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화가, 이미나 작가와의 여담

 

몇 마리쯤 그려야 싫증이 나는지

 

 

이미나 작가님은 그림책 <나의 동네>(2018)로 처음 만났다. 제주도의 한 소담한 마을에 자리한 책방에서 책을 펼치자마자, 첫 두어 장 만에 이 그림책에 홀려버렸다. 나비들이 화면을 한가득 채운 장면이었을 것이다. 책 속 동네는 건물이나 사람이 아니라 나비와 새, 개와 고양이, 다람쥐 같은 동물들이, 그리고 색색의 꽃과 무성한 초록의 식물들이 주인이었다. 나비처럼 연약한 존재들을 강건하고 대담한 색감과 필치로 그려낸 이 작가가 몹시 궁금해졌다. 이후로 미나 작가님의 작업을 애정과 응원으로 따라왔다. 그림책뿐만 아니라 <고양이와 친구들>(2019), <100개의 네모들>(2022), <그림 탐험 신비의 세계>(2023), <종이를 나온 그림>(2024) 전시까지 느슨하지만 촘촘히. 그사이 미나 작가님과 그림에 관한 에세이를 내기로 했고, 올초에 드디어 원고를 받았다. A4 22장 분량의 글에는 전시마다 그림마다 그에 얽힌 이야기들이 가득했다.

이 책을 어떻게 만들면 좋을까. 수원에 있는 미나 작가님의 작업실을 찾았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환한 창가에는 식물들이 푸르게 손을 뻗고 있었고, 그보다 해가 덜 드는 반대편에는 손바닥만 한 그림부터 벽을 가득 채운 커다란 화폭까지 캔버스 안에서 온갖 동물들의 눈빛이 번득이고 있었다. 이 대화는 이 그림들과, 그림에 대한 글 원고를 앞에 두고 우리가 만들 책에 관해 함께 고민하며 나눈 이야기다.

 

 

 

소묘 와, 작업실이 정말 넓어요. 그림 사이즈가 커질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미나 맞아요. 예전에는 원룸이라 손바닥만 한 그림을 많이 그렸는데 여기 와서는 큰 그림을 그리게 되더라고요.
소묘 매일 나오세요?
미나 네, 나와서 10시부터 4시까지는 작업하려고 해요. 날마다 그려요. 겨울엔 너무 추워서, 저 프레임에 텐트를 치고 그 안에서 작업을 하기도 했어요.
소묘 아이고, 그래도 멋있어요. 뉴욕 스튜디오 느낌이야. 식물도 많고, 은방울 너무 예쁘다.
미나 향이 진짜 좋아요. 맡아보세요.
소묘 꽃은 이렇게 조그마한데 향은 아찔하네요. (한참 서성이고 둘러보다 자리에 앉는다.)

제가 오늘 확실히 하고 싶은 건, 미나 작가님이 이 책으로 어떤 얘기를 하고 싶은지예요. 그게 제일 중요한 거 같아요.

미나 어떤 얘기를 하고 싶냐고 물어보시면, 음, 너무 딴 얘기긴 한데…
소묘 뭐죠? 궁금하다.
미나 사는 게 녹록지 않잖아요.
소묘 사는 게 녹록지 않다, 그렇죠.
미나 고통으로 가득 차 있고.
소묘 보내주신 글 원고에서 작업에 대한 여러 고심이 느껴지기도 하고요.
미나 그렇지만 흙 속에 있는 사금처럼 약간의 희망, 그런 긍정적인 것들이 있어요.

