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행을 좋아하는 걸까?

스스로 여행을 좋아하는 편이라고 생각했어요. 어렸을 때부터 싸돌아다니는 걸 좋아했어요. 집에 붙어 있질 않았죠. 초등(국민?)학교에 들어가기도 전부터 해가 떨어지고 밥때가 지나 집에 들어가기 일쑤였고 중고등학생이 되면서는 동네 친구들과 방학마다 텐트를 둘러메고 들로 산으로 바다로 놀러 다니곤 했어요. 물론 그걸 여행이라 부르긴 좀 애매하긴 해요. 그저 친구들과 노는 걸 좋아했던 거겠죠. 그러다 대학에 가서 여행이라고 불러도 될 만한 나들이를 경험하게 되었어요. 어떨 땐 계획된 것이기도 했고 어떨 땐 우연한 떠남이기도 했어요. 목적지가 관광지인 경우도 있었고 그냥 사람 사는 동네인 경우도 있었어요. 지금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지만, 지리산을 두 번이나 종주하기도 했고요. 아무튼 여권도 없고 돈도 없던 시절이었지만 여기저기 부지런히 다녔던 것 같아요. 그 떠남 혹은 낯선 곳에 내던져짐을 좋아했어요. 여행을 좋아한다고 여겨도 될 만큼요. 하지만 남들에게 여행을 좋아한다고 얘기해 본 적은 없는 것 같아요.

 

여행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어떤 공통점이 제겐 없더라고요. 여행을 기다리는 설렘, 여행 준비에 대한 몰입, 그런 걸 느껴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떠남이 실행된 이후, 그러니까 목적지로 향하는 버스를 타거나 기차를 타거나 비행기를 타는 순간부터는 여행 모드가 발동되면서 설레기도 하고 가벼운 흥분에 휩싸이기도 하지만 준비 단계에서는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편이에요. 오히려 귀찮게 여기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아요. 그런데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 준비 과정에서 어쩌면 여행 자체보다 더 큰 즐거움을 찾는 것 같더라고요. 어디를 갈지 어떤 순서로 움직일지 고민하고 즐길 거리와 먹거리를 찾아보며 때론 여행지의 역사와 시사적인 문제까지 공부를 하며 마치 또 하나의 여행을 즐기는 것처럼 들떠 있는 순간들 말이에요.

 

아직 여행을 떠나지도 않았는데 가이드북이 (조금 과장해서) 너덜너덜해질 만큼 읽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나중에야 알게 되었어요. 전 여행지에서 필요한 부분만 찾아 읽거나 여행이 끝난 뒤에 심심풀이로 읽었던 것 같아요. 물론 숙소나 교통편 예약 같은 필수적인 준비도 없이 대책 없이 부딪히는 타입은 또 아니에요. 여행을 가서 굳이 고생을 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하지만 딱 거기까지만 준비하고 나머지는 여행에서 만나게 될 우연과 인연에 맡기는 편이에요. 게다가 일정 기간 여행을 떠나지 못하면 좀이 쑤셔 못 견디는 성격도 아니에요. 여행에서 멀어진 채 일상에 파묻혀 살다가 문득 ‘여행이나 갔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게 되는 순간이 없는 건 아니지만, 여행 없이도 웬만하면 무던하게 잘 살아가는 편이에요. 적극적으로 여행을 좋아한다고 어필할 만한 극적인 요소가 없는 성격인 것 같아요. 하지만 여행 가는 걸 싫어하진 않는데, 오히려 좋아하는데… 이런 성향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늘 궁금했어요. 여행을 좋아하는 걸까? 아니면 그냥 일상에서 벗어나는 게 좋은 건가?

 

어쨌거나 올해는 여름의 시작부터 제 스타일에 꼭 맞는 준비 없는 여행을 꾸준히 다니고 있어요. 딱히 준비를 덜 하려는 의지가 있었다기보다 일하러 가는 길과 여행길의 경계가 흐릿하다 보니 그렇게 되어버렸어요. 여행을 간다고 공개적으로 말하기도 조심스러운 시절이지만, 일 때문에 가야만 하는 곳이 놓칠 수 없는 여행지인 탓에 출장과 여행을 적당히 버무려 한 달에 한 번씩 나들이하고 있죠. 동아서점(속초), 한낮의 바다(강릉) 모두 그렇게 다녀온 산-책이었어요. 9월에도 그렇게 출장 겸 (준비 없는) 여행을 다녀왔어요. 그런데 속초나 강릉에 비해 너무 본격적인 여행지인 탓에 짧은 일정이 조금 야속하긴 했어요. 2박 3일이라곤 하지만 실제론 겨우 48시간 정도, 제주에 머물면서 라바북스(+@)에 산-책을 다녀왔어요.

