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걸음했다 문 앞에서 발길을 돌려야 했던 서점. 네, 합정에 자리한 아트북 전문서점 ‘B플랫폼’을 산책했어요. 이달의 책의 저자, 무루 님이 애정하는 곳이기도 하답니다 :) 개인적으로는 전달에 있었던 이명애 작가의 <내일은 맑겠습니다> 전시를 놓쳐 무척 아쉬웠는데, 이번엔 최도은 작가의 <무용한 오후> 원화전이 열리고 있어 아주 반갑고 기쁜 마음으로 다녀왔습니다. 무용하지만 아름다운 그림과 함께 전해요.

 

B플랫폼은 아티스트북과 그림책을 판매하고, 전시를 하고, 책 제작과 관련한 수업을 꾸리고 있는 서점이에요. 하지만 서점보다 갤러리에 들어선 느낌이 더 강하게 밀려듭니다. 아니나 다를까 ‘아트북 라운지’라는 표현을 쓰고 있네요. 아트북 독립출판 스튜디오움도 운영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연초에는 프랑스의 일러스트레이터 Juliette Binet의 첫 그림책 <Edmond>를 내놓기도 했지요.

 

 

해외 작가들의 작품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국내 독립출판 작가 작품이나 시중에 유통되는 그림책들도 한쪽에 마련되어 있어요. 책들은 일반서점처럼 평대 위에 놓인 것이 아니라 유리케이스 안에 전시되어 있고요. 전면서가에 놓인 책들의 표지마저 모두 하나하나 작품처럼 느껴집니다. 작품들 사이로 난 길을 산책하며 우선 표지를 감상하고 마음이 머무른 작품을 만져보고 펼쳐보고, 그러다 보면 시간이 훌쩍 흘러 있어요. 아티스트북이 많아 독특한 종이와 바인딩부터, 2차원을 넘어 3차원 어쩌면 5차원까지 나아가는 듯 보이는 책의 여러 실험들, 무엇보다 아름답고 때로는 낯선 그림과 문자. 조금 다른 시공간에 와 있는 듯해요.

서점 공간 한쪽으로는 길고 작은 복도가 나 있고 그 복도를 따라 왼쪽으로는 진짜 갤러리가, 복도 끝에는 스튜디오가 있습니다. 갤러리에서는 최도은 작가님의 그래픽 에세이 <무용한 오후> 원화 전시가 한창이었고요.

 

 

최도은 작가가 지난해 5월 독립출판으로 펴낸 작품집 <토성의 고리>가 무척 좋았기 때문에 신간 소식 듣고서 설레며 기다렸더랬어요. 지난 3월 <무용한 오후>라는 타이틀을 달고 상출판사에서 출간되었고요. 원화전은 4월 23일부터 B플랫폼에서 열렸습니다.(5월 10일까지) 저는 25일에 다녀왔어요. <무용한 오후>는 어느 오후의 단상들을 글이 아닌 그림으로 표현한 그림 에세이 단편선입니다. 작가의 말을 옮겨볼게요.

 

늦은 오후, 쓸모없이 보낸 시간의 틈 사이로 말풍선들이 떠다닙니다. 생각들은 여러 모양을 달리하며 나에게 부딪혔다 사라집니다.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것들이 녹아내립니다. 세상을 이미지로 그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책의 왼편에는 주제어가 해시태그처럼 달려 있고 오른편에 그 해시태그에 대한 이미지들이 펼쳐져 있어요. 책의 원화전은 인쇄된 그림의 원본을 보는 즐거움도 크지만, 진짜 묘미는 한 권의 책이 완성되기까지의 과정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데 있는 듯해요. <무용한 오후>의 스케치 한 장 한 장부터 차례로 더미북들을 보며 떠다니던 말풍선들,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워 녹아내린 것들이 어떤 경로를 거쳐 이미지로 표현됐는지 확인하며 책과 작가를 더 깊게 만날 수 있었어요. 책에는 우울의 정서가 낮게 흐르고 있지만, 오월의 주제가 ‘낭만’인 만큼 ‘초콜릿’ 편을 함께 볼까요.

