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책장으로부터] 별거 아닌 것들의 별것

2024-01-08T15:30:27+09:002024-01-7|

글: 신유진   겨울에는 옛날 집을 생각한다. 겨울을 나는 일이 혹독한 주택이었는데, 그곳을 이야기할 때면 자꾸 따뜻한 것들만 말하게 된다. 식탁 위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던 음식, 등을 대고 누우면 기분이 좋았던 온돌바닥, 티브이 앞에 편안한 자세로 앉아서 과일을 먹던 어른들, 두껍고 포근한 이불. 어디까지 사실인지 어디서부터 조작된 기억인지 헷갈린다. 나는 과거를 글로 옮기며 각색하니까. 각색의 방법은 ...

[엄마의 책장으로부터] 첫눈 오던 날

2023-12-11T15:49:47+09:002023-12-11|

글: 신유진   눈이 왔다. 이른 아침에 하얗게 눈 덮인 동네를 산책하다가 새끼를 낳은 개를 봤다. 빈집에서 어미 개가 새끼 강아지들을 품고 있었다. 유기견 센터에 신고는 하지 않았고(보호소에 데려다줬던 강아지가 안락사 대상이 된 이후로 절대 신고하지 않는다), 대신 어미 개가 누운 곳에 반려견이 먹던 사료를 놓아뒀다. 어미 개는 새끼들을 두고 혼자 나와 밥을 먹었고,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자리 ...

[엄마의 책장으로부터] 나와 엄마와 마릴린 먼로 2

2023-11-14T15:10:11+09:002023-11-11|

글: 신유진   금발머리 여자가 수술대 위에 누워 있다. 세상에 나오지 못한 아기의 목소리가 들린다. 여자의 모든 결핍에는 아버지의 부재가, 불행의 근원에는 임신중지 수술이 있다. 여자는 현실이 컷 없는 영화 같다고 느낀다. 금발의 여자는 두 개의 이름, 노마 진과 마릴린 먼로 사이에서 갈등한다. 조이스 캐럴 오츠의 《블론드》를 각색한 영화, 〈블론드〉의 이야기이다.   그 영화를 보는 내내 떠오르는 장면이 ...

[엄마의 책장으로부터] 나와 엄마와 마릴린 먼로 1

2023-11-14T15:06:18+09:002023-10-8|

글: 신유진   나는 ‘여성의 텍스트’라 불리는 글들을 편애한다. 그런 글들은 기억이나 장소, 몸이나 질병, 하다못해 개를 이야기할 때도 언제나 여성의 이야기로 되돌아온다. 내가 여성이기에 동병상련의 입장으로 그런 책을 선호하는 것은 아니다. 여성의 서사가 더 특별하다 여겨서도 아니다. 그저 그런 이야기들이 글로 쓰이는 게 지극히 당연하다고 생각할 뿐. 말로 다 하지 못한 것, 말에 갇힐 수 있는 것, 그런 ...

[엄마의 책장으로부터] 맨발로 걷는다

2023-10-10T16:47:46+09:002023-09-9|

글: 신유진   엄마는 사계절 내내 맨발로 다닌다. 겨울에도 양말 신은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엄마의 발은 햇빛과 흙과 굳은살로 누런빛이 돈다. 그 발로 여름에는 슬리퍼를 겨울에는 운동화를 구겨 신고, 집에서 시장을 통과해 몇십 년째 일하는 가게까지 딱 5분 거리를 걷는다. 사람의 일평생이 그 5분 거리에 다 있는 것처럼. 느리고 무거운 걸음으로. 시장에 있는 가게가 엄마의 일터가 된 것은 아빠의 사 ...

[엄마의 책장으로부터] 갈망 혹은 비명

2023-10-10T16:46:49+09:002023-08-7|

글: 신유진   “제가 원하는 것은 생명이 유동하는 것, 매일매일 변하는 것, 어떤 새로운 것, 습관적인 것인데! 미칠 듯한 순간, 세계와 자아가 합일되는 느낌을 주는 찰나, 충만한 가득 찬 순간 등 손에 영원히 안 잡히는 것들이 나의 갈망의 대상입니다.”*   전혜린의 편지다. 엄마의 책에도 내 책에도 이 구절에 밑줄이 그어져 있다. 우리는 각자의 장소에서 전혜린을 읽었다. 엄마는 건넌방 ...

[엄마의 책장으로부터] 건넌방

2023-07-03T19:34:43+09:002023-07-3|

글: 신유진   이야기는 건넌방에서 시작됐다. 작은 창으로 세상이 손바닥만 하게 보이던 방, 그 건넌방에 스물세 살의 여자와 아기가 있었다. 여자는 몇 날 며칠 잠을 자지 않았다. 누운 아기를 보면 무서운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잠든 사이,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 밥을 먹는 사이, 여자는 아기가 갑자기 숨을 쉬지 않을까 봐, 작은 몸이 부서질까 봐 두려웠다.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출산을 죄책감이라고 ...

Go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