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신유진

 

“제가 원하는 것은 생명이 유동하는 것, 매일매일 변하는 것, 어떤 새로운 것, 습관적인 것인데! 미칠 듯한 순간, 세계와 자아가 합일되는 느낌을 주는 찰나, 충만한 가득 찬 순간 등 손에 영원히 안 잡히는 것들이 나의 갈망의 대상입니다.”*

 

전혜린의 편지다. 엄마의 책에도 내 책에도 이 구절에 밑줄이 그어져 있다. 우리는 각자의 장소에서 전혜린을 읽었다. 엄마는 건넌방 이불 속에서, 나는 파리의 다락방에서.

엄마가 전혜린의 책,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를 완독한 것은 1985년 3월 7일이다. 엄마는 다 읽은 책에 일기처럼 날짜를 기록해 두는 습관이 있었다. 한 권의 책을 읽으면 남이 대신 써준 일기에 마침표를 찍는 것 같다고 했다. 읽는 것만으로도 표출되는 무언가가 있다고 했다. 나는 엄마를 보며 어떤 여자들은 감탄과 깨달음의 ‘아!’가 아니라, 존재의 증명과 저항과 내면의 표출을 위해 ‘악!’ 소리를 내는 책을 읽는다는 것을 배웠다. 글자로 지르는 비명. 나는 엄마의 손에 들려 있던 전혜린의 책을 그렇게 기억한다. 어쩌면 전혜린의 존재앓이와 엄마의 그것을 혼동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책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을 무렵, 엄마의 책장에서 전혜린의 책을 꺼내 들고 물은 적이 있다.

“이 책도 우는 여자 이야기야?”

그때 내게 여성 작가들은 울거나 웅크리는 사람들이었고, 나는 그들의 자기 고백적인 글이 지나치게 개인적이고 감상적이라고 생각했다.

엄마는 내 질문의 의도를 파악했는지 빙긋 웃으면서 분명하게 답했다.

“아니야, 갈망하는 여자의 이야기야.”

갈망. 한 번도 써본 적 없는 그 단어가 내 안을 파고들었던 것은 눈앞에 없는 어떤 것을 갈망하는 엄마의 낯선 눈빛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무언가를 간절히 원한 적 없는 나의 안일함을 마주한 충격 때문이었을까. 그날 이후로 내가 전혜린의 책을 여러 번 펼쳐 봤다면 그것은 아마도 그가 갈망하는 것을 찾기 위해, 아니 내가 갈망할 대상을 찾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전혜린의 책을 다시 만난 것은 기록적 무더위가 연일 이어지던 어느 여름이었다. 엄마가 유학 중이던 나를 만나러 파리에 왔고, 엄마의 가방에는 고추장, 된장, 꽁꽁 싸맨 반찬과 함께 전혜린의 책 두 권이 들어 있었다. 우리는 낮 동안 땀에 흠뻑 젖어 파리의 관광지를 돌아다니며 싸우다가 집에 돌아와 찬물로 샤워를 하고 자매처럼 속옷 차림으로 침대에 나란히 누워 전혜린을 읽었다.

 

“담배 있어?”

열대야에 잠 못 이루던 어느 밤에 엄마가 물었다. 내가 아는 엄마는 한 번도 담배를 피운 적이 없었는데… 나는 가방에 숨겨둔 담배를 꺼내 엄마에게 건넸다. 엄마는 주방 창문에 몸을 기대고 담배를 피웠고, 나는 침대 옆 창문을 열고 내 담배에 불을 붙였다. 각자의 창에서 내뱉은 연기가 같은 방향으로 흘러가다가 살짝 부는 바람에 흩어졌다. 엄마는 자유로워진 것 같다고 했다. 거리를 향해 ‘악’ 하고 소리치면 시원할 것 같다고도 했다. 우리는 아주 조그맣게 ‘악’ 하고 속삭이다가 피식 웃었다. 엄마와 나는 목소리를 삼키는 데 더 익숙한 사람들이었으니까.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이상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기 위해, 싸우거나 요구하지 않기 위해, 가짜 침묵을 위해.

