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치코

 

[월간소묘: 레터]에 4년 가까이 소소한 산-책을 연재하며 많은 동네책방과 도서관을 다녔습니다. 생활 근거지가 서울이다 보니 수도권에 자리한 책방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긴 하지만 그래도 가능하면 지도상으로 넓게 각 지역의 책방을 다녀보려는 마음으로 책방을 소개했습니다. 하지만 전국 방방곡곡에 좋은 책방이 너무 많아서 꼭 가야지 마음먹고도 아직 발걸음을 하지 못한 곳들이 수두룩합니다. 광역자치단체를 기준으로 해보니 충북, 세종, 광주, 대구, 전북, 경남, 울산을 아직 못 가봤네요.(전라북도는 전주를 가긴 했지만 너무 짧은 방문이어서 소소한 산-책에 소개하지는 못했습니다.) 조선팔도 책방 구경이 참 어렵습니다. 조선도 아니고 팔도도 아니지만요.. 이렇게 글을 시작하니 왠지 소소한 산-책 연재를 끝내는 고별사의 낌새가 물씬 풍깁니다만, 절대, 네버, 소소한 산-책은 세상에 책방이 존재하는 한 멈추지 않을 겁니다. 게다가 아직 해외 책방을 한 번도 산-책하지 못했는데 이렇게 문을 닫을 수는 없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방 말고 다른 얘기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상엔 고양이와 책방 말고도 뭐가 많잖아요. 영화나 공연 같은 문화 활동뿐 아니라 우리의 일상이 단정한 모양으로 구축되도록 도와주는 다양한 물건들, 자연과 건축물, 운동이나 여행 같은 육체적 활동 등등.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픈 것들이 많습니다. 그 얘기를 [월간소묘: 레터]에 연재해 보고 싶었습니다. 왜? 라는 물음에 답할 만큼 이유가 있는 건 아니지만, 뭐라도 글을 써야 매달 레터가 나갈 수 있다는 직장인의 마음도 있고.. 아무튼 이번 달부터 새롭게 시작하는 소소한 리-뷰, 시작하겠습니다.

 

첫 순서는, 예상하고 말 것도 없이 당연히 책이겠지요? 네, 책입니다. 그런데 글 제목에는 작가들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네요? 쟁쟁한 이름들이 연달아 적혀 있으니 사뭇 거창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이것은 혹시 작가에 대한 리-뷰인가, 싶으실 수도 있으나 전혀 그렇지 않으니 안심(?)하시고요. ‘불타는 작품/파견자들/설자은, 금성으로 돌아오다’ 이렇게 책 제목을 나열하자니 너무 길어서 작가님들 이름을 넣었을 뿐입니다. 또한 각 작품을 심층적으로 분석하거나 비평하거나 수준 높은 리뷰를 쓸 계획이 아니기 때문에 작가님들 이름 뒤에 살짝 숨으려는 (얍삽한) 의도 역시 조금은 있었고요. 사정이 어찌 되었건 ‘윤고은/김초엽/정세랑’이라니, 근사한 제목이 아닐 수 없네요! :)

 

사실 저는 책읽기를 본격적으로 즐기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서른이 다 되어서야 책을, 취미로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전에 책을 전혀 안 읽었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즐겼다고 하기엔 무리가 있었습니다. 주변에서 읽으라고 하니까 읽고, 왠지 읽어야 할 것 같으니까 읽고, 그러다 가끔 흥미가 돋는 책이 있으면 (정말 가물에 콩 나듯) 스스로 찾아 읽기도 하는 정도였습니다. 독서를 좋아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하는 얘기가 있습니다. “책을 많이 읽는다고 해서 삶이 극적으로 달라지는 일은 잘 없다. 살면서 책을 꼭 읽어야 할 이유가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부분은 ‘하지만’ 이후에 등장하는 얘기일 텐데, 저는 과감하게 ‘하지만’ 앞에서 따옴표를 닫았습니다. 책 많이 읽는다고 뭐..!

