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치코

 

어떤 도시는 그곳을 상징하는 계절이 있습니다. 강릉이나 속초라면 아무래도 여름이겠지요. 개인의 취향에 따라 겨울 바다가 더 좋을 수도 있고, 봄부터 가을까지 제각각 다른 매력들이 있을 테지만 그래도 동해 바다라면 왠지 여름에 가야 할 것 같은 느낌, 한편으론 기세라고 불러도 좋을 분위기가 있습니다. 러시아 중앙 지역의 대표적 도시인 이르쿠츠크는 시베리아의 파리라는 별명에 걸맞게 누가 뭐래도 겨울이 딱이죠. 툭하면 영하 20도를 넘나들고 한파라도 닥치면 영하 30~40도까지 곤두박질치는 혹독한 추위에 막혀 그저 창밖의 눈보라를 보며 보드카만 하염없이 들이켜대는 한이 있더라도 말입니다.

 

일본의 도쿄, 오사카, 교토(는 가을?)라면 역시 봄에 가야죠. 한국도 여러 지역에 벚꽃길이 생겨 눈처럼 흩날리는 꽃잎 아래 봄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는 장소가 많아졌지만 그래도 사쿠라, 하면 역시 일본이지요. 꽃구경이라는 단어 풀이만으론 도저히 설명이 안 되는 하나미花見를 현지인들처럼 완전히 즐길 수는 없다 하더라도 그 들뜸의 곁에 잠시 머무는 것만으로도 훨씬 화려한 봄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사실 여름도 좋습니다. 고시엔, 인터하이, 마츠리, 하나비 등등 일본의 여름 하면 떠오르는 게 많네요.(일본을 너무 애니메이션으로만 배운 것 같기도 하고…) 폐가 아니라 아가미로 숨을 쉬어야 할 것 같은 그 축축하고 눅눅한 공기와 작열하는 폭염은 물론 감수해야겠지만 그래도 여름의 일본에서만 느낄 수 있는 선명한 매력이 있으니까요.

 

그렇다고 모든 도시가 계절의 상징과 연결되는 건 아닙니다. 서울을 한번 볼까요? 봄, 여름, 가을, 겨울.. 뭐 어쩌라고 싶은 마음이네요. 서울은 그런 거 없습니다. 아파트 구경 말고는 딱히 볼 게 없는 도시인데 계절이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황사나 미세먼지 덜한 날이면 그만이지요. 사람들이 모여 살아가는 공간으로서의 다채로운 특색보다 그저 효율적 기능들의 결합이 강조된 도시란 참 매력 없고 심심합니다. 서울만 그럴까요. 한국의 대도시들 대부분이 그렇다고 봐야죠. 도시의 크기가 작아지면 상황이 조금 낫습니다. 물론 거기도 한국인지라, 울창한 아파트숲의 풍경을 피할 수는 없지만 (인구는 줄고 있고 일자리는 부족하고 상권도 빈약하다는 뭐 그런 면에서) 자본주의적 기능이 조밀하지 못해서인지 그 느슨함 사이로 조금은 각자의 색채가 드러나곤 합니다.(관광객이라도 유치해야 지역 경제의 명맥이 유지된다는 절박함일 수도 있지만요.)

 

지난달에 다녀온 군산도 그랬습니다. 사람들이 거의 100%의 확률로 ‘초원사진관’을 먼저 떠올리곤 하지만 그보다 훨씬 입체적이고 매력적인 도시라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군산의 계절은 봄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군산의 (거의) 동쪽 끝에서 (거의) 서쪽 끝까지 중심을 가로질러 한참을 걸었는데요. 도시가 궁금할 때 무작정 걸어보는 게 최고라 여기는 까닭에 도심을 방황하듯 뚜렷한 목적지 없이 열심히 걸었습니다. 네 시간 넘게 말이죠. 좋았습니다. 아쉬운 점이 약간 있기도 했고요. 그런데 군산을 다녀와서 나중에 보니까 글쎄, 군산 구불길이라는 게 있었습니다. <군산>(한국의 땅과 사람에 대한 이야기 | 대한민국 도슨트 7)이란 책에 따르면 제주 올레길, 강릉 바우길, 지리산 둘레길과 더불어 국내 4대 명품길로 사랑받고 있다고 합니다. 금강을 따라 걷는 길부터 역사와 문화의 흔적을 좇아가는 길, 새만금 방조제와 섬을 건너 바다로 난 길까지, 1길부터 8길까지 총연장 188.4km의 멋진 길이었습니다. 이걸, 왜 몰랐을까요? 왜 미리 알아보지 않았던 걸까요! 아무튼 이렇게 다양한 풍경 속을 걸을 수 있다면 군산의 계절은 당연히 봄이어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군산에 가실 요량이면, 초원사진관도 좋고 한일옥도 좋고 복성루도 좋고 이성당도 좋겠지만, 꼭 봄의 군산을 걸어보시길 추천드립니다.

