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치코

 

<새의 심장>은 시에 관한, 시의 탄생에 관한 그림책이에요. 이야기의 주인공인 나나는 바닷가에서 태어났고 인간의 말보다 바다의 말을 먼저 배웠어요. 그곳에는 그물과 배와 모래와 산들바람처럼 보드라운 돌멩이가 있었고 파도가 먼바다에서 유리 조각들을 동글동글하게 깎아 선물로 보내주었어요. 소녀는 시와 시의 마음을 찾아 도시로, 숲으로 여행을 떠나고 남다른 호기심과 때 이른 이별, 애틋한 우정과 자유로운 영혼으로 빚어진 삶을 통해 마침내 시와 사랑을 발견하게 되죠.

 

 

‘소소한 산-책’은 책과 서점과 산책에 관한 이야기예요. 매달 새로운 산-책의 공간으로 발걸음 하는 이치코는, 바닷가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바다를 품은 도시에서 자랐어요. 마치 커다랗게 구멍 난 공백처럼 시커멓던 그 물결 덩어리를 바다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에요. 그곳에는 그물과 배가 있었지만 모래와 산들바람처럼 보드라운 돌멩이는 없었어요. 공장의 폐수에 질식해버린 파도는 아무것도 선물로 보내주지 않았어요. 이치코도 나나처럼 도시로 여행을 떠나고 호기심과 이별과 우정과 자유로운 영혼으로 빚어진 삶을 겪었지만 시를 발견하지는 못했어요. 시의 마음은 말할 것도 없고요. 대신에 사랑을 잔뜩 발견하게 되었어요. 김삼삼, 오히루, 강모카, 이치코, 고미노, 송오즈, 밤시월 그리고 수많은 길 위의 존재들까지, 미처 크기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요.(<이치코의 코스묘스>는 곧 돌아올 거예요.)

 

한국은 대륙에서 남북 방향으로 길게 돌출된 반도 지형이라 국토의 많은 부분이 바다와 접해 있어요. 섬을 제외하고 바다에 면한 행정구역만 해도 김포-인천-시흥-안산-화성-평택-아산-당진-서산-태안-홍성-보령-서천… 경기에서 충남까지 훑었는데 목록이 너무 길어지네요. 아무튼 이렇게나 많은 바닷가 마을 중에서 제가 자랐던 도시는 마산이었어요. 지금은 창원시로 통합되어 없어진 도시죠(이름은 곳곳에 남아 있지만요). 왜 하필 마산이었을까요? 항구도시임에도 불구하고 바다와 관련된 추억을 만들기가 무척이나 힘들었던, 참 희한한 동네였어요. 지금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맑아(?)졌지만, 제가 자랄 때만 해도 마산 앞바다는 산업화로 인해 오염된 바다의 대명사였어요. 전국 어디에도 그렇게 무겁고 침울한 검은빛의 바다는 없었을 거예요. 그래서 처음으로 바다를 제대로 본 건 마산이란 도시를 떠난 뒤였다고 할 수 있어요.

 

학교 동아리의 여름 수련회 때문에 스무 살에 처음으로 동해의 바다를 보았어요. 동해는 남해와는 완전히 다른 바다였어요. 바다가 이렇게 넓구나, 그리고 파랗구나, 마치 바다를 처음 본 사람처럼 신기해했던 기억이 나요. 심지어 바닷물에 사람이 들어가도 되는구나! 그곳은 삼척에 있는 해수욕장이었는데 바다를 그리 오래 즐기진 못했어요. 동아리 이름이 ‘탈’이었고, 만날 탈춤만 추는 곳은 아니었지만 여름 수련회는 신입생들이 처음으로 탈춤을 배우는 중요한 행사였는데, 몸풀기부터 시작해서 탈춤 연습까지 모든 과정을 땡볕의 백사장에서 진행하는 선배들의 기백을 견디지 못하고 이틀 만인가에 도망쳐 나왔거든요.(빠른 포기!) 모래밭에서 탈춤을 춰보셨나요? 게다가 온통 펄쩍펄쩍 뛰는 동작으로 이루어진 봉산탈춤을요. 얼마나 짜릿한지, 말도 마셔요. 바다는 눈에 들어오지 않더라고요.

