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의 소묘는 지난해 4월부터 여섯 권의 그림책을 펴냈지요. <섬 위의 주먹>을 시작으로 비올레타 로피즈 그림책 시리즈 4종을 완간하고 <아홉 번째 여행>과 <허락 없는 외출>까지 국내 작가의 그림책 두 권을 이어서 소개했는데요. 저희 책 이야기는 인스타그램에서 영상으로 만나보실 수 있고, 이달의 편지에서는 연말정산으로 저희 책을 제외한 국내 출간 도서 중 제가 올해 처음 읽은(올해 나온 책이 아닌) 그림책을 대상으로 열 권을 꼽아보았습니다. 책 제목 기준으로 가나다 순이에요.
1. 요안나 콘세이요 <까치밥나무 열매가 익을 때>(백수린 옮김, 목요일, 2020) #올해의애도
요안나 콘세이요는 이제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는 작가죠. 올해 <잃어버린 영혼> 원화와 더불어 전작 전시가 있었고, 번역본도 세 권 출간되었습니다. 그중 콘세이요의 신작인 <바다에서 M>이 크게 주목받았는데요. 저도 올해의 그림책 후보로 꼽을 만큼 좋았으나 여러 작가를 소개하고 싶어 짧은 고민 끝에 리스트에는 <까치밥나무 열매가 익을 때> 한 권만 올리기로 했어요. 올해의 그림책 세 손가락 안에 꼽겠습니다.
원서로 처음 만났을 땐 일러스트집인 줄 알 만큼 일반적인 그림책의 형식에서 조금 벗어나 있습니다. 파편적인 그림과 메모들, 어쩌면 그림 에세이라고 해도 좋을 거예요. 콘세이요는 이 책에서 한 남자, 앙리의 마지막 날들을 보여줍니다. 책장을 덮고 나면 마음에 큰바람이 지나고 나무의 마른 잎이 오소소 떨어지는 듯해요. 고요히 그 풍경을 바라보고 곱씹게 됩니다.
콘세이요가 이 이야기를 쓰고 그리는 뒷모습에 관해 무루 님이 쓴 아름다운 글을 함께 읽으면 이 책을 더 깊게 만날 수 있습니다.
﹅ 무루 ‘슬픔으로부터 스스로를 구하는 법’(코너 속 코너 #올해의연재)
*한 가지 소식을 전하면, 콘세이요의 그림책이 오후의 소묘에서 2021년 봄에 소개될 예정이에요. 꽃에 관한 이야기고, 봄이 기다려져요.
2. 에쿠니 가오리, 아라이 료지 <몬테로소의 분홍 벽>(김난주 옮김, 예담, 2017) #올해의모험
이 책은 5월의 편지에서 소개했지요. 5월의 책인 <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에 등장하는 그림책들 중 하나로, 당시 레터에 이렇게 적었네요.
“책을 덮고 오래 매만지게 된 실 한 가닥은 <몬테로소의 분홍 벽>입니다. 주인공인 연갈색 고양이 하스카프는 ‘꿈에서 본 분홍 벽을 찾아 모든 것을 버리고’ 모험을 떠나요. (… 이런) 낭만에는 어딘가 슬픈 구석이 있습니다.”
모험이 어려운 날들이어서인지 자꾸만 펼쳐보게 되는 책이에요. 그림도 아름답고요. 아라이 료지의 그림은 색감이 좋고, 스케일이 크면서도 디테일이 살아 있어요. 자유롭고 서정적인 그림으로 마음을 크게 울리는 작가입니다. 올해 4월 <오늘은 하늘에 둥근 달>이 국내에 번역되어 나왔고, 전작 <아침에 창문을 열면>과 짝을 이루는 것처럼 보여요. 이번 신간은 <몬테로소의 분홍 벽>보다 훨씬 회화적이고 환상적이어서 어쩐지 고흐의 그림을 떠올리게도 합니다. <몬테로소의 분홍 벽>이 모험과 낭만에 관한 이야기라면, <오늘은 하늘에 둥근 달>은 각자의 자리에서 하루를 살아낸 이들에게 보내는 응원 같아요. 전혀 다른 결을 지녔지만 함께 보아도 좋겠지요.
3. 하비에르 사에스 카스탄, 마누엘 마르솔 <뮤지엄>(로그프레스, 2019) #올해의오마주
누구나 자신이 선호하고 아름답다고 느끼는 그림 스타일이 있을 거예요. 그림책을 선택하는 데 그림에 대한 취향은 중요한 기준이 될 것이고요. 이런 이야기로 시작하는 이유는, 이 책이 제가 적극적으로 선택해서 볼 그림 스타일의 책이 아니었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무루님의 그림책 수업에서 만났다가 그만 반해버리고 말았답니다. 이야기, 혹은 책과 독자, 혹은 예술과 삶에 관한 스타일리시하고 재치 있는 은유. 호퍼, 마그리트, 보르헤스, 장자, 앙리 루소, 오키프, 히치콕을 넘나들며 다양한 레퍼런스를 가지고 글 없이 그림으로만 전개되는데, 몰입도가 높고 금세 다음 장을 넘기게 만들어요. 그림이 꼭 내 취향이 아니더라도 주제, 메시지가 나에게 와닿고 그림이 그 주제에 부합하는 스타일로 잘 표현됐다면 매력을 느낄 수밖에 없는 거겠죠.
