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이영

 

저녁을 먹고 공원을 산책했다. 안개 낀 유월 저녁이었다. 이곳 평야 지대는 빛이 사라지는 시간에 안개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늦은 밤부터 동트기 전까지 자욱하게 깔리지만, 해가 높이 뜨면 감쪽같이 사라지는 여기 안개에 익숙해진 지도 어느덧 사 년이 되었다.

잦은 비 소식 끝에 찾아온 맑은 날이어서일까, 밤이 깊어 적막할 줄 알았으나 꼭 그렇지는 않았다. 어둠과 안개 속에 모습을 감추고 있다가 산책로 방향이 달라질 때마다 나타나는 사람들과 더러 마주치기도 했다. 무표정하게 혼자 걷는 사람들과 스쳐 지나가며 알 수 없는 동질감과 혼자된 기분을 동시에 느꼈다. 길게 늘어진 검푸른 잎사귀 아래에 다다라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미지근하고 축축한 공기에 이런저런 냄새가 섞여 들었다. 흙 냄새, 풀 냄새, 어제 내린 비가 만든 물 웅덩이 냄새. 푸르게 비릿한 냄새들 끝에 근처 주택가에서 실려온 어느 집 살림 사는 냄새가 희미하게 맴돌았다. 세상의 귀퉁이가 조금씩 녹아내린 냄새, 유월에만 맡을 수 있는 냄새다. 완연히 풀린 날씨 탓이리라. 유월의 밤공기 속을 헤매자면 내 모난 마음도 얼마간 녹아내리는 걸 느낀다.

걷는 동안 지나온 유월들을 생각했다. 한결 연해진 마음을 두드리는 기억은 하나같이 평범한 풍경이다. 무수한 카페, 흔한 거리, 어디에나 있는 노점, 낡은 등나무 벤치와 능소화, 그저 그런 맛의 아이스크림. 그러니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순간 내지는 무슨 일인가 일어나려다 말아버린 순간. 언뜻 나타났다 사라진 날들과 너무 사소해서 전할 수 없는 모든 날들. 어떤 기억은 오직 유월에만 떠오른다. 다른 계절에는 일부러 생각하려 해도 건너뛰게 되는 기억들이 유월에는 무시로 찾아들어 마음을 흔든다.

 

The Auvers Valley on the Oise River, Pierre-Auguste Renoir [출처]

 

그해 유월에 나는 을지로 거리에 있었다. 또는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을지로 거리에는 그해 유월의 내가 있다고. 초저녁 을지로에는 사람이 많았다. 사람들을 피해 다니느라 우리는 어색하게 붙어 걸었다. 반쯤 걷어 올린 소매 밑으로 드러난 맨살이 어쩌다 그의 팔에 닿을 때면 자연스럽게 걷는 법을 잊은 듯 나도 모르게 잠시 몸이 굳었다. 좀 더 가까이 스칠 때면 그가 입은 얇은 상의 아래에 자리한 근육이 느껴졌다. 근육은 엄연히 공기 중에 일정한 공간을 차지하고서 납작한 옷에 입체감을 부여하고 있었다. 나는 새삼 내 몸이 차지한 공간의 부피를 낯설게 가늠해 보았다.

만물이 같은 극을 띠고 서로를 밀어내는 것 같이 느껴지는 날이었다. 제자리에서 떨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느리게 흐르는 밤공기 속에서 따로 떨어져 작게 흔들리는 검푸른 잎사귀처럼. 끌어당기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밀어내고 있는 한 쌍의 자석처럼. 그날 우리는 붙어 있었다기보다는 좁은 틈을 사이에 두고 약하지만 선명하게 서로를 밀어내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을지로 거리를 메운 넥타이 부대를 헤치고 찾아간 영화관은 가 본 영화관 중 가장 낡아 보였다. 빛이 들지 않는 어두컴컴한 공간에 오래된 천이나 쿠션 따위가 내뿜는 특유의 습한 냄새가 팝콘 냄새와 섞여 진동했다. 우리는 인기리에 상영 중인 할리우드 영화 하나를 고르고 지정된 좌석에 앉았다. 관도 몇 개 없는 작은 영화관이라 선택지가 없었다. 아직 서로의 영화 취향을 모르기도 했다. 상영관에는 우리 둘뿐이어서 영화를 보며 이따금 대화를 나눴다. 아무도 없는데 서로 귓속말을 했다. 영화가 중반을 넘어 클라이막스로 가던 중 그가 내 귀에 대고 작게 말했다. “우리 나갈까?”

