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산-책] 고양, 이랑

글: 이치코

마포구가 아주 ㅈㄹ.. 아니 엉망입니다.^[*]

지난해 11월 마포구 관내에 있는 작은도서관에 스터디카페를 추가하려다 주민들의 항의가 빗발치자 슬쩍 한발 물러선 일이 있었습니다. 논란이 일자 마포구는 작은도서관을 폐관하는 것이 아니라 기능을 재설계하는 것일 뿐이라며 해명했다지만, 글쎄요. 또한 도서관 예산의 30%를 삭감하라는 요구에 반발하며 이를 공론화(22년 11월)한 마포중앙도서관장을 직위해제(23년 4월)하고 파면(23년 5월)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괄호 안의 날짜를 보면 아주 일사분란하게 초스피드로 눈엣가시를 제거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공무원으로서의 품위 유지 및 복종 의무를 위반했다는 이유라는데, 대체 뭔 개.. 아니 헛소리인지.

그리고 가장 최근에는, 지하철 홍대입구역 인근에 자리한 마포출판문화진흥센터(플랫폼P)에 입주한 출판 관련 소규모 창작자들에게 주민등록표 초본을 제출하라는 통보를 했습니다. 연장 계약을 위해서는 마포구에 1년 이상 거주하고 사업장도 마포구에 등록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는데 이는 당초 입주할 때는 존재하지 않았던 규정이라고 해요. 출판을 지원하기는 하되, 일자리 센터나 창업 공간 등 함께 쓸 수 있는 곳으로 개편하는 것이 구청의 구상이라고 하는데, 그냥 출판 나부랭이들은 나가란 얘기나 마찬가지잖아요, 아.. 쫌!

마포구청의 설명을 들어보면, 이태원 참사 이후 서울시가 다중인파 밀집지역 관리를 위해 25개 구에 4억 원씩 교부한 예산 전부를 홍대 앞 길거리에 빨간 페인트칠하는 데 모두 써버린 작자들의 말을 들어서 뭣하나 싶긴 하지만 어쨌든요, 다른 사업 분야도 많은데 출판이나 도서관에 관련해 지원되는 예산이 과도하다고 판단하고 있는 듯합니다. 물론 실제로 다른 구에 비해 예산이 높게 책정되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문제가 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왜냐면 마포구는 파주출판도시와 더불어 출판 관련 산업이 가장 밀집된 곳이고 그걸 브랜드 삼아 2010년에 서울시에 의해 ‘디자인·출판 특정개발진흥지구’로 지정되기도 했으니까요. 전국적으로 생산량 1, 2위를 다툴뿐더러 마늘 하면 보통 제일 먼저 떠올리는 의성군에서 마늘의 생산과 유통을 전략적으로 지원하거나 마늘축제를 개최한다고 해서 왜 다른 작물은 홀대하냐고 무작정 따지고 들면 곤란하죠. 당연히 균형 잡힌 운영이 중요하겠지만 지자체의 사정에 따라 선택과 집중을 할 수도 있고, 그러니까 마포구가 도서관이나 출판을 좀 지원할 수도 있고, 잠깐만요, 이자들은 혹시 그냥 책이 싫은 게 아닐까요? 왜? 왜 싫어하는데!

책읽기를 좋아한다고 하면 혼자 있기 좋아하는 사람이라 여기기 쉽습니다. 얼추 맞는 말이긴 하죠. 책을 읽을 때 혼자만의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긴 하니까요. 미디어에서 책을 좋아하는 어린이가 등장하면 으레 친구들과 떨어져 도서관처럼 고립된, 때론 어두컴컴한 공간에서 혼자 책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내곤 합니다. 그런데 책을 읽을 땐 혼자 있고 책을 안 읽을 땐 친구랑 놀고, 그럴 수 있도 있는 것 아닌가요? 책도 좋아하고 운동도 좋아하고 여행도 좋아하고 음악도 좋아하고, 뭐 꼭 하나만 하라는 법은 없잖아요. 책 좋아하는 아이를 왜 항상 그렇게 묘사하는지. 훨씬 화사하고 밝고 활동적으로 표현해도 좋을 텐데 말이에요.

고독하고 외로운 걸로만 따지자면 게임이 훨씬 심합니다. 동료를 모아 함께 모험을 즐길 수 있다고 해도 그 세계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대부분의 게임은) 결국 무찔러야 할 적, 찾아야 할 보물, 도달해야 할 레벨 등으로 구성된 직선적인 서사밖에 없으니까요. 많은 선택을 할 수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해야 할 일이 명확하게 정해져 있는 닫힌 세계입니다. 곁가지로 뻗어나가는 이야기 없이 오직 죽거나 죽이거나, 성취하거나 실패하거나의 이분법만 존재하는 공간에서 외롭지 않기란 힘들지 않을까 싶어요. 그에 반해 책은 무한을 향해 열려 있는 서사로 이루어진 세계죠. 알 수 없는 곳에서 왔다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이야기가 가득한 곳에선 외로울 틈이 없습니다. 책과 나누는 무수히 많은 대화, 질문, 응답.. 외부와 단절될지라도 항상 세계와 연결된, 홀로 서 있음에도 고독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행위가 바로 책읽기일 거예요.

