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치코

 

G11N. Globalization. 세계화.

자본주의 경제의 확장이나 국가들 사이의 정치적 헤게모니 싸움이 연상되는 이 뾰족한 단어는, 의외의 부드러운 뜻으로 표준국어대사전에 등재되어 있습니다. “세계 여러 나라를 이해하고 받아들임. 또는 그렇게 되게 함.” 서로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는 것 같네요. 그런데 세계화라는 단어가 정말 그런 느낌인가? 많이 부족해 보입니다. 두 번째, 세 번째 의미들이 추가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세계화라는 단어와 떼려야 뗄 수 없는 IMF 재난을 온몸으로 겪은 세대가 여전히 사회의 중장년층에 포진하고 있는 한국 사회라면 말이죠. 그래도 표준국어대사전의 첫 번째(이자 현재로서는 유일한) 뜻이 의미 없어 보이지는 않습니다. 특정 기업이나 국가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국경을 무력화하고 억압과 착취를 지구 전역으로 무한히 확장하는 그런 살벌한 세계화가 아니라도, 우린 이미 각자의 삶에서 다양한 세계화를 경험하고 있으니까요.

 

어느 분야가 되었건 무엇을 많이 좋아하다 보면 언젠가는 국가의 테두리가 좁다고 느껴지는 때가 반드시 있습니다. 덕후의 존재란 그런 것입니다. 덕질이란 필연적으로 세계화, 그러니까 여러 나라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길입니다. 아름다운 길이지요. 책을 예로 들면, 어떤 주제 혹은 장르를 꾸준히 읽어가다 보면 언젠가는 다른 언어로 쓰인 책까지 관심을 확장하게 됩니다. 피할 수 없는 길입니다. 그 책이 이미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아, 다행이네요. 하지만 모든 책이 번역 출판될 수는 없는 터라 우리는 시도 때도 없이 외국어라는 벽 앞에서 좌절하게 됩니다. 세계화 시대에 책을 구하는 거야 일도 아닌데 펼쳐봤자 검은 것은 글씨요 흰 것은 종이라면…. 그래서 관심 가는 외서를 만났을 때 보통의 독자들은 이렇게 생각할 겁니다.

‘번역본은 언제 나올라나?’ 또는 ‘이거 번역되면 좋을 텐데…’

 

여기서 출판인들은 조금 다르게 생각합니다. 좋은 외서를 찾아다니는 게 업무다 보니까요.

‘판권이 아직 살아 있으려나? 선인세는 얼마쯤일까?’

그 책을 자신이 출판할 수 있는 상황에서는 그렇습니다. 책을 내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지레 포기하게 되거나, 책을 내기 위한 구체적 절차를 준비하곤 합니다. 이때 어떤 선택을 할지는 각자 처한 상황에 따라 달라집니다. 비슷한 상황이라도 개인의 모험 성향에 따라 차이가 생기곤 하죠.(하루키의 소설 신작이 일본에서 출간되었는데 선인세가 얼마쯤일지 고민하며 판권을 문의하는 1인 출판사는 거의 없다고 봐야 하지만, 루피가 해적왕이 되기 위해 혈혈단신으로 위대한 항로에 몸을 던지듯 모험심 강한 1인 출판사가 또 아예 없지는 않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만약 자신이 출판할 수 없는 경우라면(대개는 주제나 장르의 제약 때문에) 이때는 대부분의 출판인들이 이렇게 생각할 겁니다.

‘아, ㅇㅇ출판사에서 내줬으면 좋겠다.’

 

저 역시 얼마 전에 그런 책이 있습니다. <Marx for Cats : A Radical Bestiary> 고양이를 위한 마르크스라니, 제목을 보는 순간 눈이 뿅-하고 튀어 나올 뻔했습니다. 듀크대학교 출판부에서 나왔으니 아마 학술서 같은데… 홈페이지에 있는 책 소개글을 번역기로 돌렸더니 궁금증은 더 커져갔습니다.

