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여름이에요.
햇볕이 뜨거워진 만큼 초록이 짙어지고 있어요. 추위에 웅크리다 지쳐갈 때쯤 찾아온 연두색 봄을 반가운 마음으로 맞이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여름이 성큼 다가왔네요.
출근길에, 퇴근길에 혹은 산책길에 어떤 초록을 보고 계신가요?
그 초록은 충분히 아름다운가요?
행여 무채색 도시의 공간에서 지쳐가고 있지는 않은가요?
때론 아름다운 그림 한 점이 일상을 깨우는 힘이 되기도 한답니다. 좋은 이야기와 함께라면 더할 나위 없겠지요. 여기 초록의 계절에 어울리는 그림책이 있어요. <섬 위의 주먹>은 소년의 이야기면서 할아버지의 이야기기도 해요. 그리고 너무나 아름다운 초록의 정원에 관한 이야기기도 하고요. 거긴 진짜 신기하고 근사한 곳이에요.
루이 할아버지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요. 열세 살에 전쟁과 가난을 겪으며 홀로 타국으로 피난을 왔어요. 글을 읽을 줄 모르고 온몸이 문신으로 가득하고 늘 러닝셔츠 차림이에요. 그런데 소년에게 할아버지는 정말 경이로운 존재예요. 우리가 살면서 잃어버린 걸 전부 가지고 있거든요.
루이 할아버지는 온갖 새들과 이야기할 수 있어요. 심지어 고양이하고도, 이름은 디아볼라예요, 말할 수 있어요(디아볼라와는 가끔 다투기도 해요). 우리도 한때는 그랬을 거예요. 말하지 않는 것들과 말할 수 있을 만큼 자연과 가까웠을 테고 그때는 아마도 조그마한 아이였을 테지요. 아이들은 아무것에나 말을 걸죠. 동물이나 식물은 말할 것도 없고 길가의 돌멩이나 하늘의 구름한테도 인사를 건네곤 하죠.
자연과 가까운 존재였다고 해서 자연 속에서 살았다는 뜻은 아닐 거예요. 대도시의 아파트 단지 한복판에 살아도, 아이들은 자연과 한없이 가깝다고 생각해요. 어른들처럼 자연 위에 올라서려 하지 않으니까요. 무차별적인 개발이 아니면 무조건적인 보호, 어른들은 그것밖에 모르지만 아이들은 대화를 통해 함께 살아가는 법을 알고 있으니까요. 새들과 언제 이야기해보셨나요? 길가의 이름 모를 풀들하고는요? 우리도 아직은 늦지 않았을 거예요.
루이 할아버지는 커다란 초록 손을 가졌어요. 할아버지의 정원은 마술의 공간 같죠. 콩은 하늘까지 올라가고 아티초크는 어른의 머리만큼 커지고 파는 꼭 씩씩한 군인들처럼 자란답니다. 정말 대단해요! 흙으로 된 땅이라곤 밟을 기회조차 드문 우리에게 할아버지의 손은 마법의 손이나 다름없어요.
농작물이나 식물을 키우는 일은 결과보다 과정의 중요함을 깨닫게 되는 일이에요. 정성이 담긴 과정이 쌓이지 않으면 절대로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없고, 혹시라도 기대 이상의 결과를 얻었다면 그 과정엔 반드시 누군가의(자연의) 도움이 있게 마련이니까요.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며, 보통은 회사에서 말이죠, 하는 일이란 항상 과정 말고 결과만 이야기하죠. 심지어 많은 이의 노력이 담긴 훌륭한 결과가 단 한 명의 성취인 것처럼 말하곤 하죠. 너무 야박해요. 때론 무섭기도 하고요. 자연이 하는 일은 그렇지 않거든요. 루이 할아버지는 늘 이렇게 말할 뿐이에요.
“다 땅이 가르쳐 준 거야.”
소년에게 루이 할아버지의 정원은 하나의 세계예요. 꿈꾸기만 할 뿐 도달하지 못하는 이상향이 아니에요. 현실에서 도망쳐 숨는 피난처도 아니에요. 그 자체로 온전히 숨 쉬는 세계예요. 온갖 풀과 나무와 작물이 초록으로 우거지고 꾀꼬리, 박새, 울새, 참새, 나이팅게일, 찌르레기 같은 새들과 고양이 디아볼라가 살아 있는 세계죠. 그리고 루이 할아버지가 있죠. 소년에게 할아버지는 우정의 존재 이상이에요. 훨씬 긴 세월을 먼저 살았고 또 훨씬 넓은 세상을 경험했죠. 그렇지만 세월이나 세상을 소년에게 가르치려 하지 않아요. 그저 곁에 있어줄 뿐이죠. 새들과 이야기하고 직접 기른 작물로 요리를 하며 날씨가 좋을 땐 벚나무 아래에서 기타를 치는 할아버지로서 말이죠.
언젠가 소년은 알게 될 거예요. 루이 할아버지의 정원에서 조금씩 세상을 배웠다는 걸 말이에요. 사실은 루이 할아버지가 소년의 세계였다는 것도 깨닫게 될 거예요. 그때면 할아버지가 소년의 곁에 없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할아버지의 정원은 언제까지라도 초록으로 빛날 거에요. 소년이 할아버지를 기억하는 동안엔 언제까지라도 말이에요.
“너에게는 아직 기타가 크구나. 하지만 걱정 말 거라.
네 손도 금방 자랄 거란다.”
서점에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