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치코

 

도로공사 우승!

 

무조건 이 문장으로 글을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소소한 산-책’이 아니라 졸업 논문이어도 그랬을 거예요. 지난 4월 6일에 열렸던 챔피언결정전 5차전은 그만큼 극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배구를 안 보시는 분들을 위해 첫 문장을 풀어서 쓰면 다음과 같습니다.

‘한국도로공사 하이패스 배구단이 도드람 2022-2023 V리그 여자부 챔피언결정전에서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 배구단을 꺾고 우승했다.’

시즌 초반 비실거렸던 경기들이 많았고, 중간에 외국인 선수를 교체한 뒤에 경기력이 나아지기는 했지만 (일곱 팀 중 3위까지 출전하는) 봄배구에 나가기만 해도 성공일 것 같았던 도로공사가 김연경 선수가 버티고 있는 흥국생명을, 그것도 5판 3선승제 챔피언결정전에서 2패 뒤 3연승으로 우승하는 기적을 연출하다니 믿을 수 없었습니다. 역대 기록을 보면 1, 2차전을 다 이긴 팀이 전부 우승했는데 그 0% 확률의 상황에서 ‘패패승승승’이라니요!

 

이렇게 흥분해서 배구 소식을 전하고 있지만 응원하는 팀이 있는 건 아닙니다. 시즌 초반엔 기나긴 연패에 빠져 있던 신생구단 페퍼저축은행을 응원하는 마음이 컸었고, 막판에는 시즌 내내 압도적인 실력으로 연승을 달리며 1위를 독주하다가 주축 선수들의 부상과 이탈로 인해 연일 힘든 경기를 펼쳤던(결국 2위로 시즌을 마친) 현대건설에 격려의 마음을 보내기도 했지만, 어느 한 팀에 소속감을 가지고 응원하지는 않았어요. 코트에서 뛰고 있는 모두를 응원하면서 6개월간 열심히 경기를 봤던 것 같아요. 여자배구는 그렇게 즐기는 게 가능하더라고요(남자배구는 안 봐서 모르겠네요). 일곱 개 구단 모든 선수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멋진 플레이에 환호하고 박수칠 수 있게 열심히 뛰어주셔서 고마워요. 다음 시즌에 건강한 모습으로 또 만나요. 그럼 20000, 하면 안 되죠. 이제 글을 시작했는데.

 

농구 좋아하세요?

 

지난겨울은 <슬램덩크> 열풍이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아직도 끝나지 않았죠. 1월 4일에 개봉한 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아직도 박스오피스 상위권에 있으면서 (역대 일본 애니메이션) 누적 관객 최고 기록을 경신하고 있으니까요. 저도 봤습니다. N차 관람은 못 했습니다. N의 최솟값인 2차 관람만 하기에도 체력이 부담스러운 처지라.. 한 번만 봐도 충분히 좋았습니다. 대신에 만화책을 1권부터 24권까지 정주행했습니다. 우연히도 거실 책장에 무려 완전판이 가지런히 꽂혀 있더라고요. 만화책을 다시 읽으니까 <슬램덩크>가 연재되던 시절의 기억이 새삼스럽게 떠올랐습니다. 명대사를 따라 하며 웃고 떠들던, 그렇게 대유행이던 작품에 빠져 살면서도 농구코트 근처도 가지 않고 오직 만화책으로만 즐겼던, 농구공 대신 키보드와 마우스를 붙들고 밤새 컴퓨터 게임에 빠져 있었던 친구들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게임이 ‘스타크래프트’라고 짐작하신다면, 축하드립니다, 아직 젊으시군요. 그 시절엔 스타크래프트도 PC방도 없었습니다. 다음도 없었고 네이버도 없었고 휴대폰도 없었습니다. 대체적으로 아무것도 없던 때였지만 그땐 농구도 배구도 모두 지금보다 인기가 높았던 걸로 기억합니다. 몇몇 선수들은 연예인 못지않은 인기를 누렸는데, 지금 기준으로 보자면 이상할 수도 있지만, 대학교 농구부/배구부의 선수들이었어요. 굳이 이름을 말하진 않을게요. (대부분 남자인) 그들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지 않고 무난한 중년이 되었다는 보장이 없어서요. 아무튼 당시에는 <슬램덩크> 속 북산과 강백호, 서태웅, 정대만 등이 현실에서도 비슷하게 존재했던 것 같아요. 그런 시절이 있었다니, 몸으로 직접 겪었지만 잘 믿기지 않네요. 그리고 믿기 힘든 또 한 가지는, 그때만 해도 대학교 앞에 (상징적인) 서점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어, 여긴 서점 근처에 대학교가 둘이나 있네?’