구체적으로 나는 이 책을 통해서 이런 얘기를 해야겠다라고 쓰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그림을 보고 떠오르는 상상도 쓰고 그림을 그리다 든 생각도 쓰고 또 그림을 왜 그리게 됐는지, 그림에 대한 이야기들을 쓴 거죠.
그 와중에도 나는 그리는 게 참으로 좋다,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소묘 지금 당장 ‘이 얘기가 하고 싶어’ 해서 쓰는 경우는 사실 드물긴 하죠. 쏟아내고 보니 아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거구나 후에 발견되는 지점도 있고요.
미나 작가 노트에서부터 모든 글이 시작된 거긴 한데, 작가 노트를 쓸 때 그림에 대한 설명을 쓴 적은 별로 없거든요. 그 그림을 어떻게 그리게 됐는지, 그리는 과정에서 무슨 일이 있었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적어 내려갔어요. 작업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소묘 이거 너무 좋다. 그래서인지 에세이가 아니라 픽션으로 쓰인 글들도 있었죠.
미나 그렇게 쓴 글들은 그림에서 시작된 이야기예요. 에세이 형식으로 쓴 작가 노트는 이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 이런 일들이 있었지 하고 기억을 떠올리며 썼는데, 이야기는 완성된 그림들을 쭉 보면서 그 위로 상상을 더한 거죠.
소묘 아, 이야기를 떠올리고 그다음에 그림을 그린 게 아니라 그림들을 보면서 이야기를 지으신 거예요?
미나 네, 맞아요. 쓰여지는 과정이 다른 것 같아요.
소묘 저는 에세이도 좋았는데 이야기들도 재밌더라고요. 이 이야기들을 다른 에세이 글처럼 그냥 한두 페이지에 쭉 흘리는 게 아니라 에세이집 안에 수록된 별책부록처럼 그림책 구성으로 가져가도 좋겠다 생각했어요. 지금 그 글에 대응하는 그림만이 아니라 다른 그림들도 더해서 서사가 느껴지도록 배치하는 걸로요.
미나 그럼 색을 넣어서 별면처럼 구성하고 이야기에 맞게 그림을 더 그려도 재밌을 것 같아요.
소묘 그러면 베스트긴 한데…!
미나 근데 그 이야기들은 그림책이랑도 또 다른 것 같아요.
소묘 그래요? 그림책은 어때요?
미나 그림책은 처음부터 뚜렷하게 하고 싶은 얘기가 있었어요. 그림도 글도. 그리고 그림책을 할 때는 톤을 생각했어요. 예를 들면 <나의 동네>는 초록색으로 가득 찬 책이고 <터널>은 어두컴컴한 무채색, <새의 모양>은 분홍색, 이렇게 색깔을 중심에 두고 작업했었거든요.
소묘 그것도 너무 흥미로운 지점이다. 저희 책은 무슨 색이 될까요. 무지개? (웃음)
미나 하하, 어렵네요. 하이퍼? 이건 또 다른 세계 같아요.
소묘 아, 지금 주신 원고는 전시 작업 위주로 글이 구성되어 있는데, 그림책 이야기도 들어가면 좋겠어요. 미나 작가님 작업에서 그림책을 빼놓을 수는 없으니까요. 글 중에 그림책에 관해서 짧게 언급한 부분이 있었는데, 이게 너무 좋았거든요.

 

그림책 <나의 동네> 시절부터 동물을 그렸다. 그 이전에는 터널과 동네를 그렸다. 오래도록 변하지 않고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공간과 장소가 사람에게 주는 힘이 크다고 믿었다.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없지만 <나의 동네>를 만들며 시선의 방향이 그곳에 살고 있는 동물에게로 옮겨 갔다. 동물은 영역에 비해 급변하고 감정적이고 불타올랐다가 금세 사그라들기도 하는 생명을 가져서 철과 돌로 만든 구조물과 대비됐다. 변하지 않는 것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자라고 먹고 자고 죽어버리는 존재가 마음에 들어왔고 그 뒤로 동네에서 자주 보는 고양이, 개, 맹수들을 그렸다. 나와 사는 동물의 마음이 자연스럽게 읽히다가도 그들의 야생성과 본능을 발견할 때 같은 곳에 있지만 서로가 아주 먼 거리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사람은 영원히 그곳에 갈 수 없다고 생각하니 그 세계를 더 그리고 싶어졌다.

 

작가님의 세계를 딱 보여주는 것 같아요. 그림 작업을 꽤 오래하셨잖아요. 얼마나 되셨죠?

미나 학부 졸업하고 계속했으니까 한 9년.
소묘 와, 우리 책 나오면 이제 작업하신 지 거의 10년이란 말이에요. 그럼 책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하나의 전시를 기획하고 있다고 생각해 볼까요? 작가 생활 10주년 기념 전시를 한다, 어떻게 하고 싶으신지. 전시하실 때 늘 전시 제목도 정하고 글도 쓰셔서 붙여놓으시잖아요 :)

 

 

미나 맞아요. 전시 때 쓴 작가 노트 중에 제일 전시랑 잘 맞게 썼다고 생각하는 건 도자기 전시 때예요. 도자기 작업은 그림 작업과는 방식이 다르니까 뭔가 새롭기도 했고 또 약간 낯설고 할 말이 많았죠.
소묘 맞아요, 도자기 전시 글들 좋았어요. <종이를 나온 그림> 전시였죠? 그동안 작가님 그림 작품에서 마치 튀어나올 것 같던 동물들이 정말로 종이에서 나온 거잖아요. 글에서도 물감이 아니라 흙으로 빚어 만든 물성의 감각이 온전하게 느껴졌어요. 글이 부연이나 부록이 아니라 전시의 일부처럼 보이기도 했고요. 우리 원고에도 넣어주셨는데 다 좋지만 마지막 문단에서 전시의 궤가 선명하게 보이는 것 같아요.

 

그리고 싶은 세계가 캔버스와 종이에서 나와 흙으로 이어진다. 재료의 물성이 바뀌며 겪어보지 못했던 과정을 겪기도 하고 만들자마자 내려놓는 마음을 배우기도 했다. 그럼에도 종이를 나온 ‘그림’이라는 제목을 붙인 건 내가 그동안 그림에서 했던 이야기들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평평한 종이도 구기면 둥근 공이 되고, 하늘 아래 흔들리는 나무도 납작한 잎사귀 한 장으로 이루어지는 것처럼. 시시각각 달라지는 생의 모양으로 그림과 삶을 가득 채우고 싶다.

