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치코

 

원래대로라면 2월은 <이치코의 코스묘스>가 나가는 달입니다. 써야겠다 싶은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게다가 3월의 <소소한 리-뷰>까지도 이미 마음속에 정해져 있었지요. 이리도 부지런한 필자라니, 하지만 스스로 대견한 마음도 잠깐, 삶이란 누군가의 말처럼 ‘계획을 세워. 그대로 인생이 흘러가진 않겠지만, 길을 벗어나 만나는 풍경이 더 멋진 법이니까.’ 분명 누군가 이런 말을 했던 것 같은데..

 

잘 쉬었어?

오늘은 기분이 어때?

— <백 살이 되면> 황인찬 글, 서수연 그림

 

계획일랑은 잠시 잊고 하루를 푹 쉬었습니다. 길 밖의 황홀한 세계를 만났습니다. 서울 한남동에서 열리고 있는 서수연 작가님의 개인전을 다녀왔습니다.

 

 아주 커다란 휴식 Way Back Home

 2024.02.01~2024.02.29 알부스갤러리

 

전시는 두 파트 혹은 세 파트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전시가 세 파트로 되어 있다는 걸 알아채기는 조금 어려울 수도 있는데요. 특히 <백 살이 되면>의 작가로 처음 만나신 분들이라면 두 파트, 그러니까 <백 살이 되면> 그림책의 원화와 그 외의 작품들로 느끼실 확률이 높습니다. 전시장의 배치도 그러한 편이고요.

 

“..그 시가 휴식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이해하는 데 1년 정도 썼던 것 같고..”

 

갤러리에서 준비한 인터뷰 영상에서 작가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백 살이 되면>은 글이 먼저 나오고 그다음에 그림을 그려서 완성한 책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이 순서는 글 작가와 그림 작가가 따로 있는 그림책이 만들어지는 일반적인 방식이기도 합니다. 인터뷰를 통해 전시의 제목인 <아주 커다란 휴식>이 어떻게 나왔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전시장 문을 열고 바로 만나는 1층 공간에 <백 살이 되면>의 원화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한쪽 벽에 설치된 TV 화면에는 그림에 움직임을 넣은 애니메이션을 배경으로 한 낭독 영상이 재생되고 있고요.

 

 

그림책 <백 살이 되면>의 크기도 작은 편은 아니지만, 205✕288mm니까 펼치면 거의 A3 한 장을 가득 채운 크기죠, 그것보다 훨씬 커다란 원화를 통해 작가님 고유의 휴식과 위로의 세계를 만날 수 있습니다. 특히 그림에서 중요한 포인트 컬러로 사용되었지만 인쇄 기술의 한계로 인해 책에서는 제대로 표현되지 못했던 형광빛 주황이나 바다와 하늘을 모두 품은 듯 깊게 반짝이는 파랑은 원화 전시에서만 느낄 수 있는 감동을 선사합니다. 색色이 이렇게 사람을 끌어당기고 감동을 줄 수도 있구나. 만일 전시를 보지 못했다면 인터뷰 영상에 나온 작가님의 말이 무슨 뜻인지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자유로운 색과 다양한 질감으로 동물이나 인물을 그리는 것을 좋아해요. 사람들의 마음에 작은 울림이 되는 그림을 그리고 싶습니다.”

 

1층을 다 둘러보고 나서 지하로 내려갔습니다. 거기엔 ‘퇴근드로잉’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작가님이 매년 ‘퇴근드로잉’ 작품들을 가지고 달력을 제작하고 계시는데, 2024년 달력에 들어간 열네 점의 그림이 따로 한쪽 벽을 차지하고 있었고요.

 

“‘퇴근드로잉’은 제가 일 마치고 집에 가는 길에 간단하게 그렸던 드로잉에서 시작됐어요. 평소에는 아이들 육아도 해야 되고 일도 해야 되고.. 근데 집에 가는 그 퇴근길이 제가 그냥 가만히 있을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고..”