밤거리는 아까보다 훨씬 왁자한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치킨과 맥주로 하루의 고단함을 씻어내는 직장인들이 노상 테이블마다 가득했다. 우리는 각자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사들고 천천히 걸었다. 그날 그 거리의 사소한 모든 것을 잊지 못한다. 저녁 하늘의 색깔과 빠르게 달리는 자동차 소리를, 극장의 축축한 시트 감촉과 아이스크림 맛을. 지극히 평범한 것들이 어우러져 만들어낸 유월의 냄새, 여름을 예고하는 그 냄새를 잊지 못한다.

거기엔 뭔가가 촉발되기 직전의 긴장과 그 긴장이 풀어지는 느낌이 동시에 있다. 이를테면 터질 듯 풍선을 불다가 잠깐 입을 떼는 동안 새어 나오는 바람 같다. 실수로 발사된 신호탄에 순간 긴장이 풀려버린 달리기 선수의 몸짓 같다. 혹은 첫 사냥을 떠나는 아이가 연습삼아 허공에 쏘아본 화살이 수풀 사이를 통과하며 만들어 내는 꽃대의 떨림 같기도 하다. 그리하여 우리의 팔꿈치와 팔꿈치 사이, 손등과 손등 사이, 귓불과 입술 사이를 가르며 떨고 있었던 것, 그 좁은 틈에서 시작되고 있었던 것, 우리도 모르는 틈에 태어나려 하고 있었던 것은⋯.

그것은 완전히 새로운 시간, 서로를 만나기 전까지 알지 못했던 시간이다. 연하고 향기롭고 생기 넘치는 시간, 유월의 밤공기를 닮은 시간. 우리는 그 시간에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될 수 있다. 그러므로 다른 무엇보다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이 될 수 있는 시간이다. 다시 사랑해야지, 용기 낼 수 있는 시간이다.

 

Photo by Thong Vo on Unsplash

 

실제로 시간은 어느 틈에, 무엇과 다른 무엇 사이에 놓인 거리를 가르며 태어났다. 138억년 전, 빅뱅이라는 엄청난 폭발로 인해 그 파편이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시간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다르게 말하면 흩어지기 전에는 시간도 없었다. 시간은 태초의 모든 사이와 틈에서 태어났다. 별은 그렇게 흩어진 파편들이 곳곳에서 다시 작게 뭉치며 밝게 타오른 흔적이다. 흩어져 타오르는 별과 별 사이, 검고 깊은 공간을 가르며 시간이 펼쳐져 있는 셈이다. 그건 흩어져 있는 존재들을 시간이 어떤 식으로든 연결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는 결코 합일될 수 없지만 시간 덕분에, 시간과 더불어, 무언가를 나눌 수 있다. 눈빛이나 대화, 우정과 사랑 같은 것. 사랑의 시작은 시간의 시작과 궤를 같이 한다. 사랑한다는 건 시간이 태어나는 일이다. 구태의연한 시간 사이를 가르고 새로운 시간을 펼쳐내는 일이다.

사랑이 새로운 시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사랑에 알맞는 시간이 새로이 태어나야 한다. 타성에 젖은 시간과 단절된 시간. 또한 의무나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로운 시간. 무엇보다 확증 편향되지 않은 시간. 새로운 시간에 우리가 나누는 모든 사랑은, 그러므로 새로운 사랑, 새롭게 하는 사랑이다.

글을 쓰면서 그런 사랑을 확장된 방식으로 경험한다. 쓰는 일이 섣불리 규정하거나 판단하지 않는 일, 익숙한 무언가를 다르게 보려고 노력하는 일이라서다. 또한 다음과 같은 일이기도 하다. 대상을 끝까지 보는 일, 대상이 긴장 속에서 부르르 떨 때까지 기다리는 일. 그리하여 마침내 그것이 만들어 내는 진동을, 그 떨림이 촉발하려는 사건을 예감하는 일. 쓰는 일은 그래서 유월 저녁의 산책과 닮았다. 연한 마음으로 잎사귀의 떨림을 감각하다가 세상을 다시 사랑하고 마는 일이기 때문이다.