이번 달 소소한 산-책을 위해 책방을 찾아가느라 지도 앱을 열었을 때 생각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전에 존재했던 대학가 서점을 떠올렸던 건 아니에요. 책방의 대략적인 정보와 분위기는 이미 인스타그램을 통해 알고 있었으니까요. 21세기잖아요. 조금 궁금하긴 했습니다. 대학생들의 생활권이라는 지리적 특징이 혹시 동네책방의 운영에 영향을 미치기도 할까? 그러나 혹시는 역시로. 그날 둘러본 바로는 대학과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책방 부비프에 다녀왔습니다.

 

부비프란 이름의 유래는 책방 대표님의 예전 인터뷰를 통해 알 수 있었습니다. 책방을 시작하기 전 제일 먼저 한 일이 항공권 구입이었다고 해요. ‘앞으로 당분간 긴 여행은 못 갈 테니 그전에 다녀오자’라는 마음이 있었고, 책방으로는 겨우 먹고산다는 주변의 말에 그렇다면 ‘가난해지기 전에 다녀오자’라는 이유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때 다녀온 도시의 앞 글자를 따서 책방 이름을 지었다고 하는데[*], 아마도 부다페스트, 비엔나(빈), 프라하가 아닐까 해요.

 

 

그래서일까요? 책방의 인테리어에서 유럽의 느낌이 물씬 풍겼습니다. 실내는 두 가지 컬러가 묵직하게 대비되고 있었어요. 부비프의 로고 색(#54785B)으로 추정되는 짙은 녹색이 벽과 천장을 둘러 칠해져 있고, 책장과 테이블과 의자는 대부분 마호가니 원목의 색으로 통일되어 있었습니다. 공간에 깊이감을 더해주는 이 대비와 함께 책방의 가구들이 모두 엔틱(인터넷에 검색하면 나오는 바로 그) 스타일이어서 유럽 분위기가 더 강했던 것 같아요. 엔틱 가구는 제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디자인이기도 합니다. 목공 유경험자로서 더욱 그러한데요. 우아한 곡선을 그리며 뻗은 책상과 의자의 다리, 풍성하게 동글린 문짝과 장식들, 섬세하게 조각된 테두리 마감들.. 이런 것들은 일단, 만들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멋진 자태와 화려한 장식의 엔틱 가구를 잘 배치하기만 한다면 공간을 훨씬 다채롭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리 넓지 않았던 부비프의 실내가 풍성하게 느껴졌던 건 아마 그 가구들 때문이었을 거예요.

 

