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신유진

 

눈이 왔다. 이른 아침에 하얗게 눈 덮인 동네를 산책하다가 새끼를 낳은 개를 봤다. 빈집에서 어미 개가 새끼 강아지들을 품고 있었다. 유기견 센터에 신고는 하지 않았고(보호소에 데려다줬던 강아지가 안락사 대상이 된 이후로 절대 신고하지 않는다), 대신 어미 개가 누운 곳에 반려견이 먹던 사료를 놓아뒀다. 어미 개는 새끼들을 두고 혼자 나와 밥을 먹었고,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자리를 떴다. 한참을 걷다가 뒤돌아보니 그 개가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배웅인 듯했다.

오전에 엄마를 만나서 아침에 있었던 일을 말했더니 엄마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수건과 담요, 물그릇과 사료 그릇을 챙겼다.

“뭐 하고 있어, 가자!”

엄마는 새끼를 낳은 동물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엄마는 늘 모든 것을 본능적으로 안다.

엄마를 차에 태우면서 물었다.

“내가 운전해도 괜찮겠어?”

비장한 표정의 엄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눈 내린 날에 십 년째 초보인 내 차를 타는 게 겁 많은 엄마에게는 목숨을 거는 일이었지만, 돌봐야 할 대상이 나타나면 엄마는 앞뒤를 가리지 않는다. 나와 동생을 키울 때도 그랬다.

엄마를 태우고 천천히 달리는 동안 내가 봤던 어미 개의 표정을 이야기했다. 그 개에게는 어떤 위엄이 있었고, 엄마는 그게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엄마의 얼굴에 막 출산한 여자의 고통과 두려움과 환희가 몇 초 동안 스쳐 지나갔고, 나는 그 표정을 관찰했다. 나는 출산을 텍스트처럼 바라본다. 관찰하고, 곱씹고, 단어의 위치를 뒤바꿔 보듯 의미를 뒤집고 되짚어 본다. 그것은 아이를 갖고 싶다는 열망이나 아이를 갖지 못했다는 절망과는 다르다. 여성으로서 내가 경험하지 못한 세계의 문을 닫고 싶지 않다면 설명이 될까. 혼자 사는 여성의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살아보지 않은 여성의 삶을 타자를 통해 만나고, 간접적으로 경험하며 이해하고 싶다. 나는 그것이 내가 가진 여성성을 완전하게 살아보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마을의 진입로가 공사 때문에 막혔다. 엄마는 운전에 서툰 나를 안심시키려고 ‘천천히 가면 된다’고 몇 번이나 말했지만, 우리는 둘 다 잘 모르는 길로 차를 돌려야 하는 두려움에, 나는 핸들을 엄마는 안전벨트를 꽉 움켜줬다. 우리는 나뭇가지가 어지럽게 엉킨 샛길을 기어가듯 달렸고, 둘 다 서로를 안심시키기 위해 애썼다. 집 앞 골목이 보이자 그제야 엄마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겁 많은 사람이 어떻게 엄마로 사는지 몰라.”

내 말에 엄마가 웃었다.

“엄마가 되는 건 곰이 마늘을 먹고 사람이 되는 것처럼 조금 비현실적인 부분이 있어.”

엄마는 내 말에 더 크게 웃었다.

어릴 때는 사람의 몸에서 다른 생명이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는데(여전히 그 일은 내게 비현실적이다), 이제는 출산과 함께 여성의 몸에서 본능적으로 자라는 이타심이 훨씬 더 신비하게 느껴진다. 데리언 니 그리파는 “여성의 몸은 스스로에게서 무언가를 훔치는 행위를 통해 또 다른 몸에 봉사한다.”*라고 말했고, 내게는 그 말이 위대하고 대단하나 나를 겁먹게 하는 신화처럼 들린다. 내가 그런 것을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알면 엄마는 이렇게 말하겠지.

“그게 뭐가 무서워? 백 번이고 주지. 다 줄 수 있지.”

“뭘 줄 건데?”

나는 물을 테고,

“시간, 돈, 체력, 마음, 엄마가 가진 것 전부!”

엄마는 답할 것이다.

어머니들은 그렇게 가진 것을 다 비워내며 신화적 존재가 되는 걸까.

 

에스테파니아 브라보, 《눈의 시》에서

 

우리는 집 앞에 차를 두고, 엄마가 준비한 것들을 들고 마을을 걸었다. 눈으로 뒤덮인 논밭이 포근해 보였고, 햇볕도 제법 따뜻했다. 빈집 앞에서 엄마는 “세상에, 세상에”를 외치며 개를 끌어안을 기세로 달려갔다. 나는 몇 번이나 조심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엄마는 내게 어미는 본능적으로 해를 끼치는 사람과 아닌 사람을 알아챈다고 했다.

