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을 쌓는 마음> 윤혜은 작가와의 작은 인터뷰

 

일기장 앞에 뿌듯한 마음으로 앉고자

 

혜은 작가님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내게는 ‘우정의 작가’다. 일기인간, 걷는 사람, 쓰는 사람, 아이돌 덕후(!), 지망생의 달인(?), (전)책방지기… 여러 모양의 혜은이 있겠지만, 그 모든 혜은 아래 우정이 단단히 받치고 있는 것 같달까. 내가 <매일을 쌓는 마음>의 마지막 문단을 좋아하는 이유.

“두 다리가 뻗어나가는 길은 발아래 하나뿐인 것 같은 데, 손을 잡고 나란히 걷는 길은 언제나 여러 갈래로 펼쳐진다. 그렇게 이 삶을 설명하는 이정표가 늘어나는 것이 좋다. 어딘가에서 나는 휴게소를 찾아 헤매고 있고, 어딘가에서는 이제 막 떠나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리고 있다. 또 어딘가는 한참 통과하고 있는 중인가 하면 이미 도착해 오래 머물고 있는 곳도 있다. 그 모든 곳에, 서로 다른 친구들이 있다. 지금 내 삶의 현재 위치를 하나로만 잡을 수 없게끔, 나를 가리키는 이정표가 많은 것이 마음에 든다. 그 복잡한 길들을 나는 오래, 아주 오래 걸어야지.”

아마도 이 글을 쓸 때보다 더욱 복잡한 길을 걷고 있을 혜은 작가님과 이야기 나눴다.

 

 

“노력하여 얻은 것을 어찌 횡재라 하겠습니까?”

소묘 미화리 작가님과 함께 운영했던 작업책방 씀 공식 영업 종료 후 벌써 세 달이 훌쩍 지났어요. 책방지기가 아닌 세 달 동안 어떤 일상을 보내셨을까요?
혜은 원래는 책방을 정리하고 나면 바짝 쉬면서(끝내주게 놀면서) 지내다 금방 취업을 하려고 했는데요. 생각보다 딴짓을 너무 많이 하느라 바쁘게 지내고 있습니다. 주중에는 어린이 독서논술 교실에서 파트타임 선생님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동화를 쓰는 친구와 어린이&청소년을 주요 대상으로 삼은 글쓰기 클래스를 진행하고 있고요.(물론 성인반도요!) 11월부터는 격주마다 미화언니와 함께 TBS와 협업하는 팟캐스트, ‘씀 라디오’를 진행하고 있어요.(물론 ‘일기떨기’도 병행하며!) 그 밖의 시간들엔 자잘한 외주와 함께 내년 상반기 출간 예정인 소설을 틈틈이(정도로 하면 안 되긴 하는데..) 쓰고 있습니다. 이런 저를 보면서 엄마가 놀리듯 하시는 말씀이 있어요. “너 바쁜 거 보면 돈 되게 많이 버는 사람 같아.” 물론 저는 웃지 못합니다….

 

 

소묘 책방을 닫으면 회사원이 될 거라고 하셨는데 뜻밖의 다채로운 기회들을 마주하고 계시네요! “살수록 ‘사는 운’이, 쓸수록 ‘쓰는 운’이 쌓인다는 걸 알겠다”라고 저희 책 <매일을 쌓는 마음>에 쓰셨잖아요. 그동안 어떤 운을 쌓아오셨다고 생각하세요?
혜은 저의 모든 근황이 전부 누군가와 함께 하는 일이네요.^^; 최근에 또 다른 친구가 마흔 살 즈음부터는 회사 밖에서도 자기만의 뭔가를 만들어볼 거라는데, 그때 꼭 너와 함께 할 거야,라고 하더라고요. 농담이라는 걸 알지만 약간의 진담도 섞여 있는 게 느껴져서 웃겼어요. 사실 저는 오롯이 저 혼자 있는 시간을 가장 사랑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제 곁에서 쌓아지는 건 늘 ‘이 삶을 협업하는 운’ 같아요.
소묘 너무 멋진 운이다. 연말이면 한 해의 운세도 보곤 하잖아요. 혹시 올 한 해가 운세대로 흘러갔는지? 새해 운세도 보셨을지 궁금해요. ;-)

