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5일. 대청소를 하고 신간 그림책 <눈의 시>를 역자 두 분과 디자이너께 부치고 나니 날이 어둑해졌어요. 집으로 곧장 들어오지 않고 망원으로 향했습니다. 좋아하는 디저트 가게에서 마카롱을 사고, 그날도 열었다는 작은 책방으로 발을 옮겼어요. 북적이는 시장통에서 골목 하나만 돌아 들어가면 조용하고 한적한 분위기로 바뀌어요. 작은 불빛을 따라가니, 소박한 크리스마스 장식이 먼저 인사를 건네는 작업책방 ‘ㅆ-ㅁ’(이하 씀)이 있었습니다.

 

 

“그녀가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글을 쓰기 위한 적당한 분위기였다. 의자가 바닥 위에서 불안스럽게 삐걱거리는 소리, 집 밖에서 들려오는 소음, 냄새…… 그녀는 글쓰기에 필요한 이 요소들을 일컬어 ‘내가 환각의 세계로 들어서는 것을 목격할 감각적 증인들’이라고 표현했다.”

– 타니아 슐리, <글쓰는 여자의 공간> 중에서

 

문을 열자마자, 작업책방 씀에서 책방 소개글에 직접 인용한 한 구절이 자연스레 떠올랐습니다. 크리스마스였으니 요란하고 홀리한 캐럴이나 시즌 곡들이 흘러나올 법한데 책방 안은 고요했어요. 책상에서는 교정지 위로 연필 사각이는 소리가, 서가에서는 책들끼리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 “환각의 세계로 들어”선 기분이었습니다. 그 멋진 공간을 운영하는 책방 주인은 ‘영화와 일상을 글로 쓰는 이미화, 일기를 쓰며 소설을 상상하는 윤혜은’, 두 명의 작가예요. 그리고 한 구석 아늑하게 꾸려진 작업실의 또 다른 주인공은 최근 띵 시리즈의 한 권인 <고등어: 엄마를 생각하면 마음이 바다처럼 짰다>를 쓴 고수리 작가님이었답니다.

망원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작업책방 씀은 지난 11월에 가오픈 하고 12월부터 정식 운영하고 있는 서점이에요. ‘작업책방’이라는 이름답게 매달 한 작가를 선정해 작가가 매일 읽고 쓰는 작업 공간을 구현하는 ‘작가의 책상 展’이 열린다고 해요. 12월은 고수리 작가의 책상 전이었고요. 이달의 작가를 꼽아서 소개하는 서점이 이미 있고 독창적인 콘셉트는 아님에도, ‘책상 전’으로 차별화한 점이 흥미로웠어요.

마치 작가의 책상을 그대로 옮겨온 듯 작가가 사용하는 필기구, 막 적어놓은 듯한 메모, 편지와 카드들까지 일상감이 묻어나 작가가 책상에 앉아 있는 모습, 그리고 골똘한 얼굴까지 그려볼 수 있었어요. 책장에서 뽑아든 책들에는 작가가 표시해둔 페이지가 빼곡해서 이미 읽은 책마저 작가의 시선으로 새롭게 보였습니다. 또 무엇보다 교정지를 들여다보는 재미가 컸어요. 하나의 책이 탄생하기 위해 편집자와 작가가 주고받은 고민과 그 고민의 결과들이 오롯이 드러나는 장소가 바로 교정지니까요. <고등어: 엄마를 생각하면 마음이 바다처럼 짰다>에서 ‘엄마가 좋다니까 나도 좋아’라는 꼭지와 그 제목이 쓰인 마지막 문단을 좋아하는데, 그 문장들의 원형과 작가가 애써 고친 문장이 겹치고 비끼며 또박또박 적힌 페이지를 들여다보고 있자니 괜히 뭉클하고 좋아하는 마음이 더 커졌어요. 다른 서점들이 ‘책’을 중심에 놓고 있다면, 이곳은 ‘작업’에 방점을 찍고 있다는 것이 자연스레 느껴지는 공간이었답니다. 작은 메모 붙이고 왔는데 보셨겠죠?

살뜰하게 꾸려진 책상 전 오른편 너머에는 큰 테이블이 놓여 있어요. 지금은 코로나 상황으로 빛을 보지 못하고 있지만, 독서모임이나 북토크가 열리고,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고 글을 쓸 수 있는 공간이라고 해요. 서가에는 책방의 얼굴인 두 작가가 정성스레 선별한 책들이 꽂혀 있었습니다. 저는 그중 지난해 3월 월간소묘에서 소개한 작가 다와다 요코의 소설 <눈 속의 에튀드>를 골랐습니다. 아주 추운 날 읽기 좋아요.

 

“공기보다 더 어두운 무엇인가가 중간 지역에서 펄럭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눈송이였다. 눈이 온다! 그리고 또 한 송이. 눈이 온다! 그리고 또 한 송이! 눈이 온다! 눈송이들이 여기저기에서 춤을 춘다. 눈이 온다!”

– 다와다 요코 <눈 속의 에튀드> 중에서

 

 

﹅ 작업책방 씀 https://www.instagram.com/booknwork_sseum/

 

 

 

* ‘소소한 산-책’ 코너에서 독자 투고를 받습니다. 제 걸음이 미처 닿지 못한 곳들의 이야기도 전하고 싶어요. 분량 제한은 없습니다. 짧아도 좋고요. 자유롭게 여러분의 산-책 이야기 들려주세요. 해당 메일(letter@sewmew.co.kr)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선정된 분께는 오후의 소묘에서 준비한 굿즈와 신간을 보내드립니다. 소중한 원고 기다리고 있을게요.

 

‘소소한 산-책’은 [월간소묘 : 레터]에 연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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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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