 

작가님은 ‘퇴근드로잉’ 작업을 2050년까지 계속할 목표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세상에, 2050년이라니요, 작심삼일과 천생연분인 양 혼연일체가 된 저 같은 사람은 상상도 하기 힘든 숫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때까지 살아 있을 수 있느냐도 문제이긴 하지만.. 아무튼 앞으로 계속 작가님 그림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네요. ‘퇴근드로잉’은 작가님 인스타그램을 통해서 만나실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누가 봐도 명확히 구분되는 전시의 두 파트입니다.(전시의 영문 제목 ‘Way Back Home’이 ‘퇴근드로잉’을 의미하는 게 맞겠지요?) 갤러리에 입장할 때 들었던 설명도 그렇습니다. ‘전시는 1층과 지하 1층에서 보실 수 있고 3층에는 굿즈가 판매되고 있어요.’ 그렇다면 세 번째 파트는 어디에? 혹시 굿즈인가?

 

지하 1층의 입구 반대쪽 벽에는 ‘퇴근드로잉’과는 조금 다른 분위기의 그림 네 점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림들 앞에는 책이 한 권 놓여 있고요. 작품 수가 많진 않지만, 작가님의 그림이 대중적으로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던 첫 일러스트 작업인 <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이하 <이로운 할머니>) 속 삽화의 원화들이 전시되고 있었습니다. <이로운 할머니>는 오후의 소묘에서 나온 책은 아니지만 오후의 소묘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책인데요. 2020년 여름, 책이 나오고 얼마 안 있어 <편지하는 마음展 : 서수연✕월간소묘>라는 이름으로 <이로운 할머니>에 들어간 작가님의 그림을 월간소묘의 편지들과 함께 전시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면서 얼마나 반갑던지! 그렇다면 <이로운 할머니>의 원화들이 세 번째 파트일까요? 글쎄요..

 

 

‘빈방은 이야기의 결말이 아니라 시작이야.

빈방을 갖게 된 후에야 비로소 태어나는 것들이 있어.’

— <자기만의 방으로> p.56 [열병합 방식으로 그리는 일, 서수연 – 이하 동일]

 

태초에, 아니 태초의 태초의 태초의 태초에, 우주는 빈방이었다고 합니다. 그 빈방이 수많은 별과 행성, 가스구름, 블랙홀 등과 진공으로 가득 차고 930억 광년의 크기로 확장된 시작에는 대폭발이 있었습니다. 단 한 번의 폭발로 우주가 탄생했습니다. 이 대폭발로 우주의 탄생을 설명하는 빅뱅 이론은 우주의 기원에 관한 많은 의문을 해소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빅뱅 이전에 관해서는 설명하지 못합니다. 시간의 흐름 역시 빅뱅과 함께 생겨났으므로 빅뱅 이전이라는 질문은 과학적으로 잘못된 질문이라고도 하지만 그래도 궁금하다고요. 또한 빅뱅 직후의 아주 짧은 시간(플랑크 시간, 10의마이너스43제곱초)에 관해서 전혀 설명할 수 없습니다. 우주 탄생의 바로 그 순간은 여전히 알 수 없는 비밀로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우주의 사정일 뿐이고.

 

나는 우리를 잃지 않으려 애쓰는 동안에도 이따금 그 지하 방을 그리워했다. 혼자 있을 틈 없는 긴 하루, 오늘이 끝나기 전에 내일을 억울해하면서 캄캄한 새벽에 혼자 깨어나 서성이는 날들이 있었다.

‘이 집에 나는 없어. 온통 우리뿐이야.’

— <자기만의 방으로> p.63

 

<아주 커다란 휴식> 전시에서는 서수연 작가님의 그림 세계가 빈방으로부터 탄생하는 과정을 세밀하게 지켜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전시를 보기 전 혹은 보고 난 후라도, 작가님이 참여한 앤솔러지 에세이 <자기만의 방으로>를 함께 보시면 더 많은 풍경을 만날 수 있습니다. 대체 빈방에서 어떻게 이야기가 시작되었는지, 빈방에서 태어난 세계는 어떤 모습인지, 무엇보다 그 과정에서 작가님의 삶이 어땠는지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작가님의 그림만큼이나 감동과 울림이 있는 얘기들이 있습니다.

