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삶은 보이지 않는 것들에 의해 지속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어요. ‘의식주’라고 말하는, 겉으로 드러난 것들이 생존의 필수 요건이긴 하겠지만 그것만으로 삶을 지속할 순 없어요. 삶은 생명체로서의 생존에 개체로서의 가치를 더한, 존재의 의미에 관한 개념이니까요. 사람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스스로 지닌 개체로서의 가치를 인식할 수 있어요. 만약 타인과 관계를 형성하지 못한 상태라면 자신에 관해 아무것도 알 수가 없어요. 코끼리와 나의 다른 점을 깊이 고민해 본들 개체로서의 나는 생겨나지 않아요. 코끼리와의 차이에 관해 극적인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도 토끼와 마주치는 순간 고민은 다시 처음부터 시작이에요. 토끼와 나는 어떻게 다른가? 독수리와 나는 또 어떻게 다른가? 이러한 반복으로는 고작 종의 차이(생명체의 생존에 관한 문제들)를 확인할 수 있을 뿐이에요.

 

하지만 사람과의 관계에서 생겨난 나에 관한 인식은, 관계의 대상이 바뀌어도 사라지지 않고 의미를 이어갈 수 있어요. 내가 ‘엄마’라고 부르는 상대가 누군가를 똑같이 ‘엄마’라고 부른다면, 우리는 그 엄마의 엄마를 처음 만나는 순간에도 나와의 관계를 충분히 유추할 수 있을 거예요. 엄마의 아빠, 엄마의 형제로 뻗어 나갈 수도 있고요. 이런 확장이 가능한 이유는 개체로서의 나를 (관계 속에서)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일 거예요. 코끼리를 만났을 때 코를 붙잡고 토끼를 만났을 때 귀를 더듬거리는 식으로 고정되지 않은 기준을 좇으며 고민할 필요가 없는 것이죠. 엄마와 나의 관계에서 나를 규정하는 기준은, 할머니와 나의 관계에서 나를 인식하는 기준과 다르지 않으니까요. 이렇게 개체로서 인식된 나라는 존재는 관계의 범위를 확장해도 사라지지 않아요. 가족에서 씨족, 부족 나아가 국가로 확대된 관계에서도 언제나 나일 수 있는 거죠(그렇다고 영원한 건 또 아니지만 말이에요).

 

낯선 것이란 관계에 속하지 않은 것

 

우리의 삶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생성된 가치들에 의해 지속한다고, 바꿔 말할 수 있겠네요. 관계 맺는 대상이 바뀌더라도 변하지 않는 가치들 말이에요. 타인에 대한 사랑, 신뢰, 연민 혹은 미움, 질투, 무관심 같은 것들이죠. 이런 가치들이 무너진다면(혹은 사라진다면) 삶을 이어가기 힘들 거예요. 생명체로서의 생존이 가능하다고 해도요. 철저한 외톨이의 삶이라고 하더라도 관계 속에서 스스로 고립을 선택한 것과 관계를 맺지 못한 채(혹은 상실한 채) 홀로 내던져진 것은 다를 거예요. 관계에 대한 그러한 의존성 때문일까요? 사람들은 낯선 것과 대면하는 순간 당황하는 것 같아요. 선뜻 받아들이기보단 거리를 두거나 배척하는 경우가 많죠.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 생각해요. 낯선 것이란 결국 관계에 속하지 않은 것이고, 삶의 지속을 방해할 가능성이 있는 의혹과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을 거예요. 하지만 삶의 경로는 미리 정해져 있지 않아요. 철로를 벗어나는 순간 여정이 끝나버리고 마는 열차가 아니에요. 그보단 매끈하게 닦인 길이 있건 없건 바퀴가 굴러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갈 수 있는 오프로드 차량에 가깝죠. 황무지를 달리다 보면 언젠가는 낯선 것과 마주칠 수밖에 없어요. 그 낯섦이 당황스러울 순 있어요. 그렇지만 넓게 보면 낯선 것 역시 우리 삶의 일부라고 할 수 있어요.

 

소년의 몸에 갑자기 돋아난 꼬리 – <노래하는 꼬리>

 

삶을 지속하기 위해선 관계 속에서 생성된 가치를 지키는 일과 관계 밖에서 출몰하는 낯선 것에 대처하는 요령을 구축하는 일이 동시에 필요하다고, 다시 바꿔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낯선 것이 삶의 일부로 수용되려면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낯섦이어야 할 거예요. 예측 가능한 수준을 벗어나면 곤란하다고도 말할 수 있겠네요. 어제 출근할 때 버스를 탔던 정류장이 오늘 갑자기 100미터 아래 떨어진 곳으로 이동해버렸다면, 당황스러운 변화이긴 하지만 예측 가능한 범위를 벗어난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어요. 심지어 내일은 위쪽으로 50미터, 모레는 다시 아래쪽으로 200미터씩 옮겨 다닌다고 해도 그 정도는 세심한 주의를 통해서(혹은 노력을 통해서) 충분히 적응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그런데 어제 버스를 탔던 정류장이 있던 자리에 갑자기 선착장이 들어서고 배가 다니고 있다면, 이 변화는 당혹스러움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할 거예요. 예측 가능한 범위를 벗어났다고 볼 수 있어요. 내일은 공항이 들어설 수도 있고 모레는 갑자기 우주선을 타고 (행성을 건너) 출근을 해야 할인지도 모르는 상태가 되어버리니까요. 이런 식이라면 삶을 지속하기 힘들 거예요.

