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덕후의 쓰는 마음”
(작업책방 씀 북토크에서)
M 제가 세상과 진실로 관계 맺는 방식은 걷기와 쓰기를 통해서이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 ‘걷고 쓰는 사람’이 저를 잘 설명해주는 문장이라고 생각해요. 덧붙이자면 걷기와 쓰기 만큼이나 읽기와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싶어요. 걷고 쓰고 읽고 커피 마시다 보면 하루가 너무 짧아요. 황홀해서.
O 우울을 다룬 책을 쓰셨는데 작가 소개는 좋아하는 것들로 이루어진 사람이라니. 그 간극이 또 이 책을 잘 설명해 주는 것 같기도 해요 :)
첫 책을 펴낸 소감은 어떠실까요? 얼마 전에 읽은 고수리 작가님 에세이 <마음 쓰는 밤>에서 “첫 책을 쓰고 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라는 문장을 읽었는데, 그럼에도 안팎으로 무언가가 일어났다면.
M 그렇지 않아도 그 문장 덕분에 ‘그래, 김칫국 마시지 말자!’ 하면서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답니다. 설레발 치지 않게 해주셔서 수리 작가님께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고요. ㅎㅎ
조금 더 솔직히 얘기하자면, 너무 큰 일은 일어나지 않기를 내심 바라기도 했어요. 그게 좋은 것이든 좋지 않은 것이든 주변에서 평가가, 반응이 쏟아지면 내가 그것들에서 무사할 수 있을까? 무사히 계속 쓸 수 있을까? 걱정이 됐는데 생각보다 무사히 지나가고 있는 것 같아요. 이게 다행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요. ;)
그리고 제가 작은 것에도 의미를 잘 두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그냥 다 감사하더라고요. 날마다 정말 많은 책들이 쏟아지고 있는데, 누군가가 이 책을 발견하고 읽어준다는 그 자체가 너무 신기하고 놀라운 일인 것 같아요.
또 한편으로는 얼른 다시 작업하고 싶다는 마음이 커졌어요. 역시 글을 쓰는 그 순간이 저에겐 가장 지극한 기쁨이구나, 심지어 출간의 기쁨도 그 기쁨을 이길 수는 없다는 깨달음이 저한텐 개인적으로 의미 있었어요.
M 물론 이제 또 뭘 쓰지 싶은 생각은 들어요. 한 차례 제 이야기를 쏟아냈기 때문에. 그렇지만 글을 쓰는 기쁨이 다른 어떤 일에서 오는 기쁨과도 비교가 안 되는 것이라 빨리 다시 작업하고 싶다, 그 기쁨을 누리고 싶다, 그런 상태인 것 같아요.
M 저를 잊어버리는 기쁨이요. 다른 일을 할 때는 ‘그 일을 하고 있는 나’에 대한 인식을 하게 되는데 글을 쓸 때는 제 자신이 투명해져요.
M 이상하게 안 보게 되더라고요. 첫 책이라 무척 각별하지만, 이 책을 쓴 나와 지금의 내가 다르다는 게 여실히 느껴진달까요.
M 맞아요. 정말 한 시절이 지나갔구나 하는 느낌이에요. 그런데 정확히는 제가 이 글을 썼기 때문에 더 이상 이런 글을 못 쓰게 된 것에 가까워요. 썼으므로 비로소 지나갔달까요. 만약 2019년에 ‘옥상’이라는 글을 쓰지 않았다면 지금 2022년에 제가 써야 할 글이 ‘옥상’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단지 시간이 흘렀기 때문에 먼 과거가 되어서 쓰지 못하게 된 것이 아니라, 내가 2019년에 옥상을 썼고 그 이후의 시간을 ‘옥상’을 쓴 사람으로서 살았기 때문에 달라진 것이라고.