책방엔 독립출판물도 제법 갖춰져 있었습니다. 전체 책의 대략 30% 정도 되어 보이는 독립출판물들이 한쪽 벽면의 책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책방에 들어서고도 한참 동안은 독립출판물이 있는 줄 몰랐어요. 동네책방의 독립출판물 서가는 보통 한눈에 알아볼 수 있습니다. 판형과 장정에서 상업출판물과 조금 차이가 나기 때문입니다. (그림책 등 훨씬 더 큰 판형도 있긴 하지만 평균적으로) 크라운판(176X248mm)이나 46배판(188X257mm) 크기까지는 비교적 다양한 판형으로 출간되는 상업출판물에 비해 독립출판물은 대개 신국판(152X225mm)보다 작게 제작되고, 장정 역시 거의 무선제본이기 때문에 책장에 모아서 꽂아놓으면 대체로 상업출판물과 구분되는 편입니다. 책의 훼손을 막기 위한 래핑도 OPP 봉투를 많이 쓰기 때문에 바로 표가 나고요. 그런데 부비프에서 독립출판물 서가를 바로 알아보지 못했던 건 책방의 책들이 너무나 단정하게 진열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책방 안의 모든 것들이 가지런했습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어 보였어요. 책장에 꽂힌 모든 책은 선반의 앞쪽 끝 선에 딱 맞춰져 있었고 책등의 높이가 들쭉날쭉하지 않도록 잘 정돈되어 있었습니다. 테이블 위에 표지가 보이게 진열된 책들 역시 가로세로 격자가 자로 잰 듯이 딱 맞춰져 있었습니다. 책뿐만 아니라 중간중간 진열된 엽서와 포스터, 소품들 역시 그랬습니다. 어디 하나 흐트러짐이 없었어요. 책방 한쪽 구석에 책상을 두고 일하고 계시던 두 분의 책방지기님들은 대체 얼마나 단정한 사람들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게까지 공간을 단정하고 안정적으로 정리해놓은 책방은 처음이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의문이 들었습니다. 아니야, 이건 단정함만으로 되는 일이 아닐 거야.

 

부비프 책방이 오래도록 지속해온 두 모임이 있습니다. 하나는 부비프 글방. 사회자가 있고 4주 동안 매주 한 편의 글을 쓰고 감상을 나누는, ‘무서운 곳이 아닌’(어쩐 일인지 이 말이 모집글에 들어 있네요) 모임입니다. 다른 하나는 일요독서회. 매주 일요일 밤 조용히 각자의 책을 읽고 대화하는 모임입니다. 지금은 둘 다 온라인 모임인데 처음부터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아무튼 부비프 글방은 45기 동안 이어져 왔고 일요독서회는 스물다섯 번 열렸습니다. 한 달을 주기로 잡아서 중간에 끊어짐 없이 계속한다고 해도 부비프 글방은 45개월, 일요독서회는 25개월간 이어져 온 셈이죠. 이렇게 오래된 반복은 보통의 열심을 넘어서는 부지런함이 있다는 얘기일 거예요. 책방의 단정함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것 또한 그 부지런함일 테고요.

 

<싶싶한 하루 보내세요>라는 책은 부비프 글방에서 만나 함께 글을 쓰던 다섯 명이 의기투합해 만든 책입니다. 그 책에 실린 책방 대표님의 추천글에서 책방을 오래도록 지켜온 이의 단정함과 부지런함이 얼핏 엿볼 수 있었습니다.

 

“머뭇거리고 뒷걸음치기도 하다가 결국 한 글자, 한 단어를 조심스럽게 내려놓는다. 그 뒤로 한 문장, 한 단락이 따라오고 쓰는 이는 옷을 짓듯, 그림을 그리듯 언어를 매만진다. 엉망인 채로, 때로는 손기술을 탓하기도 하며 묵묵히 써내려간다.

 

[…] 그들은 조금씩 닮은 마음으로 찾아와 이렇든 저렇든 매주 한 편씩 글을 써냈다. 각자의 한 주를 살아내고 수요일 저녁이면 모여 글을 나눴다. 서로의 용기와 유머를 추켜세우고, 한숨과 불안을 가라앉혔다. 그들이 써 온 글을 매주 함께 읽으며, 나는 글이 가진 아름다움이란 수없이 다양한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을 새롭게 이해했다.”

 

봉현 작가님의 책 제목을 빌려 이렇게 소개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부비프 책방, 단정한 반복이 우리를 살리는 곳.

 

 

 

부비프 buvif

 

 

 

 

* ‘소소한 산-책’ 코너에서 독자 투고를 받습니다. 제 걸음이 미처 닿지 못한 곳들의 이야기도 전하고 싶어요. 분량 제한은 없습니다. 짧아도 좋고요. 자유롭게 여러분의 산-책 이야기 들려주세요. 해당 메일(letter@sewmew.co.kr)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선정된 분께는 오후의 소묘에서 준비한 굿즈와 신간을 보내드립니다. 소중한 원고 기다리고 있을게요.

 

‘소소한 산-책’은 [월간소묘 : 레터]에 연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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