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신유진

 

겨울에는 옛날 집을 생각한다. 겨울을 나는 일이 혹독한 주택이었는데, 그곳을 이야기할 때면 자꾸 따뜻한 것들만 말하게 된다. 식탁 위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던 음식, 등을 대고 누우면 기분이 좋았던 온돌바닥, 티브이 앞에 편안한 자세로 앉아서 과일을 먹던 어른들, 두껍고 포근한 이불. 어디까지 사실인지 어디서부터 조작된 기억인지 헷갈린다. 나는 과거를 글로 옮기며 각색하니까. 각색의 방법은 간단하다. 있었던 일, 내가 중요하다고 여기거나 아름답거나 의미 있다고 믿는 한 단면만을 옮기는 것이다. 그 단면을 제외하면 무엇이 남을까. 쓰는 삶을 살면서 내 안에서 자라는 질문이 있다. 내가 쓰지 않은 것, 보지 않은 것, 말하지 않은 것은 무엇일까? 나는 왜 그것들을 꺼내지 않는 것일까?

그렇다면 하찮은 이야기를 해보면 어떨까. 중요하지 않고, 딱히 아름답지 않고, 큰 의미도 없는 것부터. 거기에 무엇이, 누가 있는지를 바라보면 가려진 것을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진짜 의미는 거기에 있을 것이다.

당신에게 하찮은 것은 무엇인가? 여기, 내가 잘 아는 하찮은 이야기가 있다. 밥 이야기다.

스무 해 정도 엄마가 해준 밥을 먹고 사는 동안 내가 가장 많이 들었던 소리는 “그놈의 밥, 지겨운 밥”이었다. 엄마는 하루에 여섯 번씩 밥상을 차렸던 것 같다. 새벽에는 출근하는 사람의 밥을 챙기고 아침에는 등교하는 아이들, 시부모의 밥, 집에 있는 사람의 점심과 퇴근하고 돌아온 사람의 저녁. 엄마는 아침에는 점심을 점심에는 저녁을, 저녁에는 다음 날 아침을 걱정하면서 말했다.

“사람이 참 하찮은 것에 매달려 살아.”

하찮은 밥은 매일 엄마를 따라다녔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엄마의 꿈은 밥에서 해방된 삶을 사는 것이었다. 엄마는 밥을 먹을 때도 정말 하찮게 먹었다. 서서 대충 때우거나 잔반 처리가 엄마의 식사였다. 이 문장을 쓰는 순간, 내가 놓쳤던 장면 하나가 막 떠올랐다. 일곱 식구가 사는데 의자가 네 개뿐이었던 우리 집 식탁. 거기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던 음식 앞에 앉은 사람들 중에 엄마는 없었다. 엄마를 빼도 의자가 모자란 날에는 자연스레 내가 식탁을 떠났다. 그때마다 나는 밥과 국을 나르고 부엌을 어슬렁거리며 할 일이 없는지 살폈다. 누구도 가르쳐준 적 없었으나 내가 혼자 배운 것이었다. 눈치 빠른 내가 식탁에서 일어나 집안 여자들이 하던 일을 흉내 낼 때면 엄마는 말했다.

“여자들은 어쩔 수 없지.”

‘여자들은 어쩔 수 없지’라는 말로 시작하는 엄마의 가르침 중에는 월경 전에 단것이나 밀가루를 많이 먹지 않기, 공중화장실을 쓸 때 휴지를 깔고 앉기, 가슴이 파인 티셔츠나 짧은 하의처럼 ‘천박’하게 보이는 옷을 입지 않기 등이 있었다. 나는 대체로 그 가르침을 하찮게 여겼으나 그것들은 금세 내 삶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다. 한 번도 말한 적 없었지만, 사실 나는 그 하찮은 것들을 많이 생각한다. 단것이나 밀가루 음식을 좋아하지만 살찌는 게 싫고, 그게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은 더 싫었다. ‘천박’하지 않은 고상한 옷을 찾으려고 쇼핑몰을 뒤지면서도 ‘천박’하다는 말에 몸서리를 치고, 더러운 화장실이 싫어서 밖에 나가서는 물도 잘 안 마시면서 까다롭게 보이고 싶지 않아서 털털한 척했다. 엄마에게 배운 그 모든 하찮은 것들과 내가 넘어서고 싶은 어떤 한계가 충돌할 때마다 나는 점점 더 복잡한 인간이 되었다. 여자라서 어쩔 수 없이 배운 것들, 느끼는 것들, 조심해야 할 것들을 단번에 뛰어넘고 싶으면서도 누구보다 그 굴레에 갇혀 살았다. 더 아이러니한 것은 내가 나를 지배하는 이 하찮은 것들을 되도록 쓰지 않으려고 했다는 사실이다. 그런 이야기를 꺼냈다가 여성 작가의 신변잡기를 다룬 글이라는 소리를 듣게 될까 봐 두려웠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명징한 언어, 빛나는 사유이지 밥이나 월경, 옷, 화장실은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 내가 학교에서, 책 속에서 배운 모든 것들은 내게 가져본 적 없는 언어로, 품은 적 없는 사유를 말해야 한다고 말했고, 나는 조바심을 내며 그것들을 오래 기다렸다. 어째서 나의 삶은 이토록 하찮은 것들로 채워져 크고 의미 있는 것들을 말할 수 없을까. 그렇게 자신에게 물으면 먼 기억 속에서 찾아오는 목소리가 이렇게 말했다.