 

다음으로 찾은 동해의 바다는 정동진이었어요.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이라면 누구나 기억하실, 왜냐면 당시 평균 시청률이 50%를 넘었고 최고 시청률은 무려 64%를 넘었으니까요, <모래시계>라는 드라마에 정동진역이 나왔는데, 그걸 본 뒤에 드라마의 감동 탓인지 사람들이 유명하다며 몰려가는 탓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한번 가볼까?’라는 마음으로 발걸음을 했던 것 같아요. 바다와 얼굴을 맞대고 있는 고즈넉한 분위기의 간이역은 아름다웠고 방송 화면으로 유명해진, 바닷바람 때문에 한쪽으로 삐딱하게 기울어진 소나무는 운치 있었지만 제철의 관광지가 으레 그렇듯이 결국 기억에 남은 건 사람, 사람, 사람들뿐이었어요. 바다가 어땠는지조차 모를 정도로요. 하지만 아무 의미도 없는 여행은 아니었어요. 그때가 (정동진으로 가는 교통편으로 환승하기 위해서이긴 하지만) 강릉이란 도시를 처음 방문한 순간이었고, 그 후로도 강릉은 언제나 다시 가고 싶은 곳이 되었으니까요.

 

수도권에 거주하는 사람(어쩌면 한국 사람 대부분)이 ‘바다가 보고 싶다’라고 한다면 그건 아마 동해 바다일 거예요. 서해 바다일 리는 만무(는 너무 심한가 싶기도 하지만..)하고 간혹 섬과 어우러진 풍경의 남해 바다인 경우도 있을 테지만, 대체로는 깊고 푸르고 광활한 동해 바다일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 같아요. 바다답다는 말이 이상할 수도 있지만 왠지 동해가 가장 바다답다는 생각이 드니까요. 강원도의 주요 도시는 동해안을 따라서 쭉 늘어서 있어요. 삼척, 동해, 강릉, 양양, 속초, 고성 같은 도시들이고 이 이름들을 생략한 채로는 동해 바다를 머릿속에 떠올릴 수 없을 정도로 제각기 다른 매력을 뽐내는 곳들이죠. 어느 도시가 동해 바다를 대표하는 곳인가는 사람마다 모두 다를 텐데 제 경우엔, 단연 강릉이에요. 이유는 잘 모르겠어요.(심지어 살고 싶다고 생각하는 곳은 강릉이 아니기도 해요.) 항구도시에서 자란 성장기와 연관이 있을 거라고 막연히 추측해 볼 따름이에요. 제게 각인된 바다의 이미지는 인적 없이 넓게 펼쳐진 백사장이나 해안선을 따라 길게 뻗은 국도 같은 장면보다 늘 사람으로 북적거리는 어시장에 가까운 것 같아요. 그래서 (강원도의) 동해안에서 가장 큰 도시인 강릉에 감정이 이입되는 게 아닐까 싶은 거죠. 어쨌거나 8월의 마지막 날을 끼고 이번에는 강릉으로 산-책을 다녀왔어요. 그리고 마침 이름에 바다란 단어가 들어간 책방 ‘한낮의 바다’를 방문했어요. 여름이 가기 전에 바다를 잔뜩 눈에 담아두려는 사람처럼 말이에요.

 

한낮의 바다라고 해서 바다가 보이는 서점을 생각하시면 곤란해요. 이름은 이름일 뿐이니까요. 한낮의 바다는 교동짬뽕의 원조(혹은 원조라고 주장하는)로 유명한 가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강릉 시내에 위치해 있어요. 지도를 놓고 보니 강릉역과 버스터미널의 중간쯤 되는 곳이네요. 큰길에서 골목으로 꺾어 든 다음에 건물 하나를 지나면 움푹 팬 듯 숨어 있는 서점을 만날 수 있어요. 길을 향한 전면이 통유리로 되어 있는데 깊숙이 보이는 실내 공간의 실루엣과 윤슬처럼 유리창에 반사된 빛이 바다를 연상시키도 했어요. 조심스럽게 서점 문을 열고 들어서자 밖에서 보던 풍경과는 또 다른 공간이 나타났어요. 가지런히 책이 진열된 서가와 매대는 한편으론 서점 같기도 했고 한편으론 서재 같기도 했어요. 어느 쪽이더라도 주인장의 세심한 손길로 말끔하게 잘 정돈된 공간이었어요. 실내가 그리 넓지는 않았지만 진열된 책 사이를 여유롭게 걸을 수 있을 만큼 시원하게 배치된 구조였고요. 전체적으로 어느 하나 욕심을 부리지 않은, 과한 부분이 전혀 없는 공간이었어요.