 

낯선 존재를 받아들이는 방법

 

완전히 낯선 것, 그러니까 예측할 수 없는 존재와 만났을 때 외면하지 않고 마주 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에요. 하퍼 리의 <앵무새 죽이기>는 예측 불가능한 낯선 존재가 어떻게 배척당하는지를 보여주는 소설이에요. 이야기의 줄거리는 비교적 간단해요. 배경은 1930년대 중반 미국의 앨러배마주예요. 백인의 일방적 주장만으로 누명을 쓴 흑인이 재판 과정에서 명백한 무죄의 증거가 제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백인 남성만으로 구성된 배심원단의 판결에 의해 사형을 선고받는 과정이 소설의 중요한 사건이에요. 그 사건의 앞과 뒤에 주인공의 사적인 이야기들이 배치되어 주제를 더욱 선명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고 있고요. 책이 출간된 시기가 1960년임을 생각하면 꽤나 직접적이고 적극적으로 인종차별 문제를 고발하고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어요. 게다가 어린이의 시선을 빌려 말하고 있기 때문에 백인 집단의 비열함과 불합리함이 더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죠. 이 소설에서 누명을 쓴 흑인, 톰 로빈슨은 백인들에게 완전히 낯선 존재로 취급되고 있어요. 그런데 사실은 이상한 일이에요. 미국의 역사를 생각해 보면 백인들에게 흑인이 낯선 존재일 수가 없으니까요.

 

<앵무새 죽이기>에서 흑인이 낯선 존재가 되는 건, 스카웃(주인공, 소설의 화자)의 아버지인 애티커스 핀치 변호사가 톰 로빈슨의 변호를 맡으면서부터예요. 그는 법 앞에서 모든 이들이 평등해야 한다고 말하며 그대로 실천하려고 해요. 흑인이라는 이유로 법이 다르게 적용되어선 안 된다고 말하죠. 그전까지는 흑인의 실제 범죄 여부가 재판에서 중요한 것이 아니었던 거예요. 흑인을 어떻게 처벌할 것인가에 대한 백인들의 사적 결정이 내려지면 재판은 있으나 마나 한 절차였을 뿐이었죠. 백인들은 흑인이 법정에서 백인과 동등한 권리를 가지는 걸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거예요. 그러니 그들에게 법 앞에 평등한 흑인이란 존재가 얼마나 낯설었겠어요. 차라리 외계인이 더 친숙했을지도 모르겠네요. 재판은 결국 비극적 결말로 끝나게 돼요. 하지만 소설은 미래에 대한 낙관을 내비치고 있어요. 배심원단 중 한 명이 톰 로빈슨의 즉각적인 무죄 방면을 주장해서, 평소라면 5분이면 끝났을 평결을 밤늦게까지 기다려야 했다고 말하고 있어요. 조금씩이지만, 사람들이 변하고 있음을(변하게 될 것을) 암시하고 있어요. 완전히 낯선 존재를 받아들이는 법을 최대한 덜 급진적인, 하지만 근본적인 방식으로 보여주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해요.

 

꼬리를 어떻게 해야 할까? – <노래하는 꼬리>

 

영화 <엑스맨>과 비교해보면 <앵무새 죽이기>의 문제 제기가 왜 근본적인지 알 수 있어요. <엑스맨>에 나오는 돌연변이 캐릭터들 역시 사회에서 완전히 낯선 존재로 취급당해요. 사람들은 그들이 가진 힘을 두려워하며 자신들의 사회에 수용하지 않고 격리하거나 배제하려고 하죠. 그런데 <엑스맨>에서는 이 낯섦의 수용에 관한 논의(?)를 낯선 존재인 당사자들의 문제로 접근해요. 비돌연변이 사회와 적대하는 방식으로 돌연변이 사회를 지키고 유지하려는 집단(매그니토 일파)과 그와는 반대로 비돌연변이 사회와 협력하려는 집단(프로페서 X 일파)을 대립시키는 방식으로 말이에요. 언뜻 문제의 해결을 위한 방법론의 충돌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문제를 덮어두고 회피하는 논쟁에 불과할 뿐이에요. 둘 중 어느 방식을 선택한다고 해도 비돌연변이 사회가 돌연변이를 대하는 태도가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는 한 매그니토와 프로페서 X 모두 계속해서 낯선 존재로 살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에요. 돌연변이 인간이라는 낯선 존재가 비돌연변이 인간의 사회에서 아무런 차별과 위협 없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비돌연변이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직접 말을 걸어야 해요. 낯선 존재가 질문이 되어 사람들에게 퍼져 나가야만 해요. 비록 느릴지라도, 한참의 시간과 인내가 필요할지라도 말이에요.

