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문이영
고대인들은 햇빛에 치유 능력이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헬리오테라피Heliotherapy’는 고대에 시행되었던 광선치료를 일컫는 단어로, 그리스 태양의 신 헬리오스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2세기에 살았던 한 그리스 의사는 이렇게 썼다.
“무기력증에 시달리는 사람은 빛이 드는 곳에 눕히고 햇볕을 쬐도록 해야 한다. 어둠은 병의 원인이다.” (Lethargics are to be laid in the light and exposed to the rays of the sun (for the disease is gloom)) [*]
햇빛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이들은 건물을 지을 때도 최대한 햇빛을 많이 받게끔 설계했다. 우리가 아는 ‘일조권’은 이미 로마 시대에도 있었는데, 덕분에 사람들은 집에 햇빛이 드는 것을 권리로 보장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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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해가 떴는지 확인한다. 블라인드 사이로 햇빛이 새어 들어오는 것을 보니 오늘은 다행히 맑은 날이다. 눈을 떴을 때 아직도 밤인 듯 어두컴컴한 방안을 마주하는 아침이면 하루를 시작하기도 전부터 힘이 빠진다. 그렇다. 나는 날씨에 따라, 정확히는 햇살에 따라 그날의 기분이 좌우되는 사람이다. 일조량에 의존적인 나라서 한국에 태어난 걸 다행으로 여길 때가 많다. 영국처럼 맑은 날보다 흐린 날이 흔한 나라에 태어났다면 침울한 기분을 고질적인 기질로 오해하며 살았을 테니 말이다.
일조량에 따라 기분이 왔다 갔다 하는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건 예민하고 감정 기복이 심한 스스로에게 평생을 적응하며 살아야 함을 뜻한다. 삶에서나 감정에서나 기복은 환영받는 일이 거의 없다. 숨겨야 하는 감정이 많아서 외로웠다. 비단 햇살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모든 집이 그렇듯 우리 집에도 남들에게 설명하기 힘든, 해결하기는 더 힘든 일들이 있었다. 어쨌든 나는 내가 어린애답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어린애가 어린애답지 않은 게 흠이라는 것도.
유일하게 좋은 점이라면 무상하게 변하는 자연의 모습을 민감하게 알아채는 어린애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사파이어 블루에서 보라색으로, 그러다 어느 순간 느닷없이 투명하게 환해지는 동틀 녘 하늘.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함께 멀리서 어른거리는 오월의 온기. 여름을 예고하는 유월 저녁의 기분 좋은 눅진함. 가을바람에 낙엽이 회오리를 일으키며 몰려다니는 광경. 겨울 햇살에 눈이 녹는 소리. 이 모든 덧없는 사실을 남몰래 알게 되는 기쁨.
그중에서도 유독 햇살에 마음을 빼앗겼다. 시간과 장소에 따라 섬세하게 색과 질감을 달리하는 햇살의 모습이 나를 매료시켰다. 햇살은 나에게 가장 매력적인 피사체였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교복도 갈아입지 않고 카메라부터 찾았다. 엄마, 아빠 몰래 장롱 깊숙이 숨겨진 카메라를 꺼낼 때면 가슴이 두근거렸다.
햇살은 텅 빈 집 여기저기를 조용히 파고들었다. 부엌 창틀에 아늑하게 등을 기댄 햇살은 유리컵 가장자리에 닿아 투명하게 두꺼워지고 낮은 자세로 바닥을 밀고 들어와 어둠 속 먼지를 부드럽게 흔들어 깨웠다. 집 바깥에는 조금 더 동적인 햇살의 모습이 있었다. 들락날락하며 풀밭 위로 치마폭을 일렁이는 햇살. 노란 모래와 함께 일순간 반짝이는 햇살. 아파트 담장을 따라 심어진 나무가 거센 바람에 흔들릴 때면 잎사귀 아래로 햇살의 그물이 요동쳤다.
종종 나 자신을 찍기도 했다. 콧잔등을 넘지 못한 햇살이 만들어낸 그늘과 속눈썹 사이로 비쳐 들어와 부서지는 빛의 가루. 햇살 아래 여지없이 드러나는 피부의 결, 미세한 주름, 솜털 같은 것. 나도 미처 몰랐던 내 모습이 있었다. 햇살 속에서, 햇살을 찍으면서 무언가를 자세히 보는 법을 배웠다. 또 외로운 시간을 견디는 법, 혼자가 되는 법을 배웠다. 어쩌면 다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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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섯 살에 처음 요가를 접했다. 요가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었을 때였다. 무작정 요가 학원에 다니고 싶다고 했을 때 나도 부모님도 그게 어떤 운동인지 정확히 몰랐다.
운동을 하러 갔는데 숨 쉬는 법부터 배워야 했다. 공기를 들이마시면서 흉곽을 풍선처럼 부풀렸다. 코로 천천히 뱉으면서 갈비뼈를 조이는 느낌으로 몸통을 납작하게 만들었다. 들숨과 날숨에 집중하며 느리게 시작한 호흡은 점차로 빨라졌고 더 이상 빨라질 수 없을 때 하-아! 하는 소리와 함께 끝났다. 한번은 선생님이 묵직한 놋그릇과 나무 막대를 들고 오셨다. 나무 막대가 놋그릇을 칠 때마다 묵직한 쇳소리가 공간을 감돌았다. 우리는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다 같이 소리 내어 ‘옴-’ 했다.
“자신이 나무가 되었다고 상상해봅니다. 땅속 깊이 뿌리를 내려 흔들리지 않습니다. 위로는 하늘에 닿을 듯이 높이 뻗어 있습니다.”