“여자들은 어쩔 수 없지.”

그런가?

따뜻한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 생각한다. 내가 등을 대고 누웠던 그 방은 할머니, 할아버지의 방, 나와 동생의 방이었고, 정작 엄마의 방은 서늘했던 사실이 이제야 생각났다. 아, 그러고 보면 나는 그 건넌방을 부모님의 방이 아닌 엄마의 방이라고 불렀다. 그 공간을 부지런히 쓸고 닦고 또 자신의 것들로 채운 것은 엄마였으니까. 엄마는 그곳에서 주로 밥과 싸웠다. 밥을 생각하지 않기 위해, 밥 아닌 무언가를 하기 위해. 엄마는 루이제 린저를 읽다가 책장을 넘기며 머리에 손을 짚고 말했다.

“아, 여자들은 어쩔 수 없지.” 그리고 이어지는 말.

“여자들은 그 어쩔 수 없는 것 때문에 자기 안에 중요한 뭔가를 만들지. 한 번은 반드시 그걸 바깥으로 꺼내야 하고.”

여자들이 반드시 꺼내봐야 하는 그것은 무엇일까. 밥 이야기일까, 밥과 싸우는 이야기일까. 아니면 밥이 없는 이야기일까. 나는 그게 궁금했다. 저마다 어쩔 수 없는 것에 대한 이야기 말이다.

온돌은 금세 잠들어 버려서 싫다고, 오롯이 주어진 그 밤이 그냥 사라지는 게 아깝다던 엄마는 서늘한 방에서 무언가를 읽고 썼다. 작은 스탠드의 노란 불빛과 밥이 아닌 다른 것에 허기진 여자가 있던 그 방, 그곳은 내가 기억하는 우리 집의 겨울과 동떨어진, 가장 황량하고 또 가장 뜨거웠던 곳이었다.

어쩌다 누군가 엄마에게 무슨 책을 읽고 있냐고 물으면 엄마는 이렇게 답했다.

“별거 아니에요.”

별거 아닌 소설책, 별거 아닌 시집, 별거 아닌 에세이. 엄마는 그런 것을 읽었다.

언젠가 집에 놀러 온 친척들 앞에서 별거 아니라며 책을 감추는 엄마에게 이렇게 물었던 적이 있다.

“엄마는 왜 맨날 별거 아니래?”

엄마는 말했다.

“따지고 보면 모든 이야기는 별거 아니야. 사는 게 별것이 아닌데, 당연하지. 그래도 나는 별거 아닌 것이 별것이 되기 위해 몸부림치는 그런 이야기가 좋더라. 별거 아닌 걸 말할 줄 아는 용기도.”

별거 아닌 것들의 별것을 향한 몸부림. 그 말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별거 아닌 것을 말할 줄 아는 용기도. 엄마의 그 말이 없었다면 나는 아무것도 쓰지 못했을 테니까.

 

프랜시스 호지킨스, 〈정물: 달걀, 토마토, 버섯〉, 1929.

 

오늘 저녁에는 무엇을 먹을까. 정확히는 무엇을 먹일까. 어느덧 엄마가 했던 고민을 내가 한다. 매일 마주해야 하는 모든 게 그렇듯이 밥은 내게도 하찮고 지겨운 일이지만, 나는 그것을 빼놓고 내 삶을 이야기할 수 없음을 안다. 나의 현실이니까. 그 현실을 글로 써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 묻는다면, 그것이 나라는 사람의 존재 방식이기 때문이라고 답하고 싶다. 하찮고 지겨운 일을 반복하며 별거 아닌 것들에 끊임없이 의미를 부여하면서 별것이 되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 그게 나의 삶이자 또 나의 글이기도 하다. 이건 여자라서 어쩔 수 없는 게 아니라, 내가 나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우리에게 주어진 그 어쩔 수 없는 것들이 우리를 말하게 하고, 나아가게 한다는 사실을 안다. 엄마가 ‘여자들은 어쩔 수 없지’라고 말할 때, 그 어쩔 수 없음이 엄마를 어디까지 나아가게 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당신의 어쩔 수 없음은 무엇인가? 거기에는 나와 다른 혹은 나와 닮은 어떤 진실이 숨어 있는가? 우리의 삶에서 하찮은 것부터 이야기해 보자. 너무 위대한 사유나 커다란 지혜를 찾아 멀리 헤매지 말고, 별거 아닌 그 소중한 것부터 시작해 보자. 당신과 내가 할 수 있는, 해야 하는 이야기는 분명 거기 있을 테니까.

 

─✲─

 

신유진

엄마의 책장 앞을 서성이고, 파리의 오래된 극장을 돌아다니며 언어를 배우고 이야기를 꿈꿨다. 산문집 <창문 너머 어렴풋이>, <몽카페>, <열다섯 번의 낮>과 <열다섯 번의 밤>을 썼고, 아니 에르노의 <세월>, <진정한 장소>를 비롯한 여러 책을 옮겼다.

@malletshin_

 

 

 

 

‘엄마의 책장으로부터’는 [월간소묘 : 레터]에 연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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