 

Photo by Anderson Rian on Unsplash

 

삼 년 전, 슬픔과 미움에 지쳐 제주로 갔다. 슬프고 미운 것들 모두 육지에 두고서 캐리어 하나에 배낭 하나 메고 가서 한 달을 살았다. 작고 조용한 시골 바닷가 마을이었다. 매일 다섯 대의 버스가 마지막으로 멈춰 서는 곳. 일찍 잠들고 일찍 깨어나는 사람들이 사는 곳. 긴긴밤 나는 쉬지 않고 꿈을 꿨다. 같은 꿈을 연달아 꾸고 또 이어서 꿨다. 아침에 일어나면 가슴께가 저릿하고 오래 울음을 삼킨 듯 목이 매캐했다.

하루는 오름에 올랐다. 오름 위는 다만 바람 소리로 가득했다. 낮 동안 데워진 바람이 온기를 품고 빠르게 불어오고 있었다. 귓불 밑으로 불어 올라 옆머리를 나부끼게 하는 바람이 나를 공중으로 밀어 올리는 듯해서 바람을 타고 날아오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곳에 앉아 바람을 맞으며 지는 해를 바라봤다. 오름을 뒤덮은 풀이 풍향에 따라 물결을 이루며 금빛으로 일렁였다. 그러다 갑자기 모든 게 멈췄다. 영원히 지고 있는 중일 것만 같았던 해가 한순간 땅 아래로 사라졌는데 바로 그때 내내 불던 바람이 돌연 멎은 것이다. 바람 소리가 사라진 자리에 정적이 들어섰고 나는 세상이 나로부터 한 걸음 뒤로 물러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공기의 흐름과 함께 시간의 흐름도 멈춘 것 같았다. 세상 속에 있다가 세상 바깥으로 밀려나는 순간, 즉 세상과의 거리가 확보되는 순간에라야만 느껴지는 것이 있다. 나와 이 세계 사이를 가르며 매 순간 새롭게 태어나고 있는 시간의 존재가 그렇다. 그리고 나는 언제나 그런 순간에라야만 슬퍼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이기고 다시 삶을 사랑할 수 있었다.

제주에 머무는 동안 끊임없이 어딘가로 편지를 부쳤다. 바다와 오름에 대해, 아름답게 일렁이는 것들에 대해 부지런히 써서 보냈다. 그러나 정말로 하고 싶었던 말은 간밤에 꾼 꿈이 의미하는 바와, 어제는 괜찮았는데 오늘은 안 괜찮다는 소식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다르게 살려고 애쓰고 있다는 이야기라는 걸 이제는 안다.

어떤 사실은 뒤늦게 알아차릴 수밖에 없다. 우체국 옆 카페에서 뜨거운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너에게 보낼 편지를 쓰는 동안 시작되고 있었던 것. 편지를 보내고 돌아오는 버스에서 본 풍경, 그 속에서 떨고 있었던 것. 편지 사이에 가로놓인 바다, 문장 사이에 비워진 공백을 가르며 태어나길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시간이 흘러 다시 읽어본 편지에서 알아차리는 사랑도 있다. 따뜻한 빛으로 충만한 계절에는 몰랐는데 춥고 밤이 긴 계절이 되어서야 아는 사랑이 있듯이. 건물과 건물, 도로의 이편과 저편, 나와 너 사이를 채우며 펄펄 내리는 눈을 보며 비로소 아는 사랑도 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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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은 자정이 다 되어 끝났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공원을 빠져나와 횡단보도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안개 낀 도로를 질주하는 차들 위로 감귤 빛 신호등이 소리 없이 점멸하고 있었다. 이윽고 신호등이 붉은 빛으로 바뀌었고 정지선 앞으로 차 두어 대가 멈춰섰다. 일순간 도시 전체에 적막이 찾아왔다. 그때 알았다. 같은 자리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카세트 테이프 릴처럼, 시간은 흘러서 가는 것이 아니라 다시 돌아온다.

그러니까 매년 이맘때 소환되는 기억은 이런 것들이다. 모호했던 순간, 스쳐간 인연, 뒤늦게 깨달은 사랑. 어느 틈에 퍼지고 있었으나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희미한 파문들이 이제서야 또렷해지는 이유는 유월의 밤공기 때문이라고, 나는 핑계를 대고 싶은 것이다.

 

 

 

 

‘우울이라 쓰지 않고’는 [월간소묘 : 레터]에 2020년 2월부터 10월까지 연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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