서, 독립적으로 살아가지만 생활 반경을 인간과 공유하는 일종의 가축과 같은 관계가 형성되었다, 라는 얘기 아닐까요? 아, 그러면 좀 자세하고 길게 써주시든가.

 

애완동물 부분은 더 이상해요. 가축화되기 위해서는 아래 서술된 모든 조건이 충족되어야만 한다고 하셨잖아요. 그러면서 애완동물로 길들이는 것이 가능하다고 해서 모두 가축화된 것은 아니라고 언급하기도 했고요.

“그러나 제9장에서 확인했던 것처럼 야생 동물이 가축화되기 위해서는 충분히 온순해야 하고, 사람에게 복종해야 하고, 먹이가 저렴해야 하고, 질병에 면역성이 있어야 하고, 성장이 빨라야 하고, 감금 상태에서도 잘 번식해야 하다.”(588쪽)

고양이가, 호랑이에 비한다면야 충분히 온순할지는 모르겠으나 그렇다고 절대로 ‘복종’하는 녀석들이 아닌데 어떻게 가축화가 되겠습니까? 게다가 ‘애완동물’이란 개념 자체가 꽤 현대적인 개념일 텐데 거기에 대한 설명은 또 없고. 선생님, 실망이에요. 솔직히 말씀해보세요. 고양이랑 안 살아봤죠?

 

답답한 마음에 직접 이와 관련된 내용을 검색해봤습니다.

미주리대학교의 수의과대학 연구팀이 고양이 유전자 연구를 통해 가축화의 기원에 관한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고 하는데요. 이 연구에 따르면 거의 만 년 전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을 둘러싼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 정착한 인류 최초의 문명에서부터 고양이와 긴밀한 유대관계를 맺어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가축화 과정은 특별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고 해요. 개나 다른 동물과 달리 고양이에게는 사람 중심의 길들이기를 하지 않았다는 것인데요. 그렇기 때문에 ‘반 길들여진 고양이(cats as semi-domesticated)’라고 부를 수 있으며, 연구팀의 일원인 리옹(Leslie A. Lyons) 교수는 “인류는 고양이의 행동을 억지로 바꾸는 ‘길들이기’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만약 고양이를 야생으로 돌려보낸다면 고양이는 여전히 해충을 사냥하고 스스로 살아남아 짝짓기를 하며 자연스럽게 살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사이언스 타임즈 기사 <‘고양이 집사’의 역사, 인류 최초 문명에서부터 시작?’>에서 발췌]

 

거 봐요. 고양이는 복종하지 않는다니까요.

 

반 길들여짐(semi-domesticated, 반 가축화).

고양이와 함께 살면서 도저히 고양이를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부닥칠 때는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고양이가 인간에게 길들여질 수 있는 최대치가 딱 그만큼이다는 것을요. 반밖에 길들여지지 않는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고양이랑 살다 보면 어차피 우리가 고양이한테 나머지 반만큼 길들여지게 되어 있으니까요. 서로가 반씩 길들여진 채 살아가는 일, 사람 사이건 사람과 고양이 사이건 간에 얼마나 아름다운 관계인가요. 그런 인생이라면 한번 살아볼 만할 거예요. 고양이와 함께든 사람과 함께든, 각자의 행복과 서로의 행복 모두를 놓치지 않고 알콩달콩하면서요.

 

그나저나 고양이란 녀석들, 참 이상한 존재들이긴 해요.

 

보시는 바와 같이 이상한 건 내가 짱이지 by 이치코 feat. 똥모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