 

서점의 첫인상은 무척이나 친근했어요. 강릉이 제게 주는 친밀감 때문일 수도 있지만 서가와 매대에 자리 잡은 책들을 찬찬히 구경하다 보니까 다른 이유가 있었더라고요. 서점에 있는 책의 표지에는 메모가 꼼꼼하게 붙어 있었어요. 직접 쓴 손글씨로 말이에요. 멀리서 볼 때는 책을 소개하는 글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가까이서 보니까 메모의 제목이 ‘한낮의 페이지’였어요. 책의 페이지 번호와 함께 책에서 뽑은 문장이 적혀 있더라고요.(간혹 추천의 말과 함께요) 어떤 책은 인덱스 플래그가 빼곡하게 붙어 있기도 했어요. 아마 그렇게 열심히 읽은 후에 가장 감명을 받았거나 함께 나누고픈 문장을 표지의 메모에 적어둔 게 아닐까 싶었어요. 이런 방식도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굳이 독자 혹은 비평가의 언어로 소개 글을 쓰지 않더라도 책을 대표하는 문장 하나를 공유하는 것만으로 큐레이팅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똑같은 책이라도 사람마다 뽑아내는 문장은 다를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서점을 둘러보는 내내 마치 오랜 친구의 서재를 구경하는 것 같았어요. 독서의 취향이 완전히 똑같지는 않지만 책을 좋아하는 결이 비슷해서 마음이 맞는 친구 말이에요. 글로 설명하긴 애매하지만 무슨 말인지 다들 아실 거예요. 그만큼 편안한 공간이었어요. 책이 말을 거는 것 같기도 하고 친구가 말을 건네는 것 같기도 하고. 서점 중앙의 매대를 중심으로 몇 바퀴나 돌면서 책을 구경했어요. 한 바퀴 돌 때마다 이전과는 다른 책이 눈에 들어왔고 다음에 한 바퀴 돌 때는 또 무슨 책이 눈에 띌까 기대되었어요. 이렇게 말하면 책이 엄청 많은 것 같지만 실제로 서점에 진열된 책은 다른 비슷한 규모의 서점에 비해서 적은 편이었어요. 사람에 따라서는 듬성듬성하다고 느낄 수도 있을 만큼요. 하지만 책이 많다고 해서 서점을 구경하는 즐거움이 무조건 덩달아 커지는 건 아니에요. 책이 얼마나 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책이 어떻게 있느냐가 중요하니까요. 친구의 서재를 구경할 때 즐거울 수 있는 건, 책 한 권 한 권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일 거예요. 얘가 이런 책을 가지고 있네? 이 분야 책이 많구나, 의외로 OO 작가의 책은 없네? 하면서요. 한낮의 바다에서 책을 둘러보면서 비슷한 걸 느꼈어요. 아! 어? 음.. 하면서, 마치 친구와 대화하는 것 같은 기분 말이에요.

 

독립서점 혹은 동네책방을 갔을 때 서점이 자라고 있는 느낌을 받는 경우가 있어요. 마치 정성스럽게 돌보는 식물처럼요. 아마 서점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와 관계가 있을 것 같아요. 이를테면 ‘서점을 해야지!’라는 느낌표의 마음가짐이라면 처음부터 단단히 뿌리를 내린 나무처럼 무성한 모습일 거예요. 규모에 딱 맞는 서가와 매대, 전시 장소 등을 구상하고 인테리어와 가구를 배치한 다음 또 거기에 꼭 맞는 책을 빈틈없이 채워서 시작부터 완성도 높은 서점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공간 말이에요. 얼룩 없이 반듯한 페인트칠이나 사람 손을 타지 않아 광택이 살아 있는 가구와 소품을 못 보고 지나친다면 아마 오래전부터 영업을 하고 있던 서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거예요. 많은 고민과 준비와 노력이 필요할 테지만 처음부터 세계만방에 서점!이라고 당당하게 외칠 수 있다는 점에서 본받을 점이 많은 것 같아요.