 

그런데 언젠가부터 독서가 즐거워졌습니다. 책 읽는 게 재미있어지더라고요. 학교 다닐 때 선배들이 세미나(학술/전공 세미나가 아니라 의식화/조직화 할 때 그 세미나에 가까운, 세미나라는 이름으로 후배들에게 특정 사상을 막 주입하곤 했던 매우 건전한 모임)를 한다고 책 읽어 오라고 하면, 세미나 자리가 시작하기 직전에 목차만 휘리릭 정독(목차를 꼼꼼히 읽는 게 중요한 포인트)한 뒤 마치 책을 다 읽은 듯 뻔뻔스럽게 앉아 있곤 했던 사람으로서 희한한 일이었습니다. 독서가 재미있어지다니. 그렇게 특별한 계기랄 것 없이 ‘취미는 독서’인 사람이 되었지만 읽는 책들은 편중되어 있었습니다. 대부분 인문, 사회과학 분야의 책들만 읽었습니다. 인문보다도 사회과학 책의 비중이 더 높았고요. 소설은 거의 안 읽었습니다. 이상하게 재미가 없었습니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사건보다 인문/사회과학 책에 등장하는 실제 현실 속 인물, 사건, 역사가 훨씬 흥미로웠습니다.

 

형제님들..

 

소설 읽기의 실패와 극복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책이 바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입니다. 총 3권 1,604쪽(민음사에서 2018년 발간된 세트 기준)에 달하는 이 방대한 책을 약 10년의 세월 동안 세 번이나 시도한 끝에 겨우 다 읽었습니다. 처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집어 든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유명한 책이니까. 우연히(?) 집에 있길래. 러시아 고전문학 읽기의 어려움을 모르는 바 아니었으나 한번 읽어보자 싶었습니다. 결과는 당연히 실패. 1권의 도입부마저 얼마 읽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돌이켜보면 실패의 원인이 명확했습니다. 침대 옆에다 두고 잠들기 전에 조금씩 읽으려고 했는데 이 책으로 그게 될 리가.. 몇 년 뒤 두 번째 시도에서는 그래도 1권의 절반은 넘게 읽었습니다. 하지만 도스토옙스키 선생님 특유의(혹은 러시아 고전문학 특유의) 문체에 결국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스토리는 별로 진행되는 게 없는데 등장인물의 대사는 왜 그렇게 장황한지, 따옴표가 한번 열렸다 하면 두세 페이지에 걸쳐 안 닫히기 일쑤인 상황을 극복하지 못하고 책을 덮었습니다.

 

아, 이 책은 나랑 안 맞는구나. 그쯤 되면 포기할 만도 하지만 또 몇 년 뒤에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다시 도전해서 2018년 12월 23일 드디어 완독에 성공하게 됩니다. 세 번째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읽을 때 ‘이번에야말로 꼭 끝까지 읽어야지!’라는 결연한 다짐이 있었던 건 아니었습니다. 이상하게도 책이 재미있었습니다. 그 늘어지는 대사에 녹아든 인물들의 고뇌와 갈등이 마치 눈앞에서 재현되는 실제 사건처럼 생생하게 다가왔습니다. 신기한 경험이었습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소설이라곤 읽지를 않았는데. 그사이 저한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무슨 일은 아니고 누군가가 있었습니다. 황정은 선생님. 우연히 읽은 황정은 선생님의 책에 대책 없이 매료되어 버렸고 출간된 모든 책을 연달아 읽었습니다. 아, 소설이 이렇게 아름다운 것이었구나. 그제서야, 나이 마흔이 훌쩍 넘어서야 깨달았습니다. 그다음에 소설 읽는 재미가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적극적으로 소설을 읽기 시작했습니다.(그렇다고 엄청 많이 읽은 건 아니고요..) 맘에 쏙 드는 작품도 있고 알쏭달쏭 알 수 없는 작품도 있고 그다지 감흥이 없는 작품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소설을 읽는 동안 대체로 재미있다고 느꼈습니다. 재미가 있으니 더 자주 찾아서 읽게 되고 목록이 쌓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좋아하는 작가들도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당연히 ‘넘버 원’만 존재했습니다. 그러니까 황정은 선생님. 그러다 베스트 쓰리, 베스트 파이브로 늘었고 지금은 베스트 세븐 정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 목록에 있는 이름들은 고정된 게 아니라 들락날락 유동적입니다. 베스트 X에서 X는 고정값이기 때문에 새 이름이 들어오려면 당연하게도 원래 있던 이름 하나는 빠져야 합니다. 하지만 새로 들어올 이름은 확정되었는데 도저히 빼야 할 이름이 없을 때면 X의 값을 (슬그머니) 늘립니다. 그러다가 베스트 원헌드레드 정도 되면 이게 무슨 베스트인가 싶어질 것 같기도 있지만, 그러면 또 어떤가요, 좋아하는 작가들이 그만큼이나 많다면 얼마나 행복한 독서 생활이겠습니까!

