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정한샘

 

상실을 겪고 있는 친구에게 선물할 책을 추천해 달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내가 어떤 책을 권했더라. 기억이 나지 않는다. 뭘 안다고. 누군가를 잃고 살아가는 일에 대해 대체 뭘 안다고 책을 골라 추천했을까. 그때와 지금은 모든 것이 달라졌다. 그 마음을 짐작만 하던 때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 아픔을 감히 모르고 책을 고르던 때로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죽음으로 인한 이별을 늘 생각하며 살았다. 아니, 그런 줄 알았다. 이별이 찾아온다면 스페인의 시인인 안토니오 갈라의 시처럼 ‘다 끝났다’고 말하는 대신 ‘다시 시작하자’라고 말해보겠다고 쓴 적도 있다. 상상해 보는 죽음의 대상은 나 자신인 때가 가장 많았고 점차 나와 가장 가깝다고 생각하는 존재들로 옮겨 가곤 했다. 마치 진짜처럼 느껴져 고통을 느낀 적도 있다. 그러나 그 이후를 생각해 보았던가. 다시 시작하자고 말해보겠다니, 정말이지 아무것도 모르고 쓴 글이었다. 그 끝이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라면 남겨진 영혼은 절대 웃을 수 없다.*

 

가까운 사람의 죽음 이후의 삶.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바로 지금 살아내고 있다. 무언가를 깊이 생각할 수 없고 읽을 수도 없다. 읽을 수 없으므로 쓰기를 멈춘다. 병과 죽음, 남겨짐과 애도를 빼고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는 인간이 되어버린 것만 같다. 아주 사소한 기억들이 갑자기 몸을 부풀리는 순간이 있다. 주로 후회로 연결되는 기억들이다. 알았다면 하지 않았을 결정들이 새록새록 떠오르면 그냥 운다. 엄마의 눈을 보면 많이 울어 진물이 난다는 것이 어떤 상태를 말하는 건지 알 수 있다. 이 삶은 도착하기 전에는 몰랐던 삶이다. 이곳은 너무 낯설고, 낯선 만큼 비현실적이고, 그래서 꿈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나 자신을 원망하는 마음을 끌어안고 내가 도착한 장소는 슬프고 서러운 곳, 비애의 공간이다.

 

“비애는 그곳에 다다르기 전에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장소였다. 우리는 가까운 사람이 죽을 수 있다는 걸 예상하지만 (알지만), 상상한 죽음 직후 며칠이나 몇 주가 지난 다음의 삶이 어떠할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그 며칠이나 몇 주도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다.”**

 

절판된 이전 번역본으로 조앤 디디온의 <상실>을 읽었을 때 이 문장은 타인의 문장이었다. 그때의 나는 가까운 누군가의 죽음으로 인한 상실을 진심으로 느껴본 적은 없는 상태였기에 그저 읽었고, 공감하는 문장이 나오면 밑줄을 긋고 인덱스를 붙였다. 좋아하는 저널리스트가 상실을 겪고 쓴 완벽한 애도의 문학으로 읽은 것이다. 그러나 내가 겪은 상실 이후 새로 나온 번역본을 펼쳤을 때 이 문장은 더 이상 타인의 문장이 아니었다. 읽는 순간 무슨 뜻인지 정확하게 이해함과 동시에 몸으로 감각해 버린 비애의 공간. 나는 그냥 그 문장 안에 누워버렸다.

 

 

그렇게 한 문장 속으로 들어가 몸을 눕힌 순간 다시 읽고 싶다는 열망이 찾아왔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위로와 치유에 관한 글이 아니라 죽음과 질병에 관한 글, 내가 아프거나, 나와 가장 가까운 이가 아팠던 이야기를 읽고 또 읽는다. 돌봄의 주체가 된 이야기와 간병의 어려움을 적은 책들을 닥치는 대로 읽는다. 어떤 이야기는 죽음으로 끝나고 어떤 이야기는 삶으로 다시 돌아온다. 삶의 마지막과, 되찾은 삶의 사이에서 나는 종잡을 수 없는 마음을 지닌 인간이 된다. 내 일처럼 슬프고 내 일처럼 기쁘다가 분노가 일기도, 질투가 생기기도 한다. 그렇게 형편없어진 마음으로 뒹굴대다 보면 꾸역꾸역 하루가 살아진다. 책장 위에 세워둔 영정 사진 앞에 서서 이게 진짜냐고, 이렇게 갑자기, 한 사람이 사랑하는 이들의 세계에서 영영 사라져 버릴 수가 있는 거냐고 묻고 바로 돌아선다. 사라져 버린 이는 대답할 수 없기에.

 

‘코로나로 너희가 무너져 내렸을 때 마음이 너무 아팠어. 아무것도 도와주지 못한다는 게 너무 속상했어.’ 떠나기 전날 호흡기를 단 채 이 말을 하던 아빠는 ‘너무 속상했어’를 말할 때 뼈가 드러난 가슴을 탕탕 쳤다. ‘그런데 한샘이 네가 책방을 열고 그렇게 꾸리는 걸 보면서 와아 정말 대단하다, 대단하다 했지. 너무 기뻤어. 너무 기뻤어. 너무 기뻤어.’

‘기뻤다고요?’

‘그래, 기뻤어.’

말을 한 걸 잊은 것처럼 계속 반복한 말.

‘기뻤어. 기뻤어. 기뻤어.’

 

그리하여 나는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출근을 하기 시작했다. 기뻤다는 말이 비애의 공간에서 굴러다니던 나를 매일 아침 새롭게 일으킨다. 책을 고르고, 책을 보내고, 책을 채우고 비우는 일을 다시 한다. 마음을 살피는 이들의 사려 깊은 다정함도 덥석덥석 받는다. 그가 기뻤다고 했으므로, 그곳에서 나도 기쁘고자 한다.

 

나는 지금 작고 노란 책방 안에 나만의 애도의 벽을 느리게 쌓고 있다. 책 한 권이 벽돌 한 장이라 생각하며 쌓는다. 내가 읽는 책들이 쌓여 벽이 되면, 그때쯤 되면 슬픔과 서러움의 공간에서 천천히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당신의 목소리가 사라지는 동안>(유디트 바니스텐달 지음, 김주경 옮김, 바람북스)에서 재인용.

**조앤 디디온, <상실>, 홍한별 옮김, 책읽는 수요일.

 

─✲─

 

정한샘

2020년 7월 31일 가정식 책방 ‘리브레리아Q’를 열었다. 이탈리아에서 음악을 공부했고, 지금은 책과 함께하는 삶을 살고 있다. 딸과 나눈 책 편지 《세상의 질문 앞에 우리는 마주 앉아》를 썼고, 그림책 《구름의 나날》을 옮겼다.

_리브레리아Q @libreriaq

 

 

 

 

‘가정식 책방: 리브레리아Q 서점원 노트’는 [월간소묘 : 레터]에 연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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