 

“인간이 꼬리를 상실했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앵무새 죽이기>가 낯선 존재의 수용에 관한 근본적이며 보수적인 방식을 보여준다면, 기아 리사리가 글을 쓰고 비올레타 로피즈가 그림을 그린 책 <노래하는 꼬리>는 유쾌한 방식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어요. <노래하는 꼬리>는 그림책이라 이야기가 길지 않아요. 너무 작아서 마을의 이름보다 작은 마을에 사는 이반이라는 아이의 몸에 어느 날 갑자기 꼬리가 돋아나요. 이반은 물론이고 엄마와 아빠, 마을 사람 모두가 놀란 건 당연하겠죠. 사람들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허둥대는 와중에 꼬리는 노래를 불렀대요. 온 세상을 홀릴 만한 목소리로 말이에요. 마을 주민들은 머리를 맞댔고 시장의 말에 따라 꼬리를 뽑아버리기로 결정했어요. 모두 열 명인 마을 사람들이 한 줄로 늘어서 꼬리를 붙잡고 이반에게 물었어요. “아프니?” 이반이 아니라고 대답하자 마을 사람들은 꼬리를 힘껏 잡아당겼어요. 그리고 어떻게 되었나 하면요.

 

마을 주민들이 꼬리를 잡아당기 시작하고⋯ – <노래하는 꼬리>

 

꼬리가 끝도 없이 길어져서 사람들이 마을 밖으로 사라져버렸어요. 사람들은 결국 온 세계를 여행하고 꼬리의 길이가 딱 지구 둘레만 해졌을 때 다시 마을로 돌아왔어요. 그리고 피곤에 지쳐 있었지만 행복한 얼굴의 사람들을 이반이 꼭 안아줬어요. 사람들이 말했어요. “정말 많은 걸 봤어.” 그날부터 꼬리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마을에서 함께 살게 되었대요. 어쩌면 황당해 보일 수도 있는 이 유쾌한 결말은 중요한 걸 말하고 있어요. 근본적인 걸 말이에요. 낯선 존재와 대면했을 때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해결책을 낯선 존재에게서 찾지 않는다는 점에서 <앵무새 죽이기>와 닮아 있어요. <앵무새 죽이기>에는 톰 로빈슨이 어떻게 행동해야 한다거나, 흑인 사회가 어떻게 변해야 한다는 말이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아요. 오직 백인 사회의 저급함과 비열함을 차근차근 보여줄 뿐이죠. <노래하는 꼬리>도 마찬가지예요. 왜 꼬리가 생겼는지, 꼬리를 어떻게 눈앞에서 치워버릴 것인지 이반에게 묻지 않아요. 꼬리와 함께 이반을 배척하지도 않고요. 그저 마을 사람들이 꼬리를 붙잡고 지구 한 바퀴를 여행한 뒤 ‘꼬리랑 함께 사는 게 뭐 어때서.’라고 하는 심정, 그리고 행복한 표정으로 돌아올 뿐이에요.

 

마을 사람들은 낯섦이 주는 당혹스러움의 원인을 꼬리에게서 찾는 게 아니라 스스로에게 (여행이라는 형식으로) 질문함으로써 발견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꼬리를, 꼬리가 꼬리인 채로 자신들의 세계로 받아들이게 되죠. 그래서 <노래하는 꼬리>의 글을 쓴 기아 리사리는 이런 말을 했는지도 모르겠어요. “인간이 꼬리를 상실했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하지만 언제든지 다시 자라게 할 수 있어요.” 이 말은 꼬리가 무엇인지, 낯섦의 정체가 무엇인지에 관해 항상 질문하고 고민하라는 뜻이 아닐까 싶어요. 낯선 것은 대체 왜 낯설까요? 원래부터 낯선 것이란 존재할 수 있을까요? 혹시 우리가 그들을 낯설게 만든 건 아닐까요? 조금의 다름과 차이를 용인하지 못하고 다수의 힘을 앞세워 낯선 세계로 그들을 쫓아낸 건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우리가 상실한 꼬리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며 한 세계에 어울려 살았던 시절의 기억이라면 당연히 그 꼬리를 언제든지 다시 자라게 할 수 있을 거예요. 다만 제대로 된 방향으로 질문을 던져야겠죠. 낯선 존재를 향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에게 말이죠. 그러니까 혹시라도 (지금 한국) 사회에서 외면당하고 있는 존재들 이를테면 장애인, 성 소수자, 비정규직 노동자, 외국인 노동자들과 대면했을 때 ‘당신은 왜 낯선 존재인가?’라고 다그치지 말고 자신을 위한 질문을 가만히 떠올려 보세요. “우리의 꼬리는 어디로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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