 

행복한 독서 생활, 지난 12월이 딱 그랬습니다. 베스트 세븐에 속하는 작가들의 신간을 연달아 세 권이나 읽었습니다. 이런 복이 찾아올 확률은 그리 높지 않습니다. (앤솔러지 등을 제외하고 오롯이 본인 이름으로만) 작가들이 대략 1년에 한 권 책을 낸다고 치면 1.74개월에 한 번씩 베스트 세븐 작가들의 신간을 볼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두 달에 한 권 남짓 좋아하는 작가의 신작을 만나는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 저의 평균값인데 이번에는 몇 배나 커진 복이 굴러들어 온 것입니다. 게다가 세 권 모두 장편이라니!(소설집도 좋지만 아무래도 장편의 아우라가 있으니까요.) 복권이라도 맞은 것처럼 황홀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불타는 작품>, <파견자들>, <설자은, 금성으로 돌아오다> 이렇게 세 권의 책으로 어느 해보다 충만한 연말이었습니다.(읽은 시기와 무관하게 책의 발행일은 모두 10월이고 나열한 순서 역시 발행일순입니다.)

 

 

<밤의 여행자들>을 통해 윤고은 작가를 처음 접했습니다. 책이 출간되었던 2013년에 읽은 건 아니고요. 2021년에 영국추리작가협회(CWA)가 주관하는 대거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을 듣고 궁금해서 읽게 되었습니다. 기발했습니다. 재난으로 폐허가 된 지역을 관광하는 ‘재난여행’을 기획하는 프로그래머라니. 흥미진진했습니다. 숨겨진 비밀과 뒤통수를 치는 악당과 예측할 수 없는 반전. 순식간에 윤고은 소설의 매력에 빠져들었고 주저 없이 (당시 기준) 베스트 파이브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하지만 기발함과 재미, 이런 요소들 때문에 윤고은 작가의 세계에 사로잡힌 건 아닙니다. 윤고은 작가를 고유하게 만드는 한 가지 매력이 더 있었습니다. 딜레마. 소설 속 인물들이 겪는 딜레마가 현실의 어떤 상황보다 실감 나게 느껴졌고, 마치 딜레마 속 인물들과 하나가 된 것처럼 마음이 껄끄러웠습니다. 그런데 인간 존재의 근본을 고민하는 실존적 딜레마,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인물의 극단적인 딜레마 등과는 조금 달랐습니다. 사람을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드는 답답함까지는 아니고 직장인이라면 한 달에 두세 번쯤 선택을 고민하게 되는 애매한 상황 같은 찜찜함이라고나 할까요. 만약 이름을 붙인다면 생활 밀착형 딜레마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불타는 작품> 역시 그 점이 두드러지는 작품이었습니다. 로버트 재단의 후원으로 배달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지긋지긋한 현실을 떠나 작품 활동에 전념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지만, 전 세계의 예술가 중 자신을 꼭 집어 선택한 ‘로버트’가 개dog라는 사실을 알게 된 주인공. 게다가 후원의 조건으로 작품 하나를 골라 소각해야 한다는 사실. 원본과 복제와 아우라, 발터 벤야민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을 떠올릴 만큼 깊어질 수도 있는 딜레마지만 <불타는 작품>에서 이 상황들은 훨씬 윤고은적으로, 그러니까 적당한 생활 밀착형 딜레마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이란 무엇인가? 작품의 진정한 가치는 무엇인가? 예술가와 작품은 어떤 관계인가? 등의 고차원적인(동시에 고리타분한) 질문은 어쩌면 이 책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작품이 불타는 상황에 다다른 클라이맥스가 아니라 그전에 벌어지는 각종 좌충우돌 에피소드였습니다. 주인공이 로버트 재단의 제안을 수락하고 작품 창작을 위해 재단 소재지로 가기 위해 미국에 도착했으나, 캘리포니아 지역의 대형 산불 때문에 가이드와 길이 엇갈리고 담당자와 연락마저 끊기며 시작부터 곤란함을 겪습니다. 공항을 벗어나기 위해 숙소를 알아보지만 근처 호텔은 모두 만실, 숙박 가능한 호텔을 겨우 찾았으나 오래된 곳이어서 화장실을 2:1로 쓰느냐 n:1로 쓰느냐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 나중에 연락이 닿은 담당자의 안내로 재단과 제휴된 곳에서 근사한 무료 식사를 즐기지만 식당의 배신으로 밥값을 지불해야 할 처지가 되고, 공항에서 신용카드를 잃어버려 수중의 현금으로는 13달러가 부족한 상황에서 하필 2:1로 화장실을 공유하는 옆방 사람에게 돈을 빌리는 상황, 그리고 소설 후반부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똥(주요 스토리라 자세히 밝힐 순 없지만..)에 얽힌 각종 상황 등등. 소설이 진행되는 내내, 어휴 어쩜 이래.. 에? 설마.. 라는 말이 끊길 새가 없는 딜레마적인 상황이 계속 펼쳐집니다.

