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신유진

 

이야기는 건넌방에서 시작됐다. 작은 창으로 세상이 손바닥만 하게 보이던 방, 그 건넌방에 스물세 살의 여자와 아기가 있었다.

여자는 몇 날 며칠 잠을 자지 않았다. 누운 아기를 보면 무서운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잠든 사이,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 밥을 먹는 사이, 여자는 아기가 갑자기 숨을 쉬지 않을까 봐, 작은 몸이 부서질까 봐 두려웠다.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출산을 죄책감이라고 했다. 출산은 아기를 놓아버리는 것이며, 태어난 생명의 첫 표명은 고통이라고 말했다. 여자는 뒤라스의 말에 공감했다. 실제로 출산 후 여자가 느꼈던 감정은 행복이나 충만함이 아닌 두려움과 불안이었으니까. 위태로운 생명과 아직은 사랑이라 부를 수 없는 낯선 감정, 두 사람의 감옥이 될 것만 같은 건넌방이 때때로 여자를 숨 막히게 했다. 그러나 여자는 그 불안과 두려움으로부터 아기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 번도 학습해 본 적 없는 감정이, 본능이 여자를 사로잡았다. 여자는 밤새 아기를 지켰다. 졸음이 밀려올 때나 아기가 자지러지게 울 때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여자는 어릴 때부터 이야기를 좋아했다. 이야기는 멀리 가니까. 건넌방에서 여자의 발이 닿을 수 없는 곳까지, 천년 전부터 천년 후까지. 여자는 천일야화의 셰에라자드가 그랬던 것처럼 이야기로 불안과 두려움을 몰아냈다. 여자의 이야기 속에는 여자가 자란 고장의 높은 산과 그 산 너머에 있다는 바다, 무서웠던 아버지와 순종적인 어머니, 여자가 탈출하고 싶었던 가부장적 세계, 그곳으로부터 달아나 도달한 지금의 건넌방이 있었다.

여자의 이야기는 오래 계속됐다. ‘나’로 시작했던 문장이 ‘엄마’가 되고, 다시 ‘나의 딸’로 주어가 바뀔 때까지. 아기가 자라 건넌방을 떠날 때까지.

 

나는 그 건넌방에서 자랐다. 그곳을 생각하면 늦여름 무더위에 땀방울이 맺힌 여자의 이마와 실핏줄이 터진 붉은 눈, 턱까지 내려오던 머리카락이 떠오른다. 내가 지각한 최초의 상像이자 여자의 말이 나의 기억에 심어놓은 상像이다.

아기는 음소 지각 능력을 갖추고 태어나 생후 6개월 되면 수백 개의 음소 중에 모어에 쓰이는 음소를 구별하고 익힌다고 한다. 그때 그 건넌방에서 내가 익혔던 음소는 무엇이었을까. 백지를 마주할 때면 그곳을 생각한다. 창 너머로 희미하게 들렸던 먼 세계의 움직임과 여자의 부채가 일으켰던 작은 바람과 과거와 미래, 기억과 예언을 엮어 만든 이야기로 멀리 나아갔던 셰에라자드의 목소리, 나의 모어의 심층, 건넌방. 이야기는 거기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내가 모어를 자각하게 된 것은 글을 쓰면서부터다. 그전까지 내게 언어는 모국어와 외국어가 전부였다. 가정과 학교에서 배웠고,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발전시킨 모국어는 내게 집단적, 사회적 언어이고, 내가 선택했고 수용하기로 결심한 외국어는 의식적이면서 효율적인 언어다. 모국어가 내게 소속감과 안정감을 준다면, 불어의 불안정함은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나를 발견하게 해준다. 스물한 살에 프랑스로 떠났고, 프랑스인과 가정을 이루면서 20년째 불어로 생활하고 있지만, 불어는 여전히 의식해야 말할 수 있는 언어이고, 불어로 말할 때만큼은 에둘러 말하거나 모호한 표현을 쓰지 않는다. 그런 언어 습관은 자칫 오해를 낳고, 그것이 나의 외국어 능력의 한계로 치부될 수 있기 때문이다. 외국어를 습득하면서 언어에 따라 사고 체계가 달라짐을 경험했다. 모국어를 쓰는 나는 공동체의 가치와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고, 불어를 쓰는 나는 직선적이고 합리적이다. 그렇다면 모어 안에서 나는 어떻게 존재할까?

모어는 나를 질문하게 하고, 창조적으로 사고하게 한다. 나는 그 언어로 세계를 이해하고 감각하며, 읽고 쓰고 옮긴다. 그것이 층이 가장 깊은 언어이자, 가장 연약한 순간에 가장 용감하게 나아갔던 사람에게 배운 언어, 건넌방에서 먼 곳의 진실까지 나아가는 언어이기 때문이다. 내가 모어라 부르는 이 언어를 올가 토카르추크는 개인적 언어라고 불렀다. 그는 집단적 언어가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한 도로”라면, 개인적 언어는 “하나밖에 없는 오솔길”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내게 그 오솔길의 시작은 건넌방이 아닐는지.

 

조앤 어들리, <들판을 가로지르는 오솔길>, 1948-1949.

 

오솔길을 함께 걸어볼까. 건넌방부터 대문을 열고 멀리까지 가볼까. 모어의 가장 오래된 층을 향해 한 칸씩 내려가다 보면 당신과 나눌 이야기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야기란 타자를 초대하는 장소이고, 좋은 이야기는 끊임없이 주어를 확장하며 나아간다는 것을 건넌방에서 배웠으니까. 그러니 내가 이 길에 당신을 초대하고, 당신이 기꺼이 함께 걸어준다면, 서로의 이야기가 만나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새로운 풍경이 펼쳐질 것 같다. 나의 모어는 그렇게 멀리, 깊이 가보는 꿈을 꾼다. 오래전 건넌방에서 여자가 나에게 심어준 꿈이다.

 

모어의 오솔길에는 엄마와 딸, 두 여자의 내밀한 기억과 여성으로서의 경험, 또 삶에 영감을 준 만남들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여정을 통해 거짓과 꾸밈이 없는, 침묵이 필요한 자리에는 침묵을, 목소리를 내야 할 곳에는 목소리를 내는 언어를 배우고자 한다. 그렇게 가다 보면 이 길 끝에 또 다른 건넌방이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막 태어난 아기처럼 수백, 수만 개의 음소들 중에 자어自語가 될 소리를 새로 구별하고 익힐 수 있는 곳 말이다. 그곳에 모어를 넘어선, 나만의 고유한 언어가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는다. 모든 이야기는 희망 없이 나아갈 수 없으니까. 오래전 건넌방에서 여자가 나에게 들려준 말이다.

 

─✲─

 

신유진

엄마의 책장 앞을 서성이고, 파리의 오래된 극장을 돌아다니며 언어를 배우고 이야기를 꿈꿨다. 산문집 <창문 너머 어렴풋이>, <몽카페>, <열다섯 번의 낮>과 <열다섯 번의 밤>을 썼고, 아니 에르노의 <세월>, <진정한 장소>를 비롯한 여러 책을 옮겼다.

@malletshin_

 

 

 

 

‘엄마의 책장으로부터’는 [월간소묘 : 레터]에 연재되고 있습니다.

구독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