 

어설프게 담배를 피우던 엄마는 전혜린을 동경했다고 말했다. 전혜린의 긴 손가락에 들려 있던 담배와 스카프와 그의 광기 어린 눈빛을 닮고 싶었다고 했다. 전혜린처럼 사랑이든 고독이든 절망이든 끝까지 가보고 싶었다고, 엄마는, 그랬다고, 그렇게 말했다.

“눈앞에 보이는 게 끝이 아니라 그 너머에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만 갈망할 수 있는 것 같아. 나는 늘 눈앞에 보이는 것 그 앞에서 멈췄던 것 같고.”

사라진 꿈을 이야기하던 엄마는 달리는 사람처럼 숨 가빴고 뜨거웠다. 이덕희 작가가 전혜린을 떠올리며 썼던 ‘짜라투스트라’의 문장처럼 “가장 긴 사닥다리로써 가장 깊은 데를 내려갈 수 있는 영혼, 가장 멀리 자기 안에서 달리고 번민하고 방황할 수 있는 가장 드넓은 영혼”이 있다면 그런 모습이지 않았을까. 갈망하는 사람은 언제나 자기 안에 가장 깊은 곳을, 가장 먼 곳을 달린다.

 

그 밤에 담배를 손에 쥔 엄마는 내게 너무 낯선 존재였고, 그 생경한 감각이 나를 처음으로 엄마를 타자로 인식하게 했다. 나의 무엇이 아닌, 나와 다른 욕망을 품은, 나와 다른 목소리를 내는 존재. 그런 사람이 내 앞에 있고, 그게 나의 엄마라는 사실이 얼마나 중요한 사건이었는지! 그날의 엄마는 내게 타자를 품을 수 있는 가능성을 줬다. 나의 모든 것이 그로부터 왔고, 그러니 내가 <나>를 외치고 쓰는 순간에도 나의 사랑하는 타자가 내 안에 기원으로 존재하고 있음은, 내가 <나>에 갇히지 않고, <타자>로 나아갈 수 있는 희망이었다. 나, 자아, 그 너머에 가 보는 것. 그렇게 내게도 갈망하는 것이 하나 생겼다.

 

헬레나 셰르브베크, ‘미완성 자화상’, 1921.

 

엘렌 식수는 여성적 글쓰기란 타자를 쓰는 것, 타자와 함께 쓰는 것이라고 했고, 이제 나는 책 속의 울고 웅크린 여성들이 어떤 타자로부터 나와 그를 품고 자신의 목소리를 낸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한 여성이 가부장적 사회의 시선을 떨쳐내고 자신을 온전히 바라보고 그가 갈망하는 것을 말하고자 할 때, 나는 그의 사닥다리가 되어준 타자들의 목소리를 함께 듣는다. 입을 다물고 움직이지 않기에는 삶을 너무도 사랑했던 여자들의 비명을. 식수가 말했던가, 문학 안에서 비명은 노래가 될 수 있다고.*** 아, 이제 깨닫는다. 전혜린의 글자들이 음표였다는 것을. 생을 향한 지독한 찬가였다는 것을.

 

*전혜린이 박인수 교수에게 보낸 편지 중.

**이언 블라이스, 수전 셀러스, <엘렌 식수>, 김남이 옮김, 책세상.

***엘렌 식수, <아야이! 문학의 비명>, 이혜인 옮김, 워크룸.

 

─✲─

 

신유진

엄마의 책장 앞을 서성이고, 파리의 오래된 극장을 돌아다니며 언어를 배우고 이야기를 꿈꿨다. 산문집 <창문 너머 어렴풋이>, <몽카페>, <열다섯 번의 낮>과 <열다섯 번의 밤>을 썼고, 아니 에르노의 <세월>, <진정한 장소>를 비롯한 여러 책을 옮겼다.

@malletshin_

 

 

 

 

‘엄마의 책장으로부터’는 [월간소묘 : 레터]에 연재되고 있습니다.

구독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