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책장으로부터
신유진 작가님의 <엄마의 책장으로부터> 연재를 시작합니다. 엄마의 책 속에서 만난 언어, “가장 연약한 순간에 가장 용감하게 나아갔던 사람에게 배운 언어”에서 시작된, 혹은 그곳으로 향하는 “하나밖에 없는 오솔길”을 걸어요. 이번 글은 그 길을 향해 문을 여는 서막이고요. 뒤따라 걷다 보면 또 다른 제 건넌방도 만날 수 있을까요? 그런 희망 품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엄마의 책장으로부터] 오렌지빛 하늘 아래 당신의 손을 잡고
—하이틴 소설을 사랑한 여자아이가 중요한 무언가를 잊어버린, 잃어버린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글: 신유진 여름 저녁에는 엄마랑 자두 한 알을 손에 쥐고 서점까지 걸었다. 동네서점은 사계절 내내 자주 다니던 곳이었는데, 그 길을 생각하면 유독 여름 풍경이 떠오른다. 일몰 때문이었을까. 걷다가 하늘을 올려다보면 온통 오렌지빛이었다. 그걸 보면 엄마는 마음이 이상하다고 했다. 마음이 이상한 것은 기쁘다는 뜻일까, 슬프다는 뜻일까. 좋다는 걸까, 싫다는 걸까. 나는 엄마가 자주 쓰던 그 말을 완벽하게 해독하기 위해 애썼다. ...
[엄마의 책장으로부터] 내가 집이 된 것만 같을 때
글: 신유진 집에 있을 때면 떠올리는 글*이 있다. 빨래를 개면서, 음식을 만들면서, 반려인과 반려견이 지나간 흔적을 정리하면서 ‘유토피아는 바로 여자가 짓는 집이고, 여자는 가족 구성원들이 행복 자체보다 행복의 탐색에 더 관심을 갖도록 하려는 시도를 참지 못한다’는 내용을 곱씹는다. ‘유토피아를 짓고 있는가?’ 집안일을 할 때는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한다. 내가 아는 여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나는 어릴 때, 여자들은 모두 약간의 광기를 숨기고 있다고 생각했다. 여자들이 가끔 허공에 내뱉었던 혼잣말 때문이다. 나는 집을 무대로 ...
[엄마의 책장으로부터] “다 그리고 싶어” -사랑을 연습한 시간
글: 신유진 엄마는 화집을 모았다. 우리는 종종 책장을 채운 화집을 꺼내 보면서 가장 좋아하는 그림과 화가를 꼽아보곤 했다. 두 사람의 취향이 비슷했던 때도 있었고, 너무 달라서 서로를 이해할 수 없었던 시간도 있었다. 파리에서 살던 시절에 헌책방에서 화집을 발견하면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엄마와 함께 봤던 그림을 다시 보는 반가움 또는 향수 때문이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엄마가 알려줬던 그림의 제목과 프랑스어 제목을 비교해 보는 일이 작은 즐거움이었다. 어쩌면 나의 언어는 엄마가 쥐여준 것과 내가 발견한 것 사이에서 자랐는지도 ...
[엄마의 책장으로부터]사납게 써 내려간 글자들
글: 신유진 소바주sauvage, ‘야생의, 거친’이란 뜻을 담은 이 단어는 여전히 남성성을 상징할까? 티브이를 보다가 조니 뎁과 눈이 마주친 순간 궁금해졌다. 사막에서 조니 뎁이 기타를 거칠게 연주하자 늑대들이 깨어난다. 늑대들은 조니 뎁과 나란히 걷는다. 남성용 향수, 소바주 광고의 한 장면이다. 소바주의 향기란 뭘까? 늑대 냄새? 남자 냄새? 내게는 어려운 클리셰다. 나의 소바주에는 조니 뎁과 늑대가 없다. 내게 행운처럼 찾아왔던 몇 권의 책들이 남긴 위업이다. 클리셰를 거부하기, 클리셰에 질문하기, 클리셰를 지우기. 지운 ...
[엄마의 책장으로부터] 별거 아닌 것들의 별것
글: 신유진 겨울에는 옛날 집을 생각한다. 겨울을 나는 일이 혹독한 주택이었는데, 그곳을 이야기할 때면 자꾸 따뜻한 것들만 말하게 된다. 식탁 위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던 음식, 등을 대고 누우면 기분이 좋았던 온돌바닥, 티브이 앞에 편안한 자세로 앉아서 과일을 먹던 어른들, 두껍고 포근한 이불. 어디까지 사실인지 어디서부터 조작된 기억인지 헷갈린다. 나는 과거를 글로 옮기며 각색하니까. 각색의 방법은 간단하다. 있었던 일, 내가 중요하다고 여기거나 아름답거나 의미 있다고 믿는 한 단면만을 옮기는 것이다. 그 단면을 제외하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