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에 그림 그리는 화가가 일억 명 있다면 일억 개의 그리기 방법이 있을 거예요.
처음에 나는 아주 느린 방식으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림이 완성되기까지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의 시간이 걸렸어요. 풀과 꽃 모양의 장식을 그렸습니다. 종이에 수채물감으로 식물의 전체적인 모양을 칠하고, 연필과 색연필로 식물의 잎맥과 질감을 한 겹씩 그려 넣었습니다.
그리다가 실수로 붓이 종이를 스치게 되면 처음부터 다시 그려야 했어요. 덧칠을 하면 맑게 칠해지는 물감의 맛이 사라져 버리거든요. 꽃잎 한 장에 붓 터치 한 번. 거의 다 완성된 그림에 물감을 흘려서 발톱으로 그림을 갈기갈기 찢어버릴 때도 있었어요. 열흘이 걸려 완성하던 그림을 지금은 하루에 한 장, 많으면 서너 장까지 그리게 된 데에는 이런 나의 분노도 한몫한 것 같습니다.
몇 달 동안 혼자 작업실에 틀어박혀 그림을 그린 적이 있습니다. 하루에 내가 했던 말은 끼니를 채우려고 간 식당에서 안녕하세요, 백반 주세요, 안녕히 계세요, 였어요. 속눈썹 몇 가닥을 모아 만든 것 같은 얇은 붓으로 한 땀 한 땀 그림을 그렸습니다. 면을 칠하고 명암을 그려 넣었어요. 아주 고운 선을 써야 해서 색연필이 조금만 뭉툭해져도 다시 깎아 썼습니다. 다 그려둔 그림에 실수로 펜이 굴러가거나 물감 닦던 걸레가 떨어지기라도 한 날에는 작업실이 떠나가라 비명을 질러댔어요. 장인이 하나뿐인 도자기에 그림을 그리듯 그림을 그렸습니다. 공모전을 준비하던 중이었어요.
몇 달간 그림만 그려대면서 나의 마음도 그 시간만큼 부풀어 올랐던 것 같습니다. 들인 시간만큼 좋은 그림이 나오는 것은 아닐 텐데. 오랜 시간 해왔던 일이 꼭 나은 결과로 이어지는 건 아니었을 텐데요. 이상하게도 그때 내가 읽었던 책들의 결말은 모두 그랬어요. 열심히 하면 보상이 따른다. 나는 최선을 다해 그렸고 드디어 나는 화가가 된다.
공모전에 그림을 내고 당선작과 심사평이 올라오던 날까지 나는 매일같이 안내판을 들락날락하며 지냈습니다. 그날도 안내판에 갔는데 당선자들 속에 내 이름이 없었어요. 당선이 되면 무슨 소감을 말할지 다 적어두었는데, 상금으로 무엇을 할지 계획까지 짰는데! 몇 달간 소중히 그려낸 그림들이 누구의 눈길도 끌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무것도 아니게 되었습니다. 사실 내 그림은 그리 대단치가 않구나. 자신만만했던 마음은 청소기에 빨린 공처럼 쪼그라들었습니다.
그간 그렸던 그림들을 봅니다. 한 겹 한 겹 쌓아올렸던 나뭇가지가 생선가시처럼 보였습니다. 햇님을 그린 물감은 너무 빨갰어요. 내리는 비를 그린 연필선들은 너무 약하고 힘이 없어요. 나의 노력이 부정당하는 일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어린이 고양이였을 때 학교에서는 열심히 하면 칭찬을 받곤 했습니다. 그때의 나는 그림이 부정당하는 게 내가 외면받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려온 그림에 담아두었던 애정이 모두 사라져 버렸습니다. 텅 빈 그림들 앞에서 나는 무엇을 했을까요?
부끄러운 이야기입니다. 나는 엉엉 울면서 그림을 그렸어요. 고양이 눈물 방울, 콧구멍에 대롱대롱. 낙선작을 한참 보다가 코가 너무 맵고 시려서 그림을 그렸습니다. 어쩌라구, 킁, 훌, 나보고 어쩌라구. 뭘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서 그림을 그렸어요. 그나마 할 줄 아는 게 그림을 그리는 것이어서요.
화가 나서 책상을 광광 두드리다가 모기를 잡느라 구겨지고 핏자국까지 말라붙은 캔버스를 꺼냈습니다. 안쪽의 면은 깨끗했어요. 이제껏 써왔던 물감 대신 그동안 쓰지 않은 물감을 짰습니다. 그리고 먼지 쌓인 두꺼운 붓을 꺼냈어요.
엉엉 울면서 그렸습니다. 뭘 그려야 할지 몰라서 공모전 결과를 확인하고 돌아오는 길에 지난 터널을 그렸어요. 큰 붓으로 한번 눌러 비비니까 공간이 생기고 그 위에 다른 색의 물감으로 곡선을 세 번 그어주니 터널처럼 보였습니다. 물감을 채 닦지도 않고 흰 물감을 찍어 점을 네 번 찍으니까 터널의 불빛이 그려졌어요. 좀 심심한 것 같아서 파란 물감을 찍어 자동차도 그렸어요. 엉엉 우는 몇 분 사이에 그림을 다 그렸습니다.
에엥
눈물이 멈췄습니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온 듯했습니다. 소금내가 나서 혹시 산 너머 불어온 바닷바람이 아닐까 궁금해졌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무더운 여름날 코앞에서 돌아가는 선풍기 바람 같기도 했습니다. 어디서 생겨난지 모르겠는 바람이 내 속으로 흘러들어 왔습니다. 쪼그라든 공이 통통해지고요. 눈물도 말리고 콧물로 말렸습니다. 낯설지만 개운한 바람 속에서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날 이후로 여러 번 그런 방식으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일부러 탁하게 만들어보기도 하고 두꺼운 붓으로 삼십 분 만에 그림을 완성해 보기도 하고요. 한 장의 그림에 오랜 시간 몰두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발견한 후에는 더 쉽게 망칠 수 있었어요. 망쳐도 괜찮았어요. 작업실이 떠나가라 비명을 지르지도 않았습니다.
마치 새로운 세계를 발견한 듯한 기쁨이었습니다. 아마 오랫동안 느리고 세밀한 그림을 그렸기 때문에, 열정을 다한 공모전에서 떨어졌기 때문에 그런 방식를 찾을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어요. 나는 낙선했고 여전히 아무도 내 그림을 몰랐지만 그날 이후 그리는 것이 더 편해졌습니다.
‘고양이 화가’는 2021년 6월부터 10월까지 [월간소묘 : 레터]에 연재되었습니다.
[고양이 화가]
그림을 안 그려도 된다 • 일기 같은 그림 • 나의 전시회/어린 고양이 화가 • 침대 위 정원사 • 지구에 그림 그리는 화가 일억 명 있다면 • 그려가는 와중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