그래서 책읽기에 빠진 사람들이 책을 벗어나 세상으로 나오는 모습을 곧잘 볼 수 있습니다. 책에서 만난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건네고 싶어서, 다른 이가 둘러본 풍경이 궁금해서 이끌리는 대로 가다 보면 함께 걷고 있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둘이어도 괜찮고 한 테이블에 옹기종기 모일 정도여도 좋고 강당을 가득 채울 만큼이어도 상관없습니다. 책이라는 출발지만 동일할 뿐 각자의 목적지가 달라도 갈림길이 나오기 전까진 든든하게 의지하며 함께 할 수 있습니다. 동행의 여정보다 책읽기가 꼭 먼저일 필요도 없습니다. 때론 낯선 이와도 어깨를 걸고 걸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책을 멀리했던 사람이라도 꾸준히 길을 걷다 보면 결국 책읽기의 세계에 빠져들게 됩니다. 물리적으로는 조그만 평면일 뿐인 책에서 출발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고 더 나은 세계를 상상하며 때론 나를 변화시키기도 하는 이 동행의 여정을, 우리는 보통 독서모임이라고 부르곤 합니다. 책을 읽는다는 건, 정말 멋진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 왜 책을 싫어하는 자들이 있는지 어렴풋이나마 알 것도 같습니다. 그들은 이야기의 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이야기가 커져가는 것을, 이야기가 이야기를 낳는 것을 그래서 결국은 사람들이 진실을 똑바로 마주할 용기를 갖게 되는 것을 말이에요. 독서모임을 한다고 하면 어디 책 얘기만 하겠습니까. 각자의 취미 얘기도 하고 드라마 얘기도 하고 BTS나 임영웅 얘기도 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얘기를 차곡차곡 얹다 보면 자연스럽게 큰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꼭 <manifest der Kommunistischen Partei>이나 <Das Kapital: Kritik der politischen Ökonomie>을 읽어야만 정치나 경제에 관해 토론할 수 있는 건 아니에요. 고양이 입양 이야기를 보고 동물권을 얘기하고 나아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보편적 권리를 고민할 수도 있고, 텃밭 가꾸는 에세이에서 무분별한 개발과 기후 위기의 심각성을 깨달을 수도 있습니다. 대단한 결심으로 책을 읽었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이야기란 원래 그런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동네책방 혹은 독립서점이라고 부르는 공간들은 정말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전국망을 갖춘 대형서점이나 지역의 중형서점이 대개 유사한 풍경임에 반해 동네책방은 입지 조건에서부터 규모, 운영 방침, 공간의 콘셉트 등이 훨씬 다채롭게 존재합니다. 산속에 위치한 책방, 2평 남짓한 공간에서 무인으로 운영되는 책방, 카페나 빵집을 겸하는 건 예사고 심리상담이나 숙박까지 결합한 책방 등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서점이 이미 우리 곁에 존재한다고 해도 좋을 만큼 말이에요. 그런데 이렇게 다름에도 불구하고 거의 모든 책방에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사람들이 모인다는 것입니다. 자발적이고 활발하게요. 이유를 굳이 따져볼 필요도 없습니다. 책을 싫어하는 작자들이 책을 싫어하게 만든 바로 그 이유가 사람을 모이게 하는 것이니까요.

겉으로 보기엔, 책방에서 다양한 모임과 행사를 기획하고 그걸 발견한 사람들이 책방을 중심으로 결합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방향이 그 반대일지도 모릅니다. 책을 읽은 사람들이 이야기의 힘에 떠밀려 책방으로 발걸음을 하게 되고, 서로 생소할 그들이 반갑게 인사하고 안부를 묻고 상기된 얼굴로 책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본 책방 주인장이 ‘뭐라도 해야겠는걸?’ 하면서 자연스럽게 모임이 생기고 행사가 만들어진다고 하면, 이상할까요? (물론 책방 운영의 경제적 조건이 첫 번째 원인일 수도 있습니다. 책은, 아시다시피, 잘 안 팔리니까요..ㅠㅠ 어떻게든 매출을 만들기 위해선 독서모임, 강연, 북토크, 전시 등등 어쩌면 그보다 더한 게 필요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방향이 어찌 되었든 간에 동네책방엔 분명 사람을 모이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많은 동네책방들이 실제로 그걸 증명하고 있기도 하고요. 이 매력적인 공간을 사랑방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 같아요. 누구나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고 내부에 존재하지만 외부를 향해 활짝 열려 있는 공간. 책을 좋아하는 이들의 사랑방, 이야기의 중력장에 이끌린 이들의 사랑방, 때론 그저 사람이 좋은 이들을 위한 사랑방.