혜은 저는 주간, 월간마다 별자리 운세를 보고 가끔은 유튜브로 제너럴 타로도 보곤 하는데, 사실 아무리 좋은 말이 나와도 기억력이 나빠서 금방 다 잊어버려요. 순간의 기쁨, 혹은 순간의 염려 정도만 느끼고 마는 거죠.^^; 그런데도 계속 운세에 흥미를 갖는 건 <매일을 쌓는 마음>에서도 썼듯이, 좋은 운이든 나쁜 운이든 나에게 어떤 ‘운’이 있음을 확인하는 행위에 더 관심이 있는 것 같아요. 사실 확인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없는 셈이 되는 거잖아요.

그러고 보니 일기 쓰기와 비슷한 맥락이 있네요. 저에겐 기록하지 않고 지나간 하루는 그냥 없던 날이 되어버린다는 감각이 있거든요. 내가 분명히 살아냈지만,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날로 하루가 사라지는 것보다는 즐거웠던 날도, 꽤나 힘이 들었던 날도 나에게 ‘있었음을’ 남겨두는 편이 저는 좋더라고요. 그게 저를 지지해 온 오랜 방식 중 하나여서 그런 것 같은데, 운세를 확인하는 일도 꼭 그렇습니다.

그리고 최근에 모 금융회사에서 공유한 신년운세로 2026년의 운을 가벼게 점쳐봤는데요. 엄청나게 좋은 거예요. 감탄만 나오는 해석 와중에도 참 웃긴 게, 이런 말이 있더라고요. “괜한 횡재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자신의 노력의 결과임을 알아야 합니다. 노력하여 얻은 것을 어찌 횡재라 하겠습니까?”

큰 행운들이 오긴 오는데, 사실 내가 무지 노력해서 얻는 일이겠구나. 근데 그런 모양이 너무 저다운 것 같아서, 말도 안 되게 기쁜 예고들에 오히려 신뢰가 갔답니다. 내년이 기대가 되어요(?)

 

“오늘 내가 가장 마지막으로 한 일”

소묘 말씀하신 것처럼 혜은 하면 ‘일기인간’을 빼놓을 수 없잖아요. 첫 책이 <일기 쓰고 앉아 있네, 혜은>이고 저희 <매일을 쌓는 마음>을 차지하는 큰 부분도 일기예요. 여러 일기(!)를 쓰고 계실 텐데 일기 쓰기의 루틴도 궁금해요.(저는 틀려먹었어요… 빈칸이 더 많아요… 매번 우리 책 보면서 마음을 다잡아요…)
혜은 가장 클래식(!)한 방식으로 쓰는 것 같아요. 아침에도 써보고, 한낮에 밀린 일기를 써본 적도 있지만 역시 하루 끝에서, 자기 직전에 쓰는 게 저에겐 가장 잘 맞더라고요. 여전히 ‘일기 쓰기가 오늘 내가 가장 마지막으로 한 일’이 되는 게 좋습니다. 이걸 지키기 위해서는 그 앞의 하루들이 제법 정돈이 잘 되어야 해서 더욱 이 루틴을 지키는 걸 좋아해요. 특별히 과로를 하거나 특별히 나태하거나 혹은 특별히 흥청망청하거나 하면, 가장 마지막에 쓰는 일기가 금방 피곤한 일처럼 여겨지거든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일을 그렇게 느끼면서 하는 게 싫어서, 하루를 좀 빠듯하게 보내더라도 일기장 앞에선 다소간 뿌듯한 마음으로 앉고자 해요.

