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정한샘

 

서울에 나올 일이 많지는 않은데요, 기꺼이 게으른 발걸음을 옮기는 때가 있다면 오랜 친구를 만나 마음에 있는 짐을 모두 털어놓는 날입니다. 오늘이 바로 그날이고요. 지금 저는 친구가 자신을 기다리라고 지정해 준, 친구가 사는 동네에 있는 빵집에 앉아 작은 종이에 이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제 손에는 세 번째 읽는 11월의 책이 들려 있고요.)

 

이 빵집은 매일 8시에 그날 새벽에 준비한 빵을 진열해 두고 문을 연대요. 8시에 모든 준비를 마치려면 몇 시에 나와서 하루치의 빵을 준비하시는 걸까요. 제빵사는 해가 뜨기도 전에 새카만 공기를 밀어내며 출근하겠지요. 오븐에 열이 오르는 동안 가루를 덩어리로 만들며 제빵사는 어떤 생각을 할까요. 저는 몸을 움직이는 노동에 집중하면 아무 생각이 없어지던데 빵을 만드는 사람들도 그럴까요. 가루를 모아 부드럽고 말랑거리는 큰 덩어리로, 그 덩어리를 나누어 우리가 알고 있는 빵의 모양으로 만드는 과정을 반복하는 손길을 생각해 봅니다. 아주 이른 새벽, 매일 같은 시간에 누군가의 아침을 위한 일을 반복하는 것에 대해.

 

편지를 쓰며 갓 구워진 빵 향을 맡고 있자니, 따뜻한 바게트 하나 먹으면 좋겠다 싶네요. 빵은 꼭 자신이 사준다며 커피만 먹고 있으라 하기에 커피만 시켜두고 앉아 있거든요. 기온이 많이 떨어져 이제는 무조건 따뜻한 커피를 찾게 되는군요. 오늘은 약간 쌀쌀하지만 하늘이 맑고 볕도 있어 걷기에는 참 좋은 날인 듯해요. 사실 저는 걷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에요. 과거에 지겹도록 걸어야만 했던 시절이 있었고, 그 수년의 시간 동안 걸으며 만난 상황 중에는 떠올리면 여전히 움츠러들고 기분이 가라앉는 일들이 있거든요. 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말이에요. 게다가 한쪽 근육만 쓰며 적절한 운동을 병행하지 않았기에 서서히 휘어진 척추와, 삼십 대가 되기 직전 두 달간 누워 있어야 했던 병원 생활로 망가진 허리는 저를 걷기 싫어하는 사람에서 점차 걷지 못하는 사람으로 만들었지요. 조금씩 걸으면 치료가 되었겠으나 노력할 조금의 마음도 없었던 저입니다. 그런데 한 책에서 걷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문장을 만났습니다.

 

밑창이 얇은 신발을 신고, 계절에 따라 달아오르고 식는 땅을 발바닥으로 먼저 느꼈다.

_문이영, 《우울이라 쓰지 않고》, 오후의 소묘, 2022.

 

달아오르는 땅의 열기와 식어 차가워지는 서늘함을 발바닥으로 먼저 느끼는 기분을 저도 느껴보고 싶어졌어요. 나의 가장 아래에 있는 부분에서 느껴지는 살아있는 땅의 온도, 계절에 따라 바뀌는 그 온도의 변화를 느껴보고 싶다고 말이죠. 이제껏 계절의 변화를 냄새와 바람을 통해 느껴왔는데 발바닥으로 느끼는 변화는 어떻게 다를까. 내가 걸어온 걸음과는 매우 다를 것이 분명한, 땅의 변화를 느끼며 천천히 걷는 걸음이 궁금해졌어요. 누군가가 책을 통해 나누어 준 경험이 제게 자꾸 용기를 줘요. 그때와 지금은 다르니 걸어보라고, 너의 기억이 새로운 기억으로 채워질 거라고, 그러니 다만 나가서 걸어보라고 말이죠.

 

 

이번 달 편지에는 11월의 책 이야기는 안 하고 제 이야기만 실컷 했네요. 어떤 책은 많은 말을 얹기가 힘들어서요. 우리는 얼마나 쉽게 타인과 나를 구분 짓는지, 얼마나 쉽게 다름에 대해 말하고 표현하는지, 나쁜 의도가 아니었다는 말은 왜 핑계가 될 수 없는지, 모든 돌고래가 유리벽으로 막힌 공간이 아닌, 바다에서 헤엄치는 세상이 어서 와야 하는데….** 이런저런 생각이 꼬리를 물듯 이어지는 11월의 책이었습니다. 함께 읽는 분들의 이름을 떠올리며 다시 읽었어요.

 

혼자 읽던 책을 같이 읽어보자고 권하는 일은 많은 이를 스쳐 지나는 것이 싫어 걷는 것조차 꺼리던 딱딱하게 굳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손을 내미는 방식입니다.

그러니 어서 제 손 잡아요.

 

서점원Q 드림

 

*월간비밀Q로 2022년 11월의 비밀책과 함께 띄운 편지를 다듬었습니다.

**박주현, 《빛 뒤에 선 아이》, 우리나비, 2020.

 

─✲─

 

정한샘

2020년 7월 31일 가정식 책방 ‘리브레리아Q’를 열었다. 이탈리아에서 음악을 공부했고, 지금은 책과 함께하는 삶을 살고 있다. 딸과 나눈 책 편지 《세상의 질문 앞에 우리는 마주 앉아》를 썼고, 그림책 《구름의 나날》을 옮겼다.

_리브레리아Q @libreriaq

 

 

 

 

‘가정식 책방: 리브레리아Q 서점원 노트’는 [월간소묘 : 레터]에 연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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