이번 소소한 산-책은 일산의 거의 끝자락에 자리한, 사랑방이란 이름이 그 어느 곳보다 잘 어울리는 책방 이랑에 다녀왔습니다. 책방에 도착했을 때 이곳이 서점이 맞나,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현관 양옆으로 테라스가 있어 마치 카페가 손님을 환영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고,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시선을 붙잡은 건 책방 중앙에 놓인 커다란, 책 없이 비워진 테이블이었습니다. 보통은 가게의 통유리 너머로 진열된 책들이 먼저 보이게 마련이고 안에 들어갔을 때도 동선의 중심에 위치한 매대나 책장이 눈에 들어오기 마련이지만 이랑의 공간은 그렇지 않았어요. 심지어 두리번거리다 두 번째로 발견한 것 역시 큰 테이블이 있는 분리된(하지만 투명한 유리 너머로 다 보이는) 모임 공간이었습니다. 책장과 모임 공간의 두 테이블이 8~10명은 거뜬히 둘러앉을 수 있을 만큼 커서 더 그랬던 것 같아요. 그다음에야 책들이 보이기 시작했는데요. 문을 열고 들어가는 통로 좌우에 놓인 야트막한 매대들, 한쪽 벽을 가득 채운 책장, 모임 공간 입구에 기대져 있는 선반 들에 알뜰한 메모와 함께 책이 진열되어 있었어요. 그제서야 제대로 책방에 들어섰다는 안도감(?)이 들었습니다.

동네책방을 많이 다녔지만 책방의 커뮤니티에 속한 독자로서 방문한 적은 없다고도 볼 있습니다. 간혹 회원으로 등록해 드릴까요? 여쭤보는 책방이 있어도 쑥스럽게 거절할 수밖에 없었어요. 소소한 산-책이 아니더라도 거의 (먼 곳의 서점을 구경하는) 일회성 방문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이번엔 우연찮은 기회로 책방 커뮤니티의 분위기를 아주 가깝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날은 이랑에서 진행하는 심야책방 프로그램으로 <조용함을 듣는 일> 김혜영 작가님의 드로잉 워크숍이 있는 날이었습니다. 작가님의 시그니처라고 할 수 있는 의자와 식물 그림을 함께 그려보는 시간이었는데요. 강연이나 북토크가 아니라 워크숍이다 보니 모임이 끝날 때까지 작은 목소리의 이야기들이 끝없이 오갔습니다. 오랜 친구들이 사랑방에 둘러앉아 두런두런 안부를 묻고 근황을 말하고 살아가는 일의 기쁨과 걱정과 두려움에 관한 얘기를 나누는 듯한 분위였습니다. 물론 다들 눈과 손은 바쁘게 붓을 좇으며 그림을 그리느라 정신이 없으셨고요.

그렇게 함께 무언가에 몰입해 있는 풍경이 너무 좋았습니다. 워크숍의 목표치로 완성해야 할 분량은 있었지만 그와 상관없이 각자의 리듬으로 붓을 움직이고, 물감의 다채로운 색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마치 현실과 단절된 다른 세상에 온 듯했어요. 어쩌면 책방 이랑의 본모습을 본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보통은 내부의 인테리어와 진열된 책의 큐레이션이 책방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요소겠지만 이날만큼은 공간에 모인 사람들의 그 고유한 분위기보다 책방을 더 잘 설명할 수 있는 건 없어 보였습니다. 책방 이랑은 동네 사랑방처럼 편안하게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는 공간이었습니다.

책을 만나고 사람의 온기를 느낄 수 있는 사랑방으로서의 동네책방이 더 많아진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사람들이 갈수록 책을 안 읽고 그래서 책은 더 안 팔리고.. 현실은 어렵다고 하지만 그래도 희망을 품어보고 싶습니다. 동네책방도 책이 잘 안 팔린다는 걸 알기에 이미 많은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관심 있는 사람들이 거기에 조금씩 마음과 발걸음을 보탠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책방에서 친구를 만나 커피도 마시고, 누군가에게 선물할 블라인드북도 한 권 고르고, 북토크에서 작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독서모임에서 함께 책을 읽기도 하고.. 책방이 책을 구입하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곳이라면 동네책방은 대형서점이나 온라인서점에 밀려 금세 자취를 감춰버리고 말 거예요. 하지만 사람이 모여드는 사랑방 같은 곳이라면 그래서 개인의 삶이 확장되는 공간이 될 수 있다면 수많은 골목의 작은 책방들도 오래도록 우리 곁에 있을 거예요.

이제 다같이 동네책방에 갈 시간입니다. 얼른요.

﹅ 이랑

* ‘소소한 산-책’ 코너에서 독자 투고를 받습니다. 제 걸음이 미처 닿지 못한 곳들의 이야기도 전하고 싶어요. 분량 제한은 없습니다. 짧아도 좋고요. 자유롭게 여러분의 산-책 이야기 들려주세요. 해당 메일(letter@sewmew.co.kr)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선정된 분께는 오후의 소묘에서 준비한 굿즈와 신간을 보내드립니다. 소중한 원고 기다리고 있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