엄마가 밥과 물로 어미 개를 불러낸 사이에 나는 담요와 수건을 깔았다. 가죽과 뼈만 남은 어미 개가 지친 눈빛으로 물을 허겁지겁 마시는 동안 새끼들은 좁은 구석으로 숨었다.

“어미는 잘 먹어야 해. 새끼들을 생각해서라도 먹어야지. 네가 잘 지내야 새끼들도 잘 지낸단다.”

엄마는 그 개에게 말했다.

“엄마는 채워야 해. 채워야 줄 수 있어.”

엄마는 내게 말했다.

“모성은 다 비우는 건 줄 알았지.”

“너 전혜린이 쓴 책을 읽고도 몰라? 전혜린이 딸을 낳고 자기 이야기 아니라 딸 이야기를 쓰잖아. 그래도 그 글은 여전히 전혜린이야. 딸 낳은 전혜린의 글.”

엄마가 말했다.

 

집에 돌아와 엄마가 내 집의 마당에서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동안 전혜린의 책을 찾아 펼쳤다. 《그리고 아무 말도 없었다》의 〈자라나는 숲〉은 전혜린이 딸, 정화를 낳고 쓴 글을 담은 챕터다. 그 글들은 대부분 ‘오늘 정화가, 오늘 정화는’으로 시작된다. 자기 고백적 글을 쓰는 작가의 주어가 일인칭에서 삼인칭으로 바뀌는 것은 스타일의 변화를 넘어서 세계의 확장과 ‘나’ 안에 타인을 포함하는 더 넓은 사랑을 의미하는 것일 테다. 전혜린의 쓸쓸한 문체를 좋아하지만, 바지를 혐오하고 치마를 좋아하는 정화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는 정화가 아니라 그런 정화를 바라보는 전혜린을 볼 수 있었다. 놀아달라는 아이의 말에 갈등하면서도 ‘자기의 생이 텅 빈’ 어머니의 삶을 용납할 수 없는, ‘가장 풍부한 개인적 생활을 가진 여자만이 아이로부터 가장 적은 요구를 한다’고 말하는 전혜린은 출산과 함께 어느새 한 인간의 깊은 고독과 동시에 한 여성이 직업과 양육 사이에서 살아가기 위해 사회가 마련해야 하는 설비와 노력과 연구를 요구할 줄 아는, 개인적이면서도 사회적인 이야기를 건네는 작가가 되어 있었다. 전혜린의 이런 변모는 어쩌면 데리언 니 그리파가 말하는 또 다른 몸에 봉사하는, 즉 이타성을 통한 성장이 아닐까.

그렇다면 출산의 경험이 없는 여성의 이타성은 무엇을 통해 발현되어야 할까? 또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우리가 가진 여성성을 성장시킬 수 있을까? 나는 그 질문의 답이 혈연 또는 종을 넘어선 관계에서 주고받는 돌봄에 있으리라 믿는다. 여성이 아이를 진정으로 사랑하기 위해 돌봄을 통해 자신의 모성을 끊임없이 고찰하고 통찰하듯이, 내가 속한 세계를 사랑하기 위해서 나는 세계를 돌보며 그 사랑을 고찰하고 통찰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돌봄은 나를 성장시키고, 내 이야기의 주어를 확장시킨다. 주어를 확장하고 싶다. 이야기뿐만이 아니라 내 삶 속에서도.

어미 개의 보금자리를 만들어주면서 조금 다른 이야기를 떠올렸다. 매일 아침 산책하는 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매일 아침 산책하는 인간을 바라보는 어미 개의 이야기. 나는 그 이야기가 어미 개가 마땅히 받아야 할 돌봄을 요구하고 또 받는 것으로 끝나면 좋겠다. 위엄 있는 눈빛으로 “당신은 나를 돌봐야 합니다. 나는 생명을 돌보고 있으니까요. 생명을 돌보는 일은 존엄하니까요.”라고 말하는 것으로.

눈이 다시 한두 송이 내린다. 창 너머로 엄마가 나를 바라본다. 오랜 시간 생명을 돌본 존재의 위엄 있는 눈빛으로.

 

*데리언 니 그리파, 《목구멍 속의 유령》, 을유문화사.

 

─✲─

 

신유진

엄마의 책장 앞을 서성이고, 파리의 오래된 극장을 돌아다니며 언어를 배우고 이야기를 꿈꿨다. 산문집 <창문 너머 어렴풋이>, <몽카페>, <열다섯 번의 낮>과 <열다섯 번의 밤>을 썼고, 아니 에르노의 <세월>, <진정한 장소>를 비롯한 여러 책을 옮겼다.

@malletshin_

 

 

 

 

‘엄마의 책장으로부터’는 [월간소묘 : 레터]에 연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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