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책장으로부터

신유진 작가님의 <엄마의 책장으로부터> 연재를 시작합니다. 엄마의 책 속에서 만난 언어, “가장 연약한 순간에 가장 용감하게 나아갔던 사람에게 배운 언어”에서 시작된, 혹은 그곳으로 향하는 “하나밖에 없는 오솔길”을 걸어요. 이번 글은 그 길을 향해 문을 여는 서막이고요. 뒤따라 걷다 보면 또 다른 제 건넌방도 만날 수 있을까요? 그런 희망 품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엄마의 책장으로부터] 맨발로 걷는다

글: 신유진   엄마는 사계절 내내 맨발로 다닌다. 겨울에도 양말 신은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엄마의 발은 햇빛과 흙과 굳은살로 누런빛이 돈다. 그 발로 여름에는 슬리퍼를 겨울에는 운동화를 구겨 신고, 집에서 시장을 통과해 몇십 년째 일하는 가게까지 딱 5분 거리를 걷는다. 사람의 일평생이 그 5분 거리에 다 있는 것처럼. 느리고 무거운 걸음으로. 시장에 있는 가게가 엄마의 일터가 된 것은 아빠의 사업 실패 때문이었다. 엄마는 그곳에서 옷, 액세서리, 화장품을 팔았고, 말과 시간을 팔아서 가족을 부양하며 아빠가 잃은 것을 ...

[엄마의 책장으로부터] 갈망 혹은 비명

글: 신유진   “제가 원하는 것은 생명이 유동하는 것, 매일매일 변하는 것, 어떤 새로운 것, 습관적인 것인데! 미칠 듯한 순간, 세계와 자아가 합일되는 느낌을 주는 찰나, 충만한 가득 찬 순간 등 손에 영원히 안 잡히는 것들이 나의 갈망의 대상입니다.”*   전혜린의 편지다. 엄마의 책에도 내 책에도 이 구절에 밑줄이 그어져 있다. 우리는 각자의 장소에서 전혜린을 읽었다. 엄마는 건넌방 이불 속에서, 나는 파리의 다락방에서. 엄마가 전혜린의 책,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를 완독한 것은 198 ...

[엄마의 책장으로부터] 건넌방

글: 신유진   이야기는 건넌방에서 시작됐다. 작은 창으로 세상이 손바닥만 하게 보이던 방, 그 건넌방에 스물세 살의 여자와 아기가 있었다. 여자는 몇 날 며칠 잠을 자지 않았다. 누운 아기를 보면 무서운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잠든 사이,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 밥을 먹는 사이, 여자는 아기가 갑자기 숨을 쉬지 않을까 봐, 작은 몸이 부서질까 봐 두려웠다.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출산을 죄책감이라고 했다. 출산은 아기를 놓아버리는 것이며, 태어난 생명의 첫 표명은 고통이라고 말했다. 여자는 뒤라스의 말에 공감했다. 실제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