O ‘옥상’이라는 글에 유년의 이야기가 나오죠. 저희가 2019년 1월부터 함께 쓰기 모임을 했는데 8월에 쓴 ‘옥상’ 이전까지는 이야기가 풀려 나오지 않고 어딘가 맺혀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쓰고 싶은 이야기, 써야 할 이야기가 아주 많은데 그것들을 꺼내 보이려다 다시 막 묻어두는 것 같다. 그런데 ‘옥상’ 글을 받아보고 깜짝 놀랐죠.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겠구나. 이제 계속 풀려나겠구나. 그때 아, 이 사람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다, 그런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러고 이듬해 겨울에 책을 내자고 제안 드렸는데, 어떤 마음으로 수락하셨는지도 궁금해요.
M 몰랐어요. 책을 낸다는 게 엄청 어렵다는 걸 잘 몰랐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결정이었고요. 계약서를 쓰고 마감이 생기면 내가 글을 진짜 열심히 쓰겠구나, 단순히 그렇게 생각했어요.
M 글쓰기를 일의 영역으로 가져와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회사에서 일을 할 때 중요한 것 중에 하나가, 얼마나 예측할 수 있느냐였거든요. 어떤 일을 하면서 발생할 수 있는 모든 변수와 리스크를 최대한 예상 가능하게 만들고 그걸 관리하는 능력이 필수적이잖아요. 그래서 글쓰기를 그렇게 했어요. 어떤 글을 쓰기 전에 이 글이 나아갈 방향을 정하고, 어디쯤에서 막힐 것 같은지 혹은 실패한다면 왜 실패할지까지 예측해서 완벽하게 계획을 한 다음에 초고에 가까운 기획서랄지 대본을 만들어놓고 글을 썼어요. 이 책의 절반은 그렇게 나온 것이고요. 그런데 왜 절반 분량만 그렇게 썼느냐면, 딱 절반까지만 그 전략이 유효했어요. 어느 순간 ‘아 계속 이렇게 쓸 수는 없겠구나’라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이 방식으로는 기존에 내가 알고 있는 것에 대해서만 쓸 수 있는 거예요. 글을 쓰는 과정에서 새로운 발견을 하지는 못하는 거죠. 그래서 이후로는 이 글이 뭐가 될지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한 문장 한 문장 붙여나가면서 썼어요. 그렇게 하니까 제가 몰랐던 것에 관해서 쓰게 되더라고요. 모르는 문장을 쓸 수 있었어요.
O ‘눈’이라는 꼭지에서 모르는 문장을 기다리는 일에 관해 써주셨죠. 그 글도 그렇게 쓰였던 것 같고요. 말씀하신 것처럼 어느 순간부터 글 스타일이 완전 달라져서 제가 그런 피드백도 드렸는데요. 글이 멀리멀리 간다, 재밌다고. 어쩌면 이 책을 관통하는 주제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먼 데까지 가는 일.
좀 엉뚱하지만, 쓰기 모임도 굉장히 먼 데서 오셨었잖아요. 궁금하더라고요. 무엇이 작가님을 그렇게 먼 길을 향해 오면서 쓰도록 만들었을까.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시기나 계기가 있으셨을까요?
M 원래 이것저것 끄적거리는 습관이 있었어요. 언제랄 것도 없이 자연스럽게 오랫동안. 그러다 심적으로 무척 힘든 시기가 찾아왔는데, 힘든 시기야 크고 작게 수시로 오기는 하지만, 그땐 지금 돌이켜봐도 참 힘든 시기였던 것 같아요. 그때 처음으로 아무것도 쓰지 않고 지냈어요. 하다못해 그냥 ‘힘들다’, 이런 하소연 투의 글이라도 쓸 수 있었을 텐데 그마저도 쉽지 않았어요. 저한테서 나오는 문장이 다 마음에 안 들었던 거예요. 언젠가부터 똑같은 이야기 속에서 헤매고 있다는 느낌.