 

 

소묘 ’10년 일기장’ 두 번째 권을 다 채워가시는 걸로 알아요. 그리고 세 번째 ’10년 일기장’은 직접 만드실 거라고 했는데 그 이야기도 들려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혜은 원하는 걸 말할수록 잘 이뤄진다(?)는 속설이 있잖아요. 사실 저와 잘 맞는 수법(?)은 아니에요. 좀 쉽게 비장해지는 편이고, 그냥 가벼운 마음으로 뭔가를 시도하거나 기대해 보는 게 어려운 사람인데 주변의 친구들이 저랑 꼭 반대거든요. 이걸 해야겠다, 저게 되면 좋겠다! 하면서 일상의 크고작은 상상력을 펼치는 사람들이 있어요. 특히 미화언니를 보면서 기대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나를 오히려 사뿐하게 만들 수 있다는 걸 깨달았죠.

그래서 세 번째 10년 일기장을 만들겠다는 건, 내심 제 안에 자리한 바람이기도 하지만 무언가 훌쩍 기대하는 마음을 저도 흉내내 보고자 호기롭게 뱉은 거예요. 아무 계획이 없어서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마음이 또 금방 무거워진답니다… 진짜로 해야 하나… 그럼 언제, 뭐부터 시작해야 하나… 시장조사? 내가 쓴 다이어리의 장단점 분석? 이런 생각이 마구 섞여요. 이렇게 실현이 되려나 봐요.(?)

소묘 그래서일까요? 혜은 작가님이라면 얘기한 걸 꼭 실현할 거라는 믿음이 있어요. :-) 올해 일기에 가장 많이 쓴 이야기는 무엇이었어요?

혜은 굳이 일기장을 펼치지 않아도 알 것 같아요. 작년 가을부터 올해 늦여름까지는 씀을 닫는 일에 대해 가장 몰두해 있었으니까요. 앞으로 어떻게 될까, 이 다음은 뭘까 궁금하기도 했지만 돌이켜보면 가장 ‘지금’에 충실한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책방을 닫고 남은 올해를 보내는 마지막 3개월도 같은 마음이고요. 이렇게 현재만 생각하고 있다니…)

최근에 한 원고에도 썼었는데, 씀을 닫는 일을 씀을 지금껏 운영해 온 일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더라고요. 또 한편으로는, 저는 책방을 운영해 온 시간이 작가 활동을 한 시기와 거의 동일하거든요. ‘작업책방’ 씀에 어울리는 작업자가 되기 위해 열심히 쓴 일들이, 결과적으로 작가 활동에 대한 지지가 되어주었더라고요. 그래서 씀과 함께 만들어진 제 모습을 전반적으로 회고하면서, 씀이 끝나도 쓰는 혜은이 계속되기를 바라는 일기도 꽤 많이 썼어요.

소묘 씀을 같이 운영했던 미화리 작가님과 이전 달에 먼저 인터뷰를 할 때 혜은 작가님이 어떤 존재인지 여쭤봤었어요. “이별을 생각할 수 없는 존재인 거 같아요. 씀처럼 혜은과 함께하는 경험과 이별할 수는 있지만 혜은 자체와 이별할 일은 없지 않을까..”라고 답해주셨죠. 혜은에게 미화리란?
혜은 너무 근사한 대답을 해줘서 저도 이하동문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일단 언니의 자문에 동감하는 바이고요. 저에게 미화언니는 보통명사인 언니를 고유명사로 만든 사람이에요. 사람들이 나의 근황을 묻는데 그게 언니와 관련된 일일 때 저는 미화언니라고 지칭하지 않고 그냥 언니라고만 말하거든요. 응, 언니랑 있어. 언니랑 어디가. 언니랑 뭐해. 이런 식으로요. 미화가 생략되어도 사람들은 그게 미화언니라는 걸 알아요. 그러니까 제 인생에 어떤 언니가 등장해도 그냥 ‘언니’라고만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미화언니밖에 없을 거예요. 엄마, 아빠처럼요. 혈연도 아닌데 모두에게 이름으로 부르지 않아도 관계가 설명되는 존재. 그리고 좀 이상한 말인데 저는 미화언니가 저한테 언니인 게 좋아요. 이미화한테 미화야, 미화야 하지 않고 언니, 언니 할 수 있는 게 좋아요.