 

<Marx for Cats>

 

“『고양이를 위한 마르크스』의 서두에서 Leigh Claire La Berge는 “모든 역사는 고양이 투쟁의 역사”라고 선언합니다. 마르크스주의 비평에 맞게 중세 설화 형식을 수정한 La Berge는 서양 경제사를 통해 고양이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에 있는 동물성을 드러냅니다. 그녀는 자본주의의 봉건적 선사시대, 식민주의와 제국주의 시대, 자본주의를 지지했던 부르주아 혁명과 이에 반대했던 공산주의 혁명을 아우르는 1,200년의 역사를 통해 고양이가 오랫동안 경제 비판과 해방 가능성의 동물로 이해되어 온 과정을 설명합니다. 사자, 호랑이, 살쾡이, ‘사보태비’의 반복적인 기록적 등장에 주목함으로써 La Berge는 고양이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경제를 상상하는 방식에 중심이 되었다고 주장하며, 생태 위기의 순간에 인간과 동물이 서로에게 무엇을 빚지고 있는지 질문함으로써 생태사회주의의 필요성과 가능성에 대한 현재의 논쟁에 동참합니다.”*

 

모든 역사는 고양이 투쟁의 역사,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에 있는 동물성, 고양이가 오랫동안 경제 비판과 해방 가능성의 동물로 이해되어 온 과정, ‘사보태비sabo-tabbies’의 반복적인 기록적 등장, 생태 위기의 순간에 인간과 동물이 서로에게 무엇을 빚지고 있는지 질문함으로써… 정말 멋진 말들의 향연입니다. 그런데 이 책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한들 오후의 소묘에서 낼 수는 없는 노릇이고, 듀오링고 연속학습기록 504일 차에 접어드는 실력으로 과연 이 책을 영어로 읽을 수 있을까 0.5초 정도 고민도 해봤지만 역시 논리적인 결론은 단 하나, 전진입니다,가 아니라,(이미화 작가님의 신간 <엔딩까지 천천히>를 보셔야 이게 개그가 되는데…)

“ㅇㅇ출판사에서 내줬으면 좋겠다.”

 

대체 무슨 얘길 하려고 이러는 건가 갸웃하실 수도 있는데요. 오늘은 <소소한 리-뷰> 코너지만 고양이 얘기를 하는 날입니다. 복잡한 현대 사회에서 ‘절대’라거나 ‘무조건’이라는 표현을 쓰기는 쉽지 않습니다. 어떤 일이건 다수의 이해가 충돌하고 여러 입장이 얽혀 있는 건 물론이고 좋음과 나쁨의 경계마저 뿌옇게 흐려져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절대 그렇다/그렇지 않다, 무조건 맞다/아니다, 라는 말이 누군가에게 잠깐의 쾌감을 선사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이후에 웬만하면 몇 배의 곤란함을 동반하게 됩니다. 종교나 왕권이 모든 가치 판단을 독점한 상황이 아니라면, 인간 사회에서 어떠한 경우에도 반드시 그런 건 없습니다. 절대 없는데, 무조건 없는 게 맞는데 말입니다. 어떨 땐 또 있기도 하더라고요. 저 같은 경우엔 무언가 고양이가 엮이면 그렇습니다. 고양이이라면 무조건 인정이지, 가 되어버리는 상황인 거죠. 평소라면 영어로 408쪽이나 되는 사회 경제학 책을 보고 무턱대고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을 겁니다. <Marx for Cats>에 관심이 갔던 이유는 오직 고양이가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고양이라면 절대적으로 궁금할 수밖에요!

 

국립민속박물관에서 그렇게 절대적으로 옳으며 무조건 가봐야 할 전시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요물, 우리를 홀린 고양이> 여기도 제목부터 예술입니다. 홈페이지에 소개된 전시 개요를 한번 보실까요?