4. 안 에르보 <바람은 보이지 않아>(김벼리 옮김, 한울림어린이, 2015) #올해의감각
안 에르보의 작품은 아주 예스럽거나 아주 귀여워요. 이 책은 어느 쪽이냐 하면.. 아주 멋집니다. 정말 멋져요. 보이지 않는 바람의 색을 찾아나선 소년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시각장애인도 함께 읽는 그림책’으로 타공, 형압/엠보싱, 에폭시 같은 가공을 통해 시각 외의 감각까지 활용하도록 구성했어요. 이 작가는 정말 아티스트구나. 감탄과 동시에 제가 그동안 얼마나 시각에만 크게 의존해왔는지 뼈저리게 느꼈고요. 감각이 재편되면 세계도 재편된다는 어쩌면 당연한 사실을 새삼스럽게 상기하게 됩니다.
안 에르보는 작년 이맘때 해외에서 신작(귀여운 쪽, 고양이가 주인공!)을 발표했고, 오후의 소묘에서 소개해보고자 했으나 다른 출판사에서 판권을 가져가게 되었어요. 국내에도 곧 소개되지 않을까요. 독자로서 기다리고 있답니다. 그전에 근작으로 <비가 올 거야> 먼저 만나보셔도 좋을 거예요. 귀엽고도 조금 예스러운 쪽.
5. 키티 크라우더 <밤의 이야기>(이유진 옮김, 책빛, 2020) #올해의분홍
“우리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며 내가 분홍빛 표지에 ‘밤의 이야기’라는 책을 쓰는 꿈을 꾼 사라 도나티에게”
불면의 밤을 상냥하게 재워줄, 혹은 함께 지새워줄 분홍의 밤 이야기 세 편. 모두를 재우고 자기 자신을 위해 마지막으로 징을 치고 웃음을 터뜨리는 밤 할머니, 시를 적은 친구의 돌멩이를 머리맡에 두고 자는 부 아저씨, 이야기와 함께 잠든 아이를 두고 이제 자신을 위한 이야기를 읽기 시작한 엄마 곰. 이렇게 사랑스러운 밤의 이야기라니,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고요.
6. 마이클 베다드, 바버러 쿠니 <에밀리>(김명수 옮김, 비룡소, 1998) #올해의겨울
바버러 쿠니의 그림을 정말 좋아하고, 그가 여성(특히 할머니)의 이야기를 그린 <미스 럼피우스>와 <엠마>를 아꼈는데요. 뒤늦게 <에밀리>를 만나면서 바버러 쿠니의 작품 중 가장 좋아하는 책이 되었습니다. 에밀리 디킨슨에 관한 이야기이자 신비에 관한 이야기예요. 지금 이 계절과도 무척 어울려요. 눈이 소복하게 내린 날 함께 펼쳐요.
7. 사라 스트리츠베리, 사라 룬드베리 <여름의 잠수>(이유진 옮김, 위고, 2020) #올해의우정
사라 룬드베리는 <내 안의 새는 원하는 곳으로 날아간다>로 처음 만났고 그해 저의 올해의 책이었어요. 마음을 크게 요동 치게 만들었던 터라, 줄곧 신작을 기다린 작가인데요. 그가 그림을 그린 새 작품이 2년 만에 번역되어 아주 반갑게 읽었습니다. 그림은 말할 것도 없고, 글은 다른 이가 썼지만 글 역시 좋아요.
“왜 어떤 사람은 살고 싶지 않을까?”
그 어떤 사람이 나의 아빠라면. 표지만 보면 밝고 경쾌한 이야기로 오해할 수 있을 텐데, 이해하기 어려운 무언가를 이해해보려는 용감하고도 슬픈 시도를 그려냈어요. 책장을 덮은 후에도 책 위에 손을 올리고서 한참을 이야기 속에 잠겨 있었습니다. 한 권만 꼽으라면 이 책을 남기겠어요.
8. 숀 탠 <이너 시티 이야기>(김경연 옮김, 풀빛, 2020) #올해의목차
“상어, 곰 악어, 올빼미, 돼지, 폐어, 달물고기, 앵무새, 비둘기, 나비, 벌, 호랑이, 개, 개구리, 달팽이, 고양이, 양, 말, 야크, 범고래, 독수리, 하마, 코뿔소, 여우… 적어도 우리는 그들에게 가장 아름다운 단어를 주었다.”
아마도 올해 제가 가장 애타게 기다린 번역서일 것이고요.(원서를 읽기엔 텍스트가 아주 많았거든요..) 이제 제가 기다릴 것은 숀 탠이 노벨문학상 받을 날과 원화전일 것이고요.
9. 김영경 <작은 꽃>(반달, 2020) #올해의선물
“너에게”
올해 두 권의 그림책으로 이름을 각인시킨 김영경 작가의 첫 작품입니다. 무엇보다 강렬한 색감과 구도가 인상적이었고, 고립과 관계에 관한 보편적인 이야기를 단순하면서도 아름답게 풀어내 여운이 길었어요. 그림을 보는 즐거움이 아주 크고 다음 작품이 궁금해지는 작가입니다. 소중한 이에게 선물하기 좋은 책이에요.
10. 이미나 <Cat’s Melody 캣츠 멜로디>(독립출판, 2020) #올해의고양이
“망설이지 않고 그린 한 장의 고양이”
사랑입니다. 이것은 사랑이에요. 이 레터를 띄우기 딱 일 년 전 ‘고양이와 친구들’이라는 제목의 전시에 다녀왔어요. 그때 걸려 있던 제각각의 매력적인 고양이 그림 중 서른한 점을 모은 책-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받아보니 고양이의 노래와 작가의 글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글에서도 그림에서도 눈을 뗄 수 없었습니다. 곧 늑대에 관한 이야기를 선보이신다니, 목이 길어지고요.
후보였으나 최종 리스트에서 빠진 작품으로 <묘생이란 무엇인가>, <바다에서 M>, <괜찮을 거야>, <아름다운 딱따구리를 보았습니다>, <바다 우체부 아저씨>, 그리고 아직 출간되지 않아 아쉽게도 넣지 못한 <사탕이 녹을 때까지>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