 

 

소묘 저에게 혜은 작가님은 제가 아는 가장 잘 걷는 사람 중 한 명이에요.(다른 한 명은 같은 마음의 지도 시리즈를 함께 쓴 문이영 작가님 ㅎㅎ) 저희 책에서 불광천을 걷다가 일순 날갯짓하며 떠오른 왜가리에 대해 써주신 장면이 인상 깊었는데, 최근 걸으면서 수집한 장면이 있으실까요?
혜은 요즘도 팟캐스트 녹음 때문에 망원동에 주기적으로 가곤 해요. 그때마다 불광천을 걷는데, 마포구청역에서 디지털미디어시티역으로 향하는 방향에 굴다리가 있거든요. 거기 한창 벽화 작업을 하고 있었어요. 중간 과정을 봤을 땐 ‘시민의 거리’라고 생각했는데, 완성되고 보니 ‘시인의 거리’였더라고요. 시인의 거리라니… 더 마음에 들더라고요. 불광천은 정말 질리도록 음악만 들었던 거리예요. 종종 노래를 더 들으려고 일부러 끝까지 걷고 돌아오곤 했던 거리인데 만약 씀을 운영할 때 이 벽화가 완성됐다면 저는 분명 집에 갈 때마다 그날의 시를 한 편씩 정해봤을 거예요. 다른 책보다 시집을 챙기는 날이 더 많았을 테고, 그런 귀갓길도 참 좋았겠다~ 이런 생각을 한 기억이 나네요.
소묘 요즘 플레이리스트에서 가장 자주 재생되는 노래와 가장 최근에 추가된 노래는 무엇일까요?
혜은 요즘 자주 듣고 있는 노래는 후지이 카제의 <토쿠니나이(딱히 없어)>입니다. 멜로디도 심플해서 오래 듣기에 좋은데 다소 지쳐 있는 듯, 초연해 보이지만 또 자기 삶의 미지근한 애정이 느껴지는 가사가 참 좋더라고요. 가장 최근에 추가된 노래는 크리스탈의 첫 싱글 <Solitary>예요! 중저음의 음색이 너무 매력적이고, 은근한 R&B가 흥얼거리기 좋아서 거의 종일 듣고 있어요. 그런데 Solitary가 무슨 뜻인지 찾아봤더니 글쎄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혼자서 잘 지내는’이라고 하네요. 노래가 더 좋아졌습니다.
소묘 요즘 즐겁게 하고 계신 일은 뭐예요?
혜은 복싱을 11월에 잠시 쉬었는데, 최근에 재등록을 했어요. 엄청 뜨거워진 몸으로 밖에 나와 쨍한 겨울바람을 맞는 기분이 너무 상쾌하더라고요. 제가 이제 복싱을 한 지 1년 반이 넘어가는데, 지난 겨울엔 계엄 이후로 봄까지 복싱을 쉬었거든요. 그래서 복싱과 보낸 사계절 중 제가 가장 좋아하는 겨울이 빠져 있었어요. 올겨울은 복싱을 하면서 보낼 생각해 벌써 즐겁습니다. 계엄해제로부터 1년이 된 어제, 서울에 첫눈이 펑펑 왔는데 복싱을 하고 귀가하는 마음이 너무 홀가분했어요.

