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소묘: 레터] 시월의 편지 ‘일의 슬픔과 기쁨’

  일이 의미 있게 느껴지는 건 언제일까? 우리가 하는 일이 다른 사람들의 기쁨을 자아내거나 고통을 줄여줄 때가 아닐까? — 알랭 드 보통 <일의 기쁨과 슬픔>   저 유명한 책의 제목은 ‘슬픔’으로 끝납니다. 알랭 드 보통은 일이 충족감을 주는 경우는 극히 드물고, 다만 더 큰 괴로움에서 벗어나 있게 해준다고 썼습니다. ‘가없는 불안’ 대신 ‘품위 있는 피로’를 안겨줄 것이라고요. 서늘한 통찰이 아닐 수 없어요. 그러나 과연 그렇기만 한가. 이달의 편지에서는 일의 슬 ...

[소소한 산-책] 제주, 라바북스

글: 이치코   나는 여행을 좋아하는 걸까? 스스로 여행을 좋아하는 편이라고 생각했어요. 어렸을 때부터 싸돌아다니는 걸 좋아했어요. 집에 붙어 있질 않았죠. 초등(국민?)학교에 들어가기도 전부터 해가 떨어지고 밥때가 지나 집에 들어가기 일쑤였고 중고등학생이 되면서는 동네 친구들과 방학마다 텐트를 둘러메고 들로 산으로 바다로 놀러 다니곤 했어요. 물론 그걸 여행이라 부르긴 좀 애매하긴 해요. 그저 친구들과 노는 걸 좋아했던 거겠죠. 그러다 대학에 가서 여행이라고 불러도 될 만한 나들이를 경 ...

[고양이 화가] 지구에 그림 그리는 화가 일억 명 있다면

  지구에 그림 그리는 화가가 일억 명 있다면 일억 개의 그리기 방법이 있을 거예요. 처음에 나는 아주 느린 방식으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림이 완성되기까지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의 시간이 걸렸어요. 풀과 꽃 모양의 장식을 그렸습니다. 종이에 수채물감으로 식물의 전체적인 모양을 칠하고, 연필과 색연필로 식물의 잎맥과 질감을 한 겹씩 그려 넣었습니다. 그리다가 실수로 붓이 종이를 스치게 되면 처음부터 다시 그려야 했어요. 덧칠을 하면 맑게 칠해지는 물감의 맛이 사라져 버리거든요. 꽃잎 한 장에 붓 터 ...

[월간소묘: 레터] 9월의 편지 ‘이름하는 일’

  “이름을 지어줘.” 어느 날 메시지로 아기 사진이 날아왔습니다. 친구가 아이를 낳은 것이에요. 아가 얼굴을 보자 이 존재는 뭐라고 불러줘야 하는지 궁금해졌어요. 이름 뭐야? 물었더니 이름을 지어달라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저는 노트를 펼쳐 친구가 말한 돌림자 하나를 적어놓고 며칠 꼬박 떠오르는 온갖 글자를 앞뒤로 붙여보았어요. 이름하는 일은 어쩐지 영혼에 관여하는 일 같습니다. 제가 낳은 것도 아닌데 믿을 수 없이 애틋해진 아기의 얼굴을 몇 번이고 들여다봐요. 맑고 높은 이마. 마침내 ...

[소소한 산-책] 강릉, 한낮의 바다

글: 이치코   <새의 심장>은 시에 관한, 시의 탄생에 관한 그림책이에요. 이야기의 주인공인 나나는 바닷가에서 태어났고 인간의 말보다 바다의 말을 먼저 배웠어요. 그곳에는 그물과 배와 모래와 산들바람처럼 보드라운 돌멩이가 있었고 파도가 먼바다에서 유리 조각들을 동글동글하게 깎아 선물로 보내주었어요. 소녀는 시와 시의 마음을 찾아 도시로, 숲으로 여행을 떠나고 남다른 호기심과 때 이른 이별, 애틋한 우정과 자유로운 영혼으로 빚어진 삶을 통해 마침내 시와 사랑을 발견하게 되죠.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