요가를 하며 나 아닌 것들이 되었다. 나무, 비둘기, 나비, 태초의 인간이나 용맹한 전사, 뱃속의 태아가 되었다. 땅과 연결되고 하늘에 닿았다. 어둠에 잠기고 바람에 흔들리며 무럭무럭 자랐다. 눈을 감으면 나는 더 큰 테두리 안에서 절대로 혼자일 수 없었다. 태양과 흙, 바람과 물이 나를 기르고 보살폈다. 새와 물고기, 나무와 고양이가 내 형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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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가에는 동작마다 이름이 있는데 그 연원이나 자세의 형태적인 특징에 따라 자연 만물의 이름을 차용하는 경우가 많다. 고양이가 기지개 켜는 모습과 비슷한 고양이 자세는 요가를 잘 모르는 사람에게도 친숙한 단어다. 태양의 이름을 딴 자세도 있다. 수리야 나마스카라Surya Namaskar는 인도의 태양신을 뜻하는 Surya와 인사 또는 경배를 뜻하는 Namaskar가 합쳐진 단어로 우리말로 번역하면 태양경배자세다. 다소 생소하게 들리겠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자세다.
두 발을 모으고 바로 서서 합장한 손을 머리 위로 쭉 뻗는다(ㅣ). 가슴이 무릎에 닿도록 몸을 반으로 접어 두 손으로 바닥을 짚는다(∩). 한 발씩 뒤로 보내 몸을 시옷(ㅅ)으로 만들었다가 플랭크 자세(ㅡ)로 바닥에 몸을 최대한 낮춘다. 하체는 그대로 바닥에 붙인 채 팔을 쭉 펴서 상체만 들어 올린다(⦦). 다시 한 발씩 앞으로 가져와 몸을 반으로 접었다가(∩) 머리 위로 합장한다(ㅣ).
크게 보자면 서서 합장한 후 바닥으로 엎드렸다가 다시 일어서는 동작인데 마치 태양을 향해 절을 하는 모습 같다. 환한 햇살 아래 태양에 경배를 드리는 고대인을 상상해본다. 모든 생명의 근원인 태양에 경의를 표하고 자신 안에 깃든 생명력을 흠뻑 감각하는 모습. 동작의 처음과 끝이 같다는 특징 덕분에 연결해서 반복하면 부드러운 등허리와 너그러운 마음을 가질 수 있다. 중요한 하루의 시작에 의식처럼 행한다. 가령 사랑하는 이를 만나는 날 혹은 글을 쓰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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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 생화학 수업에서 비타민에 대해 배운 적이 있다. 생명을 뜻하는 라틴어 vita에서 출발한 비타민Vitamin은 생명을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하지만, 체내에서 만들어 낼 수 없어서 외부로부터 섭취해야 하는 물질이다.
비타민 D는 이 정의를 비껴가는 비타민으로 유명하다. 충분한 햇빛을 쬐기만 하면 우리 몸은 스스로 비타민 D를 만들 수 있다. 비타민 D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관여하지 않는 곳이 없지만, 특히 면역과 직결된다. 어느 정도냐 하면, 면역세포에 비타민 D만을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전용 안테나(생물학 용어로 수용체Receptor)가 따로 있을 정도다. 즉 햇볕을 쬐지 않으면 면역력이 떨어진다. 모든 질병의 시작이다. 실제로 비타민 D의 투여만으로 다양한 자가면역질환의 개선을 기대할 수 있다. 모든 인간은 생래적으로 햇살 의존적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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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신화에서 현대 의학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몸과 마음이 햇살과 결부되어 있다는 사실은 자연과의 연결고리를 잃어버린 우리 세대에게 낯설게 들린다. 드물지만 가끔 그 관계를 회복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사진을 찍거나 요가를 할 때. 또는 읽고 쓸 때.
읽고 쓰는 일의 아름다움은 나약함을 인정하는 과정에 있다. 내가 얼마나 다른 모든 것들에 의존하고 있는지 깨닫고 단독자로서의 내가 아니라 의존자로서의 나를 의식하는 과정이다. 신기하게도 나약함은 숨길 때는 나약함일 뿐이지만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나면 힘이 된다. 무언가를 억누르고 제압하는 힘이 아니라 나와 너를 일으키고 끌어안는 부드러운 힘이다. 이길 때만 이기는 것이 아니라 지면서도 이길 수 있음을 아는 지혜다.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비타민 D의 또 다른 이름은 Sunshine-Vitamin이라고 한다. 햇빛을 받아야 생성되는 비타민, 햇빛에 의존하는 비타민이라서 붙은 별명이다.
내 이름 두 글자 앞에도 내가 의존하고 있는 것, 나 아닌 것과의 연결고리가 붙어있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성(姓). 물려받지 못한 어머니의 성. 그 외에 햇살, 바람, 흙, 물처럼 인간 모두가 누락하고 있는 공통의 성. 새와 물고기, 나무와 고양이와 공유하고 있는 우리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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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먼 도이지 지음, 장호연 옮김, <스스로 치유하는 뇌> (동아시아, 2018)
Norman Doidge, <The Brain’s Way of Healing> (Penguin Books,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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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on Kreitzman, Russell Foster, <Seasons of Life> (Profile Books, 2009)
Steve Jones, <Here Comes the Sun> (Little, Brown, 2019) [본문으로]
‘우울이라 쓰지 않고’는 [월간소묘 : 레터]에 2020년 2월부터 10월까지 연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