쓰기 모임에 가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처음으로 타인에게 피드백을 받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였어요. 그전까지는 타인에게 전달이 되든 말든 나는 내가 쓰고 싶은 대로 쓴다, 그런 태도였는데. 실은 전달이 되지 않을까 봐 두려웠던 것 같아요. 내가 겪고 느낀 게 실은 아무것도 아닐까 봐. 그러니까 내가 겪은 것, 느낀 것이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라면, 그 사실을 내가 이제라도 마주해야겠다는, 제 나름대로 비장한 마음으로 용기를 냈던 거예요. 내가 쓰려는 게 뭔지, 전달 가능한 것인지 혹은 아닌지, 다른 사람들 말을 좀 들어봐야겠다. 뭐가 되었든 더 늦기 전에 마주할 필요가 있겠다. 그래야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겠다.
M 저도 잊고 있었는데 이번에 찾아봤죠. 닮고 싶은 아홉 가지 목소리 중에서 당시에는 절대 쓸 수 없었던 게 ‘위트로 어깨에 힘 빼고 말하기’ 였어요. 위트라는 건 거리가 확보되어야 나올 수 있잖아요. 내가 쓰려고 하는 그 일과 어느 정도 떨어져 있어야, 그 거리감 속에서 힘들고 괴로운 상황도 달리 볼 수 있게 되는 건데, 그때만 해도 제가 쓰려고 하는 것과 충분한 거리감이 없었고, 오히려 아직 그 속에 있었기 때문에 위트는 나오려야 나올 수가 없었던 거죠. 위트에서 거리감이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나는 여기 있고 내가 쓰려는 건 저기 있고, 따라서 내가 쓰려고 하는 그 일이 ‘나’는 아니기 때문에 그 일을 희화화해도 내가 초라해지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이거든요. 그래서 특히 자신이 겪은 일을 위트 있게 쓰려면 거리감이 여러모로 중요한 것 같아요.
그런데 초고 거의 막바지에 와서 어떤 시절, 삶의 한 시기와 충분한 거리감이 생겼고, 그래서 위트에 대한 욕구가 생겨났어요. 책에서는 ‘서점’ 꼭지 전반부를 그렇게 썼죠.
M 맞아요. 저희끼리는 돌림노래 같다, 이런 말도 했어요.
M 많은 분들이 ‘햇밤’ 꼭지를 좋아해주시더라고요. 사실 좀 놀랐어요. 이 글을 이렇게까지? ;) ‘햇밤’을 쓰면서 제가 시도한 건 내용보다 형식적인 면인데요. 주제나 메시지가 아니라 어떤 글을 읽는 동안 통과한 이미지랑 장면으로 주로 남는 글. 그게 다인 글. 제가 그런 글을 좋아해서, 써보고 싶었어요.
O 성공하신 것 같아요. 책을 덮고 나서도 이파리 달린 오복소복한 햇밤들이 강렬하게 남아 있거든요. :)
그리고 저희 레터 연재 때 가장 큰 반응이 있었던 글은 ‘유월’이었죠.
M ‘유월’을 쓸 때 시도했던 건 ‘새로운 방식으로 묘사하기’였어요. 적어도 나는 본 적 없는 새로운 방식의 비유, 은유를 만들어내 보고 싶었어요. 특정 계절을 묘사할 때 흔히 쓰는 표현들이 있기 마련인데, 그런 것에 기대지 않고 싶었어요. 그래서 쓰게 된 표현이 이를테면, ‘터질 듯 풍선을 불다가 잠깐 입을 떼는 동안 새어 나오는 바람 같다’, ‘허공에 쏘아본 화살이 수풀 사이를 통과하며 만들어내는 꽃대의 떨림 같다’ 이런 것들이에요. 새로운 표현들을 시도하면서 사실 걱정도 많이 했어요.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읽힐까, 잘 전달이 될까.
M 제가 들여다본 계절성을 표현하고 싶었던 게 있어요. 어떤 계절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에 쉽게 기대기보다 내가 느낀 계절, 그 계절의 다른 면들.
보통 여름이 바다, 수영, 아이스크림 같은 것으로 대변되는 생동감, 생명력, 즐거움의 이미지로 많이 묘사되는데, 제가 겪은 여름에는 꼭 그런 즐거운 이미지만 있진 않았어요. 저한테는 여름이 끝이라는 심상으로 다가오거든요. 저의 계절은 가을부터 시작해서 겨울이 절정이고 봄에 시들어서 여름에 끝나요. 저한테 여름은 최후의 이미지가 있어요.