 

“고양이는 일찍이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는 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큰 눈, 조그만 코, 통통한 볼과 3.6kg의 평균 체중을 가진 고양이는 사람 아기와 비슷한 외형과 체구로 우리의 보호본능을 일으키며 야생에서 도도하게 살다가도 필요할 때는 인간을 찾아와 애교를 부리며 노련하게 인간을 조종해 왔습니다. 이 뻔뻔하고 귀여운 생명체에게 옛사람들은 자신의 고기반찬을 내어주었고 요즘 사람들은 기꺼이 자신을 ‘집사’로 칭하며 지갑을 엽니다. 국립민속박물관에서는 예로부터 지금까지 고양이에게 홀려 온 우리 인간들을 깨우치기 위해 이 전시를 준비했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고양이들의 무시무시한 세계 정복의 비밀을 파헤칠 것입니다.”

 

 

고양이들의 무시무시한 세계 정복의 비밀이라니요. 소개글을 보니 모든 역사는 고양이 투쟁의 역사라고 한 <Marx for Cats>와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네요. 역시 고양이는 무조건 인정이라니까요 :)

 

<요물> 전시는 크게 3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부는 ‘귀엽고 요망한 고양이’라는 제목이고 그 속에 다시 3개의 소제목 전시들이 있는데, 1-1장은 ‘매력적인 고양이’라는 제목으로 고양이의 기초적인 생김새와 특징부터 시작해서, 고양이에 관한 지식이 전혀 없는 사람이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친절한 설명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1-2장은 ‘우리 곁의 고양이’인데요. 역사 속 기록이나 그림에 등장하는 고양이의 모습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실 1-2장이 전시의 메인 콘텐츠인 줄 알았습니다. 아무래도 전시 장소가 ‘국립민속박물관’이니까요. 저뿐만 아니라 많이들 그렇게 기대하지 않았을까 싶긴 하지만… 애석하게도 고양이와 관련된 역사 자료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약간 실망스럽기도 하고 뭔가 이상한데 싶어 전시 소개를 봤더니 이상한 게 아니었습니다. 전시 소개 어디에도 ‘유물 전시’라는 말은 없었습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고양이에게 홀려 온 우리 인간들을 깨우치기 위해” 준비한 이 전시는 고양이-인간 관계의 역사를 짚어보는 전시였던 것입니다. 전시에 각종 유물이 있을 거라는 기대는 단순한 착각이었습니다. ‘국립민속박물관’이라는 이름에 홀린 거죠. 고양이한테 홀렸거나요.

 

 

억울하게 죽음을 맞이한 여성이 자신이 아끼던 고양이에게 복수를 부탁하고, 고양이 귀신이 복수를 행하는 내용을 담은 <살인마>라는 영화가 상영되고 있는 1-3장 ‘고양이의 이면’에는 각 지방에서 수집한 고양이와 관련 (민담이나 설화 풍의) 이야기의 녹취도 제공하고 있습니다. 지금에야 ‘나만 없어 고양이’ 열풍이라고 할 정도로 사랑스러운 존재가 되었지만 고양이에 대한 사회적 시각이 늘 호의적이었던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1-3장에서는 “밤에 활동하며 발소리를 내지 않고 은밀하게 움직이는 특성 때문에 어둡고 부정적인 존재로 여겨지기도 했”던 고양이의 모습을 만날 수 있습니다.

 

2부에서는 반려동물로서의 고양이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제목마저 ‘안방을 차지한 고양이’이고요. 2-1장 ‘고양이의 지구정복’에서는 고양이와 인간이 관계 맺은 역사, 세계 각국의 고양이 관련 문화 등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베트남의 12지에는 고양이가 들어가 있으며 일본에서 고양이는 행운의 상징(마네키네코)이라는 내용 등이죠. 2-2장 ‘집사와 주인님’에서는 본격적인 현대 반려묘 문화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반려인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들이라 이게 전시인가, 싶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고양이와 친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충분히 재밌고 유용한 내용이란 생각도 들었습니다. 2-3장은… 사실 여기서 충격을 좀 받았습니다.