 

 

이번에 출간된 책 <무용한 오후>에는 왼편의 주제어 외에 그림 영역에는 어떤 글도 없어요. 말풍선 안에 대사가 있는 듯 보이지만 그마저도 이미지로 처리되어 있고요. 이전에 독립출판으로 나온 책에는 ‘우울할 때 초콜릿을 먹으면 기분이 좋아집니다’처럼 저자의 목소리가 명확히 드러나 있었네요. 스케치는 좀 더 구체적이고요. 두 친구가 나란히 걸으며 대화를 나누는 장면으로 시작해요. ‘우울해, 세상 망해라’, ‘우울할 때 초콜릿을 먹어봐, 기분이 좋아질 거야.’ 그런데 더미북에서는 좀더 간결해집니다. ‘아-’, ‘하하하’, 그리고 ‘행복은 단순하다’라는 메모. 완성된 책을 다시 볼까요?

 

‘우울할 때 초콜릿을 먹으면 기분이 좋아집니다’는 #멜랑콜리 초콜릿으로, ‘우울해, 세상 망해라’ ‘우울할 때 초콜릿을 먹어봐, 기분이 좋아질 거야’라는 대화는 #달콤한 인생으로, 초콜릿 인간들이 모두 ‘하하하’ 웃던 장면에서는 ‘하하하’가 말풍선 속 글자가 아니라 주제어로 쓰였어요. 이 차이가 흥미로워요.

흔히 글을 쓸 때 가능한 구체적으로 쓰라고 하는데요. 그림(책)은 빼면 뺄수록 전해지는 것의 종류가 다양해지고 크기는 더 커지고 밀도도 더 높아지는 것 같아요. 이달의 책 <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에서 무루 작가는 ‘그림책은 시를 닮았다’고 썼어요.

 

<무용한 오후>는 산문에서 시가 되는 과정을 거친 것이겠지요. 이 아름다운 그림 에세이 함께 보며 무용하고 아름다운 오후들 보내셨으면 해요.

 

 

이렇게 마무리할 뻔했어요. 산 책을 소개해야겠죠? 당연히 <무용한 오후>를 샀고요.(더 당연히 출간되자마자 샀지만, 선물용으로요 :) 무루 님의 ‘그림책 작가 읽기’에서 요안나 콘세이요 수업을 듣고 있는 터라 콘세이요의 <M: come il mare(바다처럼)> 원서도 마지막 한 권 남아 있던 것을 데려왔습니다.(<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 초고에 콘세이요 이야기가 있었는데, 책에서는 빠졌어요. 너무나 아름다운 글인데 언제 다시 소개할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 그리고 4월의 산책이었던 만큼 ‘사월의 숲’이라는 제목을 가진 손호용 작가의 <The Forest of April / BIJARIM>을 냉큼 집어들었는데요. 바인딩 없이 가로세로 두 번 접지된 세 장의 종이가 겹쳐 있어 모두 펼쳐 연결하면 뒷면이 포스터가 되어요.(이렇게 재밌는 실험들로 가득한 책들을 만나볼 수 있는 것도 큰 재미예요.)

 

마지막으로 Christine Flament의 아트북 <Z’oiseaux de jardin(새의 정원)> 자랑을 좀 할게요. 흑백의 풀숲이 펼쳐져 있고 책장을 넘기면 색색의 작은 새들이 나타나요. 재밌는 점은 흑백의 정원이 그려진 앞면과 색색의 새들이 나타나는 뒷면을 가진 한 장의 종이가 그림을 따라 커팅이 되어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앞장과 뒷장이 별개의 독립된 장면이 아니라 마치 숨어 있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감각을 선사해주어요. 사슴벌레가 죽은 나뭇가지들 위로 지나다니던 풀숲에는 나뭇가지 아래에 아기새들이 있고요, 아기새에게 먹이를 물어다주는 어미와 아비까지 다정합니다. 나비만 날아다니는 줄 알았던 나무 안에 비둘기가 친구를 기다리고 있었네요. 제가 가장 사랑하는 포인트는, 마지막 장면에 있어요. 그림을 묘사하기보다 글을 전할게요. “Ouh la la, c’est le chat! Sauvez-vous vite!”(세상에, 고양이가 있어! 어서 몸을 피하렴!)

 

 

 

 

 

* ‘소소한 산-책’ 코너에서 독자 투고를 받습니다. 제 걸음이 미처 닿지 못한 곳들의 이야기도 전하고 싶어요. 분량 제한은 없습니다. 짧아도 좋고요. 자유롭게 여러분의 산-책 이야기 들려주세요. 해당 메일(letter@sewmew.co.kr)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선정된 분께는 오후의 소묘에서 준비한 굿즈와 신간을 보내드립니다. 소중한 원고 기다리고 있을게요.

 

‘소소한 산-책’은 [월간소묘 : 레터]에 연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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