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정한샘
어릴 때는 책을 참 좋아했어요.
좋아해서 많이 읽었던 것 같은데, 모르겠어요. 언제부터 안 읽었는지.
고등학교 이후로는 읽은 책이 기억이 나지 않아요. 그런데 다시 읽고 싶어요.
처음 책을 사러 와 말하던 ㅅ의 눈빛이 기억난다. 저 말을 건네기 전 꼼꼼하게 서가를 둘러보던 모습에서 알 수 있었다. 이 사람은 다시 책을 읽겠구나. 좋아하게 되겠구나. 그 세계로 다시 들어갈 책을 추천해 주고 싶었다. ㅅ의 일터와 나의 일터가 열 걸음도 되지 않게 바로 곁하고 있지만 마스크 아래 얼굴은 아직 한 번도 보지 못한 2020년의 어느 여름날이었다. 골라놓은 책 중 두 권을 손에 들고 나가며 ㅅ은 오래 비어 있던 공간에 책방이 들어와 참 좋다는 말을 천천히 꾹꾹 눌러 말했다.
나는 책을 파는 사람인가? 독서 모임을 이끄는 사람인가? 읽은 책을 소개하는 사람인가? 나는 책을 고르는 사람이다. 책방 운영 4년 차에 들어서며, 지금의 나를 가장 잘 설명하는 말은 책 고르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매년 수만 권의 책이 출간된다. 그중 작은 책방의 서가에 판매용으로 들어올 수 있는 책은 한 해 최대 몇 권일까. 매출이 아주 잘 나오는 유명한 동네 책방이 아니고서야 한 해에 들일 수 있는 신간의 수는 아마도 수백 권을 넘기지 못할 것이다. 다른 책방 주인들의 일과를 세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대부분 하루의 가장 많은 시간을 책을 고르는 데에 사용하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수만 권 중 수백 권을 골라내는 일을 하려면 매일 눈이 빠져라 화면을 보고, 좋아하는 작가 또는 출판사의 신간을 확인하고, 모르는 작가의 흥미로운 책이 눈에 띄면 일단 한 권만 사서 먼저 읽어보고, 책방에 놓을 공간이 있는지 살핀 후 주문을 하는 날들이 반복되는 것이다. 혼자 운영하고 있다면 누구에게 물어볼 수도 없다. 어떤 책을 들일지 말지를 혼자 결정하고 혼자 책임져야 한다. 모두가 좋아할 만한 책보다는 이곳에서 특별히 만나는 느낌을 주는 책을 찾는 것에 열중한다. 찾아오는 사람도 별로 없는데 대체 왜 이렇게까지 공을 들이는 거냐고 묻는다면 책방의 선택을 믿고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쉽게 고른 책, 내가 모르는 책을 권하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라고 말하겠다.
한 포털 사이트에 올라온 방문 리뷰 중 ‘눈을 감고 골라도 좋은 책을 안고 나가는 곳’이라는 글이 있었다. 아무 책이나 골라 나가도 후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고른 책들이 사랑받는 글이어서 기뻤다. 너무 좋아서 하마터면 출력해서 벽에 붙여둘 뻔했다. 공들여 고른 책들이지만 누군가는 빠르게 지나쳐 버리는 책들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그 이유를 조금은 안다.
이곳에서 책을 안심하고 골라 가는 데에는 아주 큰 전제가 따른다. 우리를 둘러싼 사회와 세상을 바라보는 눈길이, 그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분노하고 상처받는 지점이, 그 안에서 부대끼며 살아가는 존재들 사이에 벌어지는 일들로 인해 웃고 우는 마음이 비슷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곳의 책들은 마치 외계의 다른 세상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낯설게 느껴질 것이고 그저 한 번 둘러보는 곳으로 충분할 것이다. 이곳은 그저 까다로운 한 인간의 개인적인 취향을 통과한 책들만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고집 센 곳으로 느껴질 것이다.
그러니 이 동굴 같은 곳에 한 번 오고, 두 번 오고, 열 번 오는 사람들은 얼마나 특별한 사람들인가. 아침에 주문하면 밤에 받을 수 있는 곳을 마다하고 불편하기 짝이 없는 주문서 작성을 하는 이들은 또 얼마나 특별한가. 그렇게 책방을 이용하고 얻는 것이라곤 어디에도 쓸모없는 ‘단골’이라는 이름뿐인데 말이다. 쓰다 보니 이해가 되지 않는 사람들이다. 우리나라는 성인의 절반 이상이 일 년에 책 한 권을 안 읽는 나라이니*, 책을 읽다 못해 취향이 맞는 곳을 찾아 작은 동네책방까지 스며들어 단골이 된 사람들은 이미 이해의 영역을 넘은 사람들인지도 모르겠다. 빠르고 재미있는 것이 넘치는 시대에 종이책을 읽고 의견을 나누고 있다니, 어쩌면 그냥 이상한 사람들인 건지도. 그 이상한 사람들 덕분에 책방은 문을 닫지 않고 매달 임대료를 내고 있다.
리브레리아Q에서 ㅅ의 일터로 옮겨 간 책들
ㅅ은 천천히 자기만의 속도로 책을 읽었고, 또 읽었고, 계속 읽어나갔다. 책을 추천하는 일은 곧 끝났고 ㅅ의 공간에는 ㅅ의 색을 입은 책이 쌓여갔다. 내가 골라놓은 책 중에서 ㅅ의 손으로 옮겨 간 책과, ㅅ이 직접 골라 내게 예약하고 찾아간 책 사이에는 길이 생겼고, 그 길에서 만들어진 작은 갈래들은 질문이 되어 다른 책으로 연결되어 갔다. 우리의 마음이 비슷한 지점에서 일렁였기에 책을 통한 질문과 연결이 반갑고 고마웠다. 작은 일렁임이 파도가 될 때까지 매일 같은 정성으로, 같은 고집으로 책을 고를 것이다. 이상한 사람들이 계속 찾아오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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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한샘
2020년 7월 31일 가정식 책방 ‘리브레리아Q’를 열었다. 이탈리아에서 음악을 공부했고, 지금은 책과 함께하는 삶을 살고 있다. 딸과 나눈 책 편지 《세상의 질문 앞에 우리는 마주 앉아》를 썼고, 그림책 《구름의 나날》을 옮겼다.
_리브레리아Q @libreriaq
‘가정식 책방: 리브레리아Q 서점원 노트’는 2023년 5월부터 2024년 6월까지 [월간소묘 : 레터]에 연재되었습니다. 더 풍성한 이야기들을 모으고 엮어 멀지 않은 때 책으로 찾아뵐게요.
[가정식 책방: 리브레리아Q 서점원 노트]
여긴 뭐하는 곳인가요? • 기다리는 일 • 밤과 밤 • 오늘은 대목 • 작은 일렁임이 파도가 될 때까지 • 서점원Q가 보내는 11월의 편지 • 보이지 않는 곳에서 • 기뻤어, 기뻤어, 기뻤어 • 4월의 책을 보내는 마음 • 누군가에게 집이 되어주고 싶어서 • 압정 빼어내기
[가정식 책방: 리브레리아Q 서점원 노트]
여긴 뭐하는 곳인가요? • 기다리는 일 • 밤과 밤 • 오늘은 대목 • 작은 일렁임이 파도가 될 때까지 • 서점원Q가 보내는 11월의 편지 • 보이지 않는 곳에서 • 기뻤어, 기뻤어, 기뻤어 • 4월의 책을 보내는 마음 • 누군가에게 집이 되어주고 싶어서 • 압정 빼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