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어가는 가을 속에서 여름을 떠올립니다.

나는 여름 내내 그림을 그렸어요. 더운 바람에 조금만 움직여도 털이 수북이 빠졌습니다. 며칠 밤 동안 꿀벌은 재채기를 심하게 하더니 미안하지만 여름에는 침대를 따로 써야겠어, 라며 천장에 해먹을 달았습니다. 며칠 전부터 새로 산 해먹 자랑을 하던데…. 나는 할 수 없이 꿀벌의 엉덩이를 보며 그날의 이야기를 나누어야 했어요. 밤바람이 시원해서 우리는 달게 잠들었습니다.

여름 내내 나는 바다에 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이른 더위에 깨어난 여름의 첫날부터 찬바람이 불던 여름의 끝자락까지 나는 꿀벌을 제외하곤 아무도 만나지 않았고 작업실에 틀어박혀 그림만 그렸습니다. 모두가 나를 도와주는 듯 어떤 전화도 오지 않았고 가끔 찾아오는 옆집의 어린이도 휴가를 떠난 듯 조용했어요. 나는 발 디딜 수 없는 바다 위에서 그림을 그렸습니다.

가끔 만나는 날치 떼와 유람선 위에서 손 흔드는 승객 말고는 온전히 혼자였어요. 밤이면 하늘도 검은 바다가 되어 떠다니는 빛은 심해어의 등불인지 우주의 별빛인지 알 수가 없었어요. 적막 속에서 머무는 물비린내는 내가 아직도 바다에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배 위로 튀어 오르는 물방울에 털은 눅눅하고 귓가에는 찰랑대는 물소리가 납니다.

 

 

여름 내내 그림만 그려대는 일은, 밤에 돌아와 꿀벌의 코고는 소리를 들으며 아스라이 잠드는 일은 그간의 생활과 똑같았지만 더 뚜렷하고 고요한 일이었어요. 나는 그리고 싶은 것만 그렸습니다. 이제껏 그려온 그림들은 모두 그리고 싶은 것이었지만 더불어 그려야만 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타의가 아니더라도 말이에요. 비싼 종이를 샀으니 화면을 가득 채워야 했고 선으로 그린 그림은 완성이라 할 수 없으니 칠해야 하고 이번 주에는 의뢰받은 그림을 그렸으니 다음주에는 내가 그리고 싶은 것을 그려야만 한다는 자유로운 강박 속에서 그림을 그렸습니다.

해야만 한다는 규칙 속에서 그린 것이 정말 순전히 그리고 싶은 것이었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여름이 시작되자마자 나는 바지 속 녹은 사탕처럼 끈적해졌습니다. 마침 의뢰받은 일도 모두 끝났습니다. 주머니가 좀 두둑해져서일지도 몰라요. 마음의 여유가 주머니의 두께에서 나온다면 이번 여름이 끝날 때까지만 그림의 미래에 대해 생각하지 않기로 했어요. 더불어 나와 주머니의 미래도요. 이 그림이 어떻게 쓰일지 어떤 이가 그림을 사줄지 이 종이 위에 무엇이 완성될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미리 스케치 해둔 연습장은 모두 접어두고 캔버스 위에 여름을 닮은 물감색을 칠해요. 그전에는 종이에 그림을 그리다가 캔버스를 직접 짜서 쓰기 시작했어요. 네모난 나무틀에 천을 씌어 고정합니다. 처음 캔버스를 짤 때는 며칠을 끙끙 앓더니 몇 번 손에 익자 조금만 힘을 줘도 탱탱하게 천이 펴졌습니다. 손가락으로 천을 두드리면 공 – 하고 밀어내는 소리가 났습니다. 납작한 소리 사이로 공간이 채워졌습니다.

물감을 새로 사서 기름에 개어 써보기도 했어요. 새로운 재료들은 마르는 데 시간이 좀 걸렸어요. 채 마르지 않은 물감 위에 다른 색을 입히면 두 개의 색이 부드럽게 뒤섞였습니다. 물감으로 캔버스에 밑색을 칠하고 기다리는 동안 종이를 여러 장 묶어 책을 만들었어요. 순간 떠오른 말과 문장을 그렸습니다. 누구에게도 보여줄 생각이 없어서 마음 깊은 곳에 있는 것들을 꺼냈어요.

여름이 끝날 때까지만 그래보겠다는 계획 외에 모든 것은 즉흥적으로 그려졌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림은 들뜨고 비어있고 의미가 없었어요. 색은 기분에 따라 바뀌어 며칠은 초록의 분위기를, 며칠은 타는 듯한 여름 해의 색을 썼지요. 선으로만 그림을 끝내기도 해요. 작업실 구석에 그림들이 쌓여가고 주머니는 얇아지고 머릿속의 곳간은 채워졌습니다. 그리고 싶은 것이 자꾸만 생겨났습니다.

여름 내내 작업실에 틀어박혀 혼자 그림 그렸던 이야기를 꼭 적어보고 싶었어요. 그간 내가 적었던 그림에 대한 기록이 모두 무언가를 헤쳐나가면서 쓴 일지처럼 느껴졌거든요. 더 잘 그리고 싶고, 인정받거나 보여지고 싶은 욕망을 더해서요.

올 여름 집에서 몇 번의 골목을 돌아 도착하는 작업실이 내겐 바다였고 인적 없는 섬이었고 그림 그리는 일은 하늘과 구분 없는 바다에 떠있는 일이었습니다. 별도 보고 투명한 바다 아래 물고기도 구경하고 가끔 땅에서 너무 멀어진 것은 아닌가 사람들에게 잊혀지는 것은 아닌가 걱정을 하면서도 일렁이는 파도소리에 금세 잊어버리게 되는 그런 날들이었음을. 달려가는 와중에 잠시 멈췄던 올해 여름은 말이에요.

 

 

 

안녕하세요, 고양이 화가는 잠시 멈춥니다. 저는 최근에 해와 바람이 잘 들던 작업실에서 빛이 거의 들지 않는 1층 작업실로 이사를 했어요. 여름에 머물렀던 마음이 이어진 것인지 작업 공간이 바뀌며 신선한 바람이 든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지금 그림을 잔뜩 그리고 싶습니다. 체력만 된다면 하루종일 그림만 그리고 싶습니다.

그리다 보면 그 외의 것에 관심이 가질 않아서 고양이 화가의 안부를 물을 새도 없이 벌써 가을이 지나가 버리고 말았어요. 언제까지일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고 싶은 마음이 이어진다는 것은 제게 소중한 일이어서 당분간 마음 가는 대로 그려보려고 합니다. 그리다 보면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쌓일 것이고 그때쯤 고양이 화가가 또 슬그머니 말을 걸어올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림을 그리며 담아두었던 이야기들을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미나 드림.

 

 

 

‘고양이 화가’는 2021년 6월부터 10월까지 [월간소묘 : 레터]에 연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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