 

관람 동선을 쭉 따라오면서 전시의 콘셉트에 대해 어느 정도는 이미 단정 짓고 있었습니다. 이 전시는 고양이를 반려하고 있지 않은, 고양이라는 세계와 관계 맺지 않은 사람들을 위한 현장 교육 느낌의 전시다, 라고 말이죠. 그런데 2-3장의 소제목이 ‘무지개다리 건너 고양이별’이었습니다. 이 전시는 공간도 다른 전시와는 단절되는 것처럼 분리되어 있었고 조명이나 작품 배치도 완전히 달랐습니다. 차분히 생각하며 걷을 수 있게 만든 느낌이었는데, 첫인상은 이거 좀 센데…였습니다. 이별은커녕 고양이 반려 경험도 없는 사람들 눈높이에서 전시를 진행하다가 갑자기 ‘펫로스’라니요. 하지만 금방 수긍이 가더라고요. 고양이를 사랑하는 일에, 특히 반려 관계를 맺게 된다면 가장 중요한 건 한 생명에 대한 책임입니다. 그 책임의 가장 깊고 무거운 자리엔 당연히 죽음과 이별이라는 필연의 과정이 존재하고요. 슬프다고 피할 수도 무섭다고 도망갈 수도 없는 길입니다. 당연히 고양이 전시에서도 빠져서는 안 되는 내용이죠. 2-3장은 전시를 기획한 사람들이 얼마나 고민했을지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고 아무튼 의외의 공간이었습니다.

 

 

3부에서 ‘우리 동네 고양이’라는 제목과 ‘공존을 위한 모색’이라는 소제목으로 길냥이 관련 이야기를 보여주며 전시는 마무리됩니다. 3부 내용이 조금 더 풍부했으면 어땠을까 싶은 미련이 남긴 했지만, 전시 준비 과정에 여러 제약 등이 있었을 수도 있으니까 그냥 넘어가기로 했습니다. 전체적으로 좋은 전시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고양이에 관한 민속 유물 전시일 것이다, 라는 지레짐작은 비록 초장에 박살 났지만, 1부에서 3부까지 차례를 따라 관람하다 보니 전시 기획의 의도가 분명히 느껴졌습니다. 우리를 홀린 고양이. 고양이가 얼마나 매력적인 동물이며 또 얼마나 오랫동안 인간과 관계를 맺어왔는지, 고양이를 사랑하고 돌보는 일은 어떤 일인지, (반려나 길고양이 돌봄 등) 만약 고양이에 대한 관심이 생겼을 때 어떻게 준비하고 행동하면 되는지를 친절하고 상세하게 알려주는 지침서 같은 전시였습니다. 물론 그것이 단점일 수도 있습니다. 고양이 관련 페어를 제집처럼 들락거리며 ‘가슴으로 낳아 지갑으로 기른다’를 신조로 삼는 고양이 덕후 혹은 반려인이라면 <요물> 전시가 다소 심심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엔 고양에 이미 홀린 사람들만 있는 건 아니니까요. 그렇지 않은 사람이 훨씬 많기에 아직 고양이한테 홀리지 않은 이들의 눈높이에 맞춘 이 전시에 뜨거운 박수를 보내야만 합니다. 그리고 고양이한테 진정으로 홀린 사람이라면 절대 이 전시에 실망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왜냐고요? 고양이라면 무조건 인정,이니까요.

 

 

요물, 우리를 홀린 고양이 | 국립민속박물관 | 2024.05.03 ~ 2024.08.18

 

*Translated with www.DeepL.com/Translator (free version)

 

 

 

‘소소한 리-뷰’는 [월간소묘 : 레터]에 연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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