 

 

“없던 척하는 일에 이제 그만 실패하기”

소묘 “요즘은 스스로 질문을 던지지 않고서는 쌓을 수 없는 것들 앞에 있다. 쓰기로 무엇을 파고들고 싶은지. 문장을 잘 쓰는 것보다 어떤 방식으로 이야기를 통과하고 싶은지. 내 소설이 이 세상의 어디를 경유했으면 하는지.” _<매일을 쌓는 마음>

이 질문에 대한 작은 답이 책으로 나왔지요. 첫 청소년 소설 <우리들의 플레이리스트>가 올 6월에 출간됐는데, 읽으면서 여름을 열기에 참 좋았다 생각했어요. 어떤 소설인지 직접 소개 부탁드려요 :)

혜은 이 소설에는 같은 자리에서 다른 시간을 겪는 시절, 변해 가는 자신의 모습이 ‘우리’로 겹쳐지는 순간을 소중히 여기는 아이들이 등장합니다. 모두가 반짝이는 꿈을 꾸라고 하는 세상에서, 누군가는 외로움을 고백하는 것에서부터 꿈이 시작되기도 한다는 걸 알려주는 다섯 친구들의 이야기랍니다. 나래, 이나, 소영, 유림, 정현과 함께 마냥 연약했다고만 여긴 10대 시절에 깃들어 있는 용기를 알아볼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아요.

여기까지는 대외용(?)이고요, 사실 <우리들의 플레이리스트>는 제가 묻어둔 오랜 꿈, 그러기로 선택한 저의 10대와 화해하는 30대를 맞이하고 쓰게 된 이야기예요. 소묘님은 ‘꿈’ 하면 어떤 장면을 떠올리시나요? 저에게 꿈은 스스로 매몰차게 끊어내 버린 것. 그럼에도 오랫동안 내 곁을 맴돌았고, 그걸 알았지만 더는 해줄 있는 게 없어 몇 번이고 외면하다 끝내 잊는 데 성공한 이야기에 가까워요. 그런데 이 소설을 쓰면서 깨달았어요. 저의 오랜 꿈은 이러한 잊기가 실패하기를 묵묵히 기다렸는지도 모르겠다고요. 어떤 시절을 없던 척하는 일에 이제 그만 실패하기를 말예요. 그 방법이 소설을 쓰기가 될 줄은 몰랐는데, 쓰고 나니 나한테 한번은 꼭 주고 싶었던 이야기라는 확신이 들었어요.

 

 

소묘 요즘은 어떤 질문을 던지고 계세요?

혜은 질문보다는, 완벽한 끝이라는 건 없구나. 이런 생각을 많이 해요. 그게 무엇이든, 어쩌면 죽음 마저도요. 물론 물리적인 세계 안에서는 시작과 끝이 분명한 일들과 존재가 더 많겠지만, 그냥 이 세상에 한 번이라도 출현했던 것들은—가시적이든, 비가시적이든—어떤 식으로든 영원히 남아서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지구가 살아 있는 거대한 무덤 같기도 하고요. 이 우주가 탄생한 이래(?) 한 순간도 완벽히 멈추지 않고 억겁의 시간을 그냥 무한히 반복하고 있는 게 신기하게 느껴질 때가 많아요.

그리고 또 하나는, 아직 짧은 생을 살았을 뿐이지만 내 안에 제법 세월이라고 이름 붙일 만한 시간이 쌓이고 있구나. 확실하게 과거라는 거리감을 느끼며 돌이켜볼 수 있는 시간이 나에게 생기는 게 좋다… 이런 생각을 합니다.

소묘 저희 책에 “쌓는 마음은 기다리는 마음과 닮아 있다”라고 쓰셨는데, 혹시 또 다른 닮은 마음이 더해지셨을까요? 혜은에게 ‘쌓기’란? 앞으로 무엇을 쌓아가고 싶으세요?