 

 

살면서 고생을 할 만큼 했다고 생각했는데 육아는 정말 너무 어려웠다. 그래서 더 그림 그리는 것을 잃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

그러던 어느 날 내게 작업실이 필요한 일이 생겼다.

(…)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 있는 게 마음에 들었다. 그곳은 내게 그리을 그리라고 주어진 방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을 게 없었다.

— <자기만의 방으로> p.65~67

 

어떤 작품을 감상하면서 반드시 그 작가의 삶을 함께 보아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가끔은 작가의 이야기가 작품을 더 풍성하게 만들곤 합니다. 서수연 작가님의 그림에는 과장되게 그려진 동물에 기대거나 안긴 사람의 모습이 자주 등장합니다. 어느 정도는 작가님 그림의 시그니처라고 할 만큼 두드러진 점이기도 하기에 그림을 평할 때 많은 사람이 언급하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저에게 가장 큰 울림이 된 부분은 그림 속 대상들이 관계를 맺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려져 있는 대상들이 이렇게까지 서로 강력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그림은 거의 못 본 것 같습니다.

 

 

작가님의 그림에 등장하는 동물과 인물은 ‘따뜻하다’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할 만큼 서로에게 직접적인 애정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얼마나 의지하고 있는지, 얼마나 함께하고 싶은지를 소리내어 말하는 느낌입니다. 서로를 향한 이 강력한 결속력이 작가님의 그림을 따뜻하게 만드는 가장 두드러진 힘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힘이 어디서 왔을까, 작가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 그림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제일 많이 듣는 말은 “그림이 따뜻하네요”였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내 그림이 열병합 방식이어서 그런가 보다 생각한다. 일과 육아가 끝나고 버려지는 폐열을 이용해 온수를 만들고 그걸로 그림을 그리나 보다 생각한다.

— <자기만의 방으로> p.70~71

 

지하 1층의 <이로운 할머니> 삽화의 원화들을 바라보고 오른쪽 벽 한쪽 구석에 작은 책꽂이가 놓여 있습니다. 거기엔 작가님의 그림이 표지나 삽화로 들어간 책들이 가지런하게 모여 있습니다. 그리고 1층에서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참의 벽면에, 3층에서 4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도록과 굿즈 등이 진열된 3층의 자투리 벽면들에, 여러 책이나 잡지에 사용된 원화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전시장 곳곳에 흩어져 있는 이 작업들이 바로 전시의 세 번째 파트입니다.

 

3층에서 보너스로 만날 수 있는 작가님의 작업 도구와 노트들

 

일과 육아를 끝낸 뒤 열병합 방식으로 그리고 있는 ‘퇴근드로잉’, 자신의 그림으로 온전히 한 세계를 구축한 첫 그림책 <백 살이 되면>, 그러면서도 여러 표지와 삽화로 의뢰받은 일을 완성하는 일. 이렇게 부지런하고 촘촘한 세 작업을 둘러보면서 서수연 작가님의 그림들은 지금 빅뱅에 버금가는 에너지를 분출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 우주가 어디까지 팽창할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탄생의 순간을 바로 <아주 커다란 휴식> 전시에 만날 수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합니다.

 

나는 며칠 전 새로운 작업실의 계약서를 썼다. 9평 오피스텔의 4층. 보증금 1000에 월세 40. 관리비 별도. 난방은 열병합 방식.

(…)

아니, 다시 집으로 돌아가거나 이제 그림 같은 건 더는 그리지 못하게 됐어, 그런 말을 하면서 이 방을 떠나게 될 수도 있지. 역시 두렵다. 그래도 열어봐야 아는 거니까.

이 방이 이제부터 내가 그릴 이야기의 시작이다.

— <자기만의 방으로> p.71~72

 

 

서수연 개인전 <아주 커다란 휴식 Way Back Home> | 알부스갤러리

서수연 작가님 인스타그램

<자기만의 방으로>

 

 

 

‘소소한 리-뷰’는 [월간소묘 : 레터]에 연재되고 있습니다.

구독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