 

 

제주에 독립서점이 많다는 건 알고 계시죠? 지자체의 인구수 대비 독립서점의 수로 따지면 월등한 차이로 1등일 거예요. 67만 명 정도의 인구에 최소 40~50곳, 최대 100여 곳*의 독립서점이 영업을 하고 있는데, 이 비율을 서울의 1000만 인구에 적용하면 588~1492곳에 해당하는 수치니까요.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제주의 독특한 지리적, 문화적 여건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그렇게 많은 제주의 독립서점 중에서 라바북스는 비교적 오래된 책방이에요. 2015년 가을에 문을 열었다고 하니 벌써 6년이 넘었네요. 오랜 시간 자리를 지켜온 만큼 이름은 익숙했지만, 여행 준비는 최대한 생략하는 전통에 따라 라바북스의 문을 열고 들어가기 전까지는 직접적으로 아는 게 거의 없었어요. 다만 인스타그램 프로필에 ‘소규모 여행 사진집 라바 그리고 작은책방 라바북스’라고 적힌 걸 떠올리며 여행을 좋아하시는 분이 운영하는 책방인가 보다, 그러면 여행 관련 책을 메인으로 하는 곳이고 제주에 여행 온 사람들을 위한 공간인가? 정도의 생각을 했을 뿐이에요. 그런데 막상 책방에 들어서자 제 예상과는 전혀 달랐어요. 너무 평범한(?) 독립서점처럼 보여서 조금 당황했을 만큼요.

 

책방에 놓인 책들은 여느 독립서점과 마찬가지로 주인장의 안목과 취향에 따라 구성되어 있는 듯했어요. 독립출판물도 많이 있었고요. 한 권 한 권 정성스럽게 골라서, 어쩌면 직접 읽어보고 추천할 만한 책들만 입고했을 것 같기도 했어요. 그렇게 넓지 않은 공간임에도 벽면을 모두 서가로 채우지 않고 포스터며 그림이 곳곳에 자유롭게 붙어 있었어요. 책방을 책으로 가득 채우기보다는 본인이 좋아하는 것을 함께 나누며 즐기려는 마음이 느껴졌어요. 그런데 공간을 찬찬히 둘러보아도 여행이라는 키워드를 발견하기는 쉽지 않았어요. 서가와 매대를 몇 바퀴나 돌아본 다음에야 여행에 관한 진심이 책방 곳곳에 숨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지만 그래도 라바북스와 여행이 단번에 연관될 만큼은 아니었어요. 하지만 산-책을 마친 지금은, 라바북스가 여행책을 전문적으로 다루거나 여행을 테마로 꾸며진 어느 책방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의 여행-책방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비밀은 책방의 대표님이었어요.

 

소소한 산-책을 다니며 (이미 일면식이 있지 않은 한) 책방에 알은체를 하지 않는 걸 원칙(?)으로 하고 있어요.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동의를 구해야 하는 경우 정도를 제외하고는 은밀하게 들어가서 조용히 구경하고 날렵하게 나오는 걸 지향하고 있어요. 그렇지만 이번엔 본래의 중요한 업무(<아홉 번째 여행> 원화전)가 있어서 책방에 들어가면서 인사를 드려야 했어요. 책방 대표님이 여행을 좋아하고 또 소규모 여행사진집 <LABAS>를 직접 발행하기도 했다는 걸, 인사를 나누던 그때는 몰랐어요. 하지만 라바북스의 공간과 대표님의 목소리, 말투, 눈빛이 결합하는 순간 마치 여행 전문 책방에 들어선 것처럼 느껴졌던 것 같아요. 여행을 주제로 한 전문서점으로서의 여행책방, 여행지에서 만날 수 있는 최고의 책방으로서의 여행책방,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공간으로서의 여행책방… 어떤 식으로 표현해도 다 들어맞을 것 같았어요.

 

저는 수영을 못 해요. 그렇다고 물에 던져놓으면 바로 꼬르륵 가라앉는 맥주병은 아니에요. 대충 손발을 움직여 헤엄은 칠 줄 알아요. 하지만 물에다 몸을 맡기고 원하는 방향으로, 원하는 속도로 움직이는 수영은 하질 못해요. 꼬꼬마 어린 시절에 저수지에서 놀다가 빠져 죽을 뻔한 뒤로 (발이 닿지 않는 깊은) 물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어서 수영을 배워본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지난여름 강릉에서 서핑 원데이 클래스를 듣던 날, 바다에 들어가기 전 해변에서 서핑 동작을 가르치던 강사가 수영 못하시는 분 손들어 보세요, 라고 했을 때 자신 있게 손을 들었어요. 구명조끼를 입으면 불편해서 힘드실 텐데… 물에 뜨기는 하시죠? 라며 재차 묻길래 네, 라고 대답하긴 했지만요. 발이 바닥에 닿지 않아도 어느 정도는 (그게 비록 물살이 있는 바다라고 하더라도) 물에 떠 있을 수 있고, 서핑 보드를 붙잡으면 빠져 죽을 일은 없다는 걸 알지만 안전장치가 있으면 거기에 몸을 맡기고 싶은 심정이었어요.