 

반면에 ‘서점을 해볼까?’라는 물음표의 마음으로 책방을 시작하는 경우도, 의외로 많이 있는 것 같더라고요. 앞선 느낌표의 마음에 비해 각오가 부족해 보이고 준비가 허술해 보일 수도 있어요. 하지만 책망할 일은 아니에요. 누군가에겐 느낌표의 뾰족한 마음으로 뭔가를 시작하는 게 에베레스트를 무산소로 등정하는 것만큼 어려운 경우도 있으니까요. 많이 고민하고 오래 준비했음에도 불구하고 단단한 각오의 AT 필드가 좀처럼 생기지 않는, 그래서 언제나 동글동글한 물음표의 마음으로 뭔가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누군가를 사귀는 일에도 직장에 처음 출근할 때도 여행을 떠날 때도 심지어 달리기를 시작할 때도 말이에요. 책방을 여는 일로 친다면 ‘나중에 내가 이 책들을 다 가지면 되지 뭐,’ 정도의 마음이라고나 할까요. 그런데 이렇게 느슨한 시작이 무너지지 않고 끈질기게 버티며 커가는 경우가, 또 많이 있어요. 이 성장을 지켜보는 건 마치 길에서 구조한 아깽이가 캣초딩이 되고 묘춘기를 지나 늠름한 성묘가 되는 걸 보는 것처럼 행복한 일이에요. 만약 물음표의 마음으로 시작해 조금씩 자라고 있는 공간을, 카페든 식당이든 숍이든 상관없어요, 만나게 된다면 그건 엄청난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공간의 비밀스러운 시작과 성장을 함께할 수 있다는 건 결코 흔한 일이 아니에요.

 

한낮의 바다는 2019년 7월에 문을 열었어요. 이제 2년 조금 더 되었네요. 짧은 시간일 수도 있고 긴 시간일 수도 있지만, 한창 자라고 있는 서점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서점을 둘러보는 내내 이 공간에 시간이 조금씩 쌓여가고 있구나,라는 게 느껴졌어요. 앞으로 얼마나 자라게 될지, 어떤 모습으로 변하게 될지 궁금해졌어요. 혹시 강릉에 갈 일이 생긴다면 한낮의 바다에 꼭 들러보세요. 그리고 한낮의 바다를 방문하셨다면 한 번의 발걸음으로 멈추지 마세요. 내년, 내후년에 꼭 다시 찾아가 보세요. 그때 한낮의 바다는 분명, 지금보다 훨씬 자라나 있을 거예요.

 

﹅ 한낮의 바다 instagram.com/midday_sea/

 

***한낮의 바다는 ‘책, 인물, 영상 촬영이 금지’되어 있으며, 아래는 동의를 구하고 찍은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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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묘의 산-책

‘난 아직도 그 순간을 느낄 수 있고, 이미 충만함이 무엇인지 알고 있으니까. 영원한 아름다움을 향한 아쉬움은 남지만 그것으로 족하다.’(102쪽)

온라인서점에서 신간 목록을 하루에도 몇 번씩 확인하니 마치 세상에 나오는 책들을 다 아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곤 합니다. 그러다 작은 서점들에서 모르는 책을 마주하면 가슴이 뛰어요. 한낮의 바다에서는 그림을 그리는 배미정 작가의 <아는 여자>를 만났습니다. 표지 앞에 적어놓은 메모의 문장을 보고 촘촘히 붙인 플래그를 따라 읽으면서요. ‘삶을 지속하기 위해서 각자의 방식으로 애쓰는 사람들. 특히 내가 잘 아는 여자들에 관한 이야기’가 그림과 함께 일기처럼 소설처럼 펼쳐집니다. 모야 씨의 산책을 따라 이 책은 이곳에서 만날 운명이었나 봐요.

이실장은 저희가 사랑하는 곳 도쿄의 한 동네 이름이 들어간 요시모토 바나나의 에세이 <시모키타자와에 대하여>를 샀습니다. 내용은 시모키타자와에 대해서라기보다 그곳에서 지낸 작가의 한 시절에 관한 이야기에 가깝지만, 크게 다르지 않겠죠.

 

 

 

 

* ‘소소한 산-책’ 코너에서 독자 투고를 받습니다. 제 걸음이 미처 닿지 못한 곳들의 이야기도 전하고 싶어요. 분량 제한은 없습니다. 짧아도 좋고요. 자유롭게 여러분의 산-책 이야기 들려주세요. 해당 메일(letter@sewmew.co.kr)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선정된 분께는 오후의 소묘에서 준비한 굿즈와 신간을 보내드립니다. 소중한 원고 기다리고 있을게요.

 

‘소소한 산-책’은 [월간소묘 : 레터]에 연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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