 

이런 특징 때문인지 윤고은 작가의 작품은 다 읽은 뒤에 머릿속에서 정리가 되지 않은 채 마구 엉켜 있습니다. 사실 대부분의 좋은 작품들이 그렇긴 하죠. 아이언맨이 손가락을 튕겨 타노스를 없애고 지구를 구한다, 감동! 같이 편안한 맺음은 좀처럼 없습니다. 심지어 거기에도 아이언맨의 희생이라는 엇나감이 있으니까요. “뛰어난 작품은 일단 사람들을 불편하게 한다는 사실을 모르십니까?”(최진영 소설 <단 한 사람> 중에서) 좋은 작품은 늘 무언가 헝클어져 있고 불편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윤고은 작가의 불편함은 조금 특이합니다. 말이 나온 김에 <어벤져스: 엔드게임>으로 다시 비유하자면, 아이언맨의 희생이라는 ‘가치’로 인해 불편함을 느끼는 게 아니라 손가락을 튕기는 행위 자체, 선택의 상황이 만들어내는 그 순간의 조명, 온도, 습도에 천착하게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피니티 건틀렛 안에 땀이 많이 찼을 텐데 안 미끄러지고 잘 튕길 수 있을까, 같은 사소하지만 그냥 지나칠 수만은 없는 질문들 말입니다. 이렇게 우리 일상에 끈적하게 달라붙는 이야기와 딜레마를 도대체 어떻게 만들어 낼 수 있는지.. 윤고은 작가는 정말 다음 작품이 언제 나오나 목이 빠져라 기다리게 되는 소설가가 아닐 수 없습니다.

 

다음으로 읽은 책은 김초엽의 작가의 <파견자들>과 정세랑 작가의 <설자은, 금성으로 돌아오다>입니다. <파견자들>에서 주인공은 파견을 나가고 <설자은..> 에서 주인공 설자은은 금성으로 돌아옵니다.. 끝. ??..??

 

P.S. 역시 한정된 지면에 세 작품을 말하기는 무리네요. 벌써 원고지로 30매를 넘고 있어서 두 책은 다음을 기약해야 할 듯합니다. 당초 이번 소소한 리-뷰는 소설의 서평이 아니라 윤고은, 김초엽, 정세랑 작가에 대한 사랑과 존경을 표하려는 의도였으므로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한데요. 워낙 유명한 작가분들이시라 추천이란 말이 필요할까 싶지만 혹시라도 <불타는 작품>, <파견자들>, <설자은, 금성으로 돌아오다>를 아직 안 읽으셨다면 얼른 읽어보세요. 절대 후회하지 않을, 불태우지 않아도 최고의 작품들이랍니다. 세 작가님들, 사랑합니다. 건강하세요! 그럼 이만. 해피 뉴 이어!

 

 

 

‘소소한 리-뷰’는 [월간소묘 : 레터]에 연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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