 

인간의 신체 구조상 물에 뜨는 게 정상이라는 건 알고 있어요. 하지만 언제나 두려움이 있고 그 두려움이 결국 제 몸을 물속으로 가라앉게 만들어버리죠. 물에 몸을 맡기지 못한 채 경직되는 순간 물 역시 몸을 떠받치는 걸 거부하는 상호작용이라고나 할까요. 물에 뜨고 수영을 하기 위해서는 유연하고 경쾌한 마음으로 물을 대해야 하는데 그게 쉽지는 않은 것 같아요. 여행도 그런 게 아닐까 생각했어요. 여행을 좋아한다는 건 떠남이라는 사건에 몸과 마음을 맡길 줄 안다는 걸 의미하는 것 같아요. 유연하고 경쾌하게 말이에요. 아무리 거창하고 화려한 여행이라고 해도 무언가에 쫓기듯 경직되어 있다면, 자유롭게 물을 헤치며 나아가는 수영이 아니라 수면 아래로 한없이 가라앉는 낙하가 되고 말 거예요. 여행이란 어쩌면 태도의 문제가 아닐까 싶기도 해요.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가? “지배 같은 거 안 해. 이 바다에서 가장 자유로운 녀석이 해적왕이야.”라고 말했던 <원피스>의 루피처럼요.

 

라바북스에서 여행의 그 자유로움, 유연함, 경쾌함을 느꼈던 것 같아요. 말로 설명할 수 있는 정확한 이유는 잘 모르겠어요.(이럴 줄 알았다면 대표님 인터뷰라도 할 걸 그랬네요…) 소소한 산-책을 다니면서 공간이나 책의 구성을 통해 충분히 책방의 특징과 매력을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해 왔는데 라바북스는 예외인 것 같아요. 라바북스라는 공간과 대표님이 하나의 존재로 인식되었을 때 스치듯 짧았지만 진하게 각인되었던 여행의 향기, 사람과 공간이 서로 닮아간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라바북스를 한 문장으로 표현하자면 자유롭고 경쾌한 발걸음으로 일상을 여행하는 곳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제주에 갔을 때 여행의 동선에 서귀포가 들어가 있다면, 아니 따로 시간을 내어서라도 꼭 위미리의 작은 책방 라바북스에 들러보세요. 그리고 책방을 지키고 계신 대표님께 반갑게 인사를 건네보세요. 어쩌면 여행 속의 또 다른 여행을 경험하시게 될 거예요.

 

﹅ 라바북스 instagram.com/labas.book

 

 

+여행 팁+ 라바북스 방문을 마친 뒤 도로를 따라 20~30m 정도만 걸으면 만날 수 있는 위미항의 모습도 꼭 보고 가세요. 제주에 흔하고 널린(?) 해수욕장 풍경 말고 어업의 근거지인 항구를 보실 수 있을 거예요.(방파제를 따라 걷는 길이 일몰 명소라고도 해요.)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날 짬을 내어 종달리에 있는 서점도 산-책을 다녀왔어요. 종달리는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구좌읍에 속해 있는 여러 리 중 하나인 마을이에요. 구좌읍의 인구가 15,400명 정도이고 12개의 리가 있으니 종달리의 인구라고 해봤자 서울의 아파트 단지 하나에도 미치지 못할 거예요. 하지만 그곳에 무려 4개의 서점과 북카페가 있어요. 소심한 책방, 책약방, 종달리746, 책자국 이렇게 말이에요. 그중에서 책자국에 들러서 한참 시간을 보내다 왔어요.(소심한 책방과 책약방은 잠시 들르고 종달리746은 미처 가보질 못했어요.) 책자국은 카페가 메인이라고 볼 수 있는 책방이에요. 커다란 나무가 반겨주는 입구를 거쳐 조그만 마당을 지나면 아담한 단독주택처럼 보이는 건물을 만날 수 있어요. 실내의 중앙엔 판매용 책이 놓인 매대가 있고 한쪽에는 열람용 책이 진열된 서가가 있어요. 그리고 몇 개의 테이블이 있고요. 카페에 들어서자 갑자기 시간이 느리게 가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어요. 아주 단정하게 정리된 공간인데 마치 프랑스 시골에 있는 오래된 별장 혹은 친척 집에 방문한 것 같다고나 할까요.(프랑스도 못 가봤고 별장도 없지만요..) 여행 일정에 지친 몸을 달래기에 더할 나위 없는 곳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촘촘하게 꾸며진 책방 매대를 구경하는 재미도 놓칠 수 없고요. 제주 동쪽을 지나는 길이라면 꼭 종달리의 책방과 북카페를 방문해보세요.

 

 

 

 

* ‘소소한 산-책’ 코너에서 독자 투고를 받습니다. 제 걸음이 미처 닿지 못한 곳들의 이야기도 전하고 싶어요. 분량 제한은 없습니다. 짧아도 좋고요. 자유롭게 여러분의 산-책 이야기 들려주세요. 해당 메일(letter@sewmew.co.kr)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선정된 분께는 오후의 소묘에서 준비한 굿즈와 신간을 보내드립니다. 소중한 원고 기다리고 있을게요.

 

‘소소한 산-책’은 [월간소묘 : 레터]에 연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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