 

미나 확실히 큼직한 주제가 하나 있어야 되는 건 맞네요. 전시 얘기하니까 생각났는데, 처음으로 전시에 놀러 오셔서 제 그림을 보신 분이 ‘꼭 어린아이가 세상을 보았을 때의 느끼는 감정이 그림에 담겨져 있는 것 같다’라는 말씀을 해주신 적이 있는데, 최근에 그 말이 떠오르면서 그림은 그런 주제로 쭉 가면 되겠다 그런 생각을 했었거든요.
소묘 어린아이! 정말 그래요. 길들여지지 않은 순수한 야생성, 그리고 생명을 보는 경이와 공포, 이런 것들도 뒤섞인 느낌이 들고요. 신비가 키워드가 될 수도 있겠다.
미나 근데 또 글이랑은 다른 것 같아.
소묘 그래서 그림과 글의 격차가 재미있게 느껴지기도 했어요. 작가님 그림에서는 언제나 생명력, 야생성, 그런 생동이 강하게 느껴지잖아요. 근데 글은 슬픈 거예요. 그래서 그림이랑 글을 같이 놓고 보면 삶과 죽음, 생명과 소멸이 딱 붙어 있는 것 같았어요. 원고 중에 이런 문장도 있었죠.

 

생으로 가득 찬 것을 그리면서도 죽은 고양이가 자꾸 떠오르는 것이 이상했다. (…) 살아 있는 것과 죽음이 너무 가까운 곳에 붙어 있었다. 낮과 밤처럼. 평행선처럼 마주보고 이어져 있었다. 그리는 내내 다른 것들이 자꾸 상충했다. 그림은 발랄한데 그리다 보면 가끔 슬펐다.

 

작가님 글 정말 좋다.

미나 근데 저는 생명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요. 이건 너무 추상적일까요?
소묘 이미 그림으로 충분히 이야기하고 계신걸요? 그럼 그림의 구성부터 생각해 봐도 괜찮겠어요. 지금 보내주신 그림들은 전시별로 폴더가 나눠져 있는데 새로 배치가 필요하겠고, 그림의 흐름을 어떻게 만드는 게 좋을지.
미나 그림에 담긴 대상으로 나누는 게 좋을까요? 늑대면 늑대, 고양이면 고양이, 이렇게요.
소묘 저도 그게 고민이었거든요. 지금 제일 많이 등장하는 게 고양이, 개, 늑대, 여우, 이렇게 넷인데…. 어머, 제목을 이렇게 할까? <고양이, 개, 늑대, 여우>!
미나 그렇게 할까요? (웃음)
소묘 뜬금없지만, 제가 늘 드리는 질문이 있어요. 좋아하는 단어 있으세요? 고양이, 개, 늑대, 여우 말고요. ㅎㅎ
미나 (멋쩍게 웃음)
소묘 왜 왜 왜?
미나 좋아하는 단어는 아니고, 저는 부사를 너무 많이 쓰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 너무 남용한달까.
소묘 어떤 부사를요?
미나 그런 게 엄청 많아요. 부사 자체를 많이 쓰는 것 같고, 의식적으로 빼려고 하는데 자꾸 나오더라고요. 특히 자꾸, 늘, 이런 거.
소묘 재밌네요. 자꾸, 늘, 그리고 계속. 여우떼 작업 글도 생각나요.

 

같은 소재를 반복하는 일에 의구심이 들었을 때 다른 소재를 찾으려 하지 않고 여우를 더 그리려고 한 것은 이상한 고집이었다. 어디 얼마나 그릴 수 있는지 알아보고 싶어졌다. 여우를 몇 마리쯤 그려야 싫증이 나는지, 그렇게 그리고 나면 무엇을 그리고 싶어질지 알고 싶었다.

아마 당시에 생겨난 것은 소재를 반복하는 작업에 대한 의심이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의심이었던 것 같다. 그리는 생활습관이 변하고 시간이 쌓이면서 생겨나는 익숙함이 두려웠고 스스로 작아지는 순간에 어깨와 팔에 느껴지는 통증이 두려웠다.

그런 중에 그렸던 여우들은 종이 위에서조차 제각기 다른 눈동자를 가졌고 흙으로 만들어진 여우들도 저마다 다른 표정과 자세를 취했다. 다 다르고, 같지 않았다. 그리는 몸과 마음도 같은 줄 알았지만 달라졌고 변해갔다. 다만 계속 그리고 싶어 하는 어린아이 하나가 내 안에 있다는 것과 변덕스러운 그 아이를 잘 달래며 지내면 좀 더 차분한 작업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작업도 ‘자꾸’ 그리고 ‘늘’ ‘계속’ 하시잖아요. 작가님다워요.

 

 

 

우리의 이야기는 열린 결말로 끝이 났다. 그래도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은 갈팡질팡 사방으로 활짝 열린 기분이었는데, 이 대화를 정리하면서 하나의 제목이 떠올랐다.(<고양이, 개, 늑대, 여우>는 아니다. 비슷하긴 하지만….) 작가님은 어떤 색을 떠올리고 계실까. 이 두서없는 회의록을 읽어준 분들은 어떤 모양을 상상하실까. 우리의 진짜 엔딩을 함께 천천히 맞이하는 것으로. :)

 

 

 

‘소묘의 여자들’은 [월간소묘 : 레터]에 연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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