M 제 안에는 가족을 미워하는 마음과 사랑하는 마음이 모두 있고 그걸 최대한 복잡하게 보여주고 싶었어요. 어느 것 하나도 쉽게 긍정하지 않는 방식으로. 그래서 ‘여름’과 ‘서점’에서 공통적으로 시도했던 것은 ‘아름답게 포장하지 않기’였어요. 가족이라는 주제에 관해서 쉽게 화해하는 방식으로 쓰고 싶지 않았어요.
M 요즘 제가 정말 꽂혀 있는 주제가, 공교롭게도 아홉 가지 목소리 중에 좀 비슷한 게 있었는데, ’비!문학으로 문학하기’예요. 글을 쓰다 보면 문장이 소위 아름답게, 말하자면 문학적으로 느껴질 것 같을 때가 있어요. 가령, 가을+낙엽+코트+바람, 이걸 조합해서 쓰면 뭔가 각이 나올 것 같잖아요. 요리로 치면 실패할 수 없는 레시피 같은 느낌. 그런 것에서 벗어나는 게 저한텐 항상 중요했어요. 익숙한 것을 반복하지 않고, 어떤 것을 완전히 새롭게 느끼게 하는, 마치 태어나서 어떤 것에 대한 감각을 처음 익히듯이… 쉽지 않죠. 그렇지만 항상 갈망해요. 내 입맛에 맞게 조리하고 파헤쳐 놓는 문장보다 온전히 드러나 새것 같은.
M <우울이라 쓰지 않고>에 실린 열네 편의 글이 각각의 시도이자 실험이었듯, 계속 실험하듯 쓰고 싶어요. 장르나 포맷을 가리지 않고 다양한 글쓰기를 시도해 보고 싶고요.
또 다양한 사실들을 알고 싶어요. 아직 누군가의 해석이 붙여지지 않은, 의미화되지 않은 사실 그 자체. 물론 그 어떤 것도 아예 의미화되지 않은 것은 사실 없겠죠. 과학적 사실도 그 사실을 발견한 사람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 하에서 발견된 것이기 때문에. 그렇지만 되도록 날것의 사실을 많이 알고 싶은데, 그런 단순한 사실이야말로 무궁무진한 에너지를 함축하고 있어서예요. 누군가의 입맛대로 조리되기 전의, 원형에 가까운 대상이 내뿜는 에너지요. 그런 에너지를 많이 함축한 글을 쓰고 싶어요. 대상을 온전히 놓아두는 글이요.
M 이 글은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겠다, 라는 생각이 들면 그 글은 안 쓰는 게 좋다는 걸 첫 책을 쓰면서 알게 됐어요. 이거 진짜 공감이 될지 안 될지 전혀 모르겠다, 하지만 이렇게 쓰겠다, 왜냐하면 나는 이렇게 쓸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런 느낌으로 밀고 갈 때 그래도 조금 더 나은 글이 나온다는 것. 이해 받으려고, 공감 받으려고 쓰기보다 깜깜한 허공에 한 문장씩 던지는 느낌으로, 막막하게 써야 하는 것 같거든요. 그럴 땐 도무지 내가 하는 이 이야기가 다른 사람에게 닿지 않을 것 같고, 그래서 엄청 떨려요. 정말 바들바들. 그런데 그런 마음으로 쓸 때 자기만의 고유한 진실에 가까운 글이 나오지 않을까.
그런 글을 저는 항상 찾아다니고 기다려요. 그런 글은 읽으면 진짜 황홀하거든요. 그런 글을 읽을 때면 가난할 때도 정말로 가난해지지는 않을 수 있을 것 같은 자신이 생겨요. 누군가 그런 글을 써주신다면 정말 감사히 읽을 거예요. 뭔가 크게 빚진 기분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