혜은 사실 제가 무언가를 ‘쌓겠다는’ 다짐을 잘 하거나 그런 감각을 원동력 삼아 살아온 것 같지는 않아요. 그런데 제가 지나온 궤적을 소묘님께서 ‘쌓는 마음’으로 이름 붙여주시고, 덕분에 <매일을 쌓는 마음> 이라는 책을 쓰게 된 이후로 그게 저와 잘 어울리는 모양으로 자리잡은 느낌이랄까요.ㅎㅎ

제가 살면서 가장 많이 한 생각이 뭘까 잠시 고민해 보니까, 엄마의 건강 다음으로 ‘내 마음에 드는 내 모습이 되자’인 것 같아요. 학창시절부터 다른 누구보다도 제 마음에 드는 제가 되고 싶었던 기억이 나요. 그런 일기를 자주 남기면서 자랐고요. 그래서 제가 삶에 의식적으로 더하고자 하는 게 있다면, 그건 전부 넓은 의미에서 제 마음에 드는 저를 위해서일 거란 생각이 들어요.

소묘 ‘소묘의 여자들’ 공식 질문입니다. 혜은 작가님의 아끼는 단어는 무엇인가요?

혜은 성실과 정성 중에 고민을 많이 했는데… 갑자기 친구가 내가 좋아할 것 같다며 보낸 인터뷰에 성실이라는 말이 바로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둘 다 비슷비슷한 느낌이지만) 성실로 해야겠다~라고 마음을 정한 뒤, 친구에게 그 얘길 하니까. “난 정성에 한 표!”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아 그래? 그럼 정성으로 하지 뭐~이렇게 되었습니다. 어쩐지 성실도 정성도 전혀 느껴지지 않는 답변이지만…

사실 이 대화는 며칠 전 아침에 친구가 브로콜리너마저의 윤덕원 씨 인터뷰를 보내면서 “대충 하는 것도 있는 하루를 보내라”는 안부로 시작됐거든요. 그의 신간 <열심히 대충 쓰는 사람>이라는 책의 한 페이지와 함께요. 근데 사실 저는 12월이 되면서 더 충실히 살아야겠다고 다짐했거든요. 만약 친구가 문득 제가 또 온 마음으로 하루를 다 살까 봐 가볍게 핀잔하는 마음으로 그 연락을 한 거라면, 제가 확실히 무엇이든 정성을 다하는 게 익숙한 사람인 것 같아요. 그게 제 마음에 드는 모습이라 그런가 봐요.

정성을 좋아하면, 별것 아닌 것도 소중하게 대할 수 있거든요. 내게 오는 것을 대수로워하는 마음,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는 게 저는 좋아요. 그래서 가끔 무거워질 때도 있지만, 그렇게 몸도 마음도 기울어지려 할 때면 새로운 정성을 향해 허리를 펴고 넓은 보폭으로 넘어가면 돼요.

 

 

 

작업책방 씀을 닫고 더 여러 갈래로 뻗어나가는 혜은 작가님, 그 곁에는 함께하는 서로 다른 친구들로 가득했고, 우정의 다른 말을 알게 되었다. “이 삶을 협업하는 운.” 꼭 너와 함께 할 거야, 라고 말해주는 친구와 대충하는 것도 있는 하루를 보내라, 라고 말해주는 친구가 있다니, 이 얼마나 크고 아름다운 운인가요. 그건 어디서 떨어지거나 주어진 운이 아니라 10년 일기장을 두 권 채울 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 오랫동안, 매일 하루의 끝에서 쌓아온 두께에서 온 것일 테다. ‘내 마음에 드는 내 모습이’ 되기 위해 걷고, 듣고, 말하고, 쓰는 하루를 차곡차곡 정돈하고서 다소간 뿌듯한 마음으로 일기장 앞에 앉는 한 사람의 모습을 그려본다. 즐거웠던 날도 힘들었던 날도 모두 나에게 ‘있었음’을 남겨두는 일, 오늘 가장 마지막에 한 그 일이 우리 안에 영원히 남아 있을 거라 생각하면, 혜은처럼 ‘새로운 정성을 향해 허리를 펴고 넓은 보폭으로 넘어가’고 싶다. 서로 다른 길을 걷고 있더라도 작게나마 이 삶을 협업하는 기분, 역시 나의 우정의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