 

그리고 놓치면 안 되는 또 하나의 명소,

이번 달 <소소한 산-책>은 바로 군산의 자랑(!) 책방 마리서사를 다녀왔습니다.

 

마리서사茉莉書舍는 책방 이름부터, 왠지 느낌이 있습니다. 어디서 유래했는지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낭만 있다. 아니나 다를까 그 유래가 범상치 않습니다. 마리서사는 박인환 시인이 해방 이후 종로3가에 차린 서점의 이름입니다. 김수영 시인은 “마리서사를 빌려서 우리 문단에도 해방 이후에 짧은 시간이기는 했지만 가장 자유로웠던, 좌우의 구별이 없던, 몽마르트 같은 분위기가 있었다는 것을 자랑삼아 이야기해 보고 싶었다”*고 말합니다. 몽마르트라, 뭔가 ‘불란서’적인데요. 마리서사는 프랑스의 화가이자 시인인 마리 로랑생Marie Laurencin의 이름에서 따왔다는 설이 유력하다고 합니다. 마리의 한자 표기가 말리茉莉인 점을 들어 일본의 모더니즘 시인 안자이 후유에의 시집 <군함말리軍艦茉莉>(발음으로는 군칸마리)에서 빌려 왔다는 설도 있으나, 시인의 아내인 이정숙 여사가 박인환 시인이 마리 로랑생을 좋아해 그녀의 이름을 서점에 붙였다는 말을 들었다고 하니 아무래도 그쪽이 더 신빙성이 있겠죠.**

 

 

군산의 마리서사는 박인환 시인의 마리서사를 계승하고 있습니다. 군산 마리서사 대표님의 어느 인터뷰***에 따르면 “평소 김수영 시인의 시를 즐겨읽는데, 김수영의 산문 「마리서사」를 읽고 알게 되었으며 강원도 인제에 있는 박인환 문학관에 가서 1945년 종로 3가에서 열었던 ‘마리서사’ 복원모형을 보고 해방 직후 뭔가 새로운 것에 열광했던 그 마음에 이끌려 ‘마리서사’를 책방 이름으로 정했다고” 합니다. 새로운 것에 열광했던 그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요? 박인환 시인의 마리서사는 서점이라는 상업적 공간보다 사람이 모이는 아지트로서의 성격이 더 강했던 것 같습니다. “당대의 시인이던 김기림 김광균 오장환 이시우 이한직 이흡 등이 단골손님이 되었고, 청년 문사였던 김수영 양병식 임호권 등도 이 서점을 드나들면서 박인환의 친구가 되었다. 새로운 미술에 뜻을 둔 화가들도 드나들었고, 영화인들도 거기에 끼어들었다. 문학을 열망하던 청년 박인환은 마리서사를 찾는 당대의 모더니스트, 자유분방한 예술가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면서 자기 문학 세계의 기반을 만들었다.”****고 하니 말이에요.

 

어떤 일이든 결국 사람이 하는 법입니다. 자본에 의해, 특히 점점 극단으로 치닫는 금융자본주의에 길든 탓에 세상이 돈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건 착시와 왜곡일 뿐입니다. 사람이 없으면 자본주의도 없습니다. (마르크스주의가 시대에 뒤떨어진 이론으로 전락했지만 그럼에도 자본주의가 노동의 착취로 유지된다는 사실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 문화, 종교 등 삶의 모든 영역의 근간에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 사이의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관계를 맺을 것인가는 항상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군산) 마리서사 대표님을 이끌었던 마음이란 결국 해방 직후 종로3가를 북적이게 만들었던 사람들의 역동성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예술이라는 공통된 관심사로, 정치적 지향도 다르고 활동 분야도 다른 이들이 모여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낭만적이고도 이상적인 관계들 말이에요. 김수영 시인 역시 앞서 인용한 문장 다음에 이렇게 회고합니다. “그 당시만 해도 글쓰는 사람과 그밖의 예술하는 사람들과 저널리스트들과 그밖의 레이맨들이 인간성을 중심으로 결합될 수 있는 여유 있는 시절이었다.”*

 

그래서,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이제부터 쭉- 군산) 마리서사는 참 다양한 활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지역 청년들의 문화 활동을 모은 동네잡지 프로젝트인 <희열군산Here, Gunsan>을 시작으로 <탁류 군산에디션 프로젝트>, <아날로그 라이프-책에 더 가까이> 등의 출판과 작가 강연은 물론이고 군산의 서점들이 뭉쳐 진행한 ‘군산초단편문학상’ 공모전까지 폭넓게 걸쳐 있습니다. ‘군산초단편문학상’의 경우 응모작 500편 정도를 목표로 했지만 전국 각지에서 2,000편이 넘게 접수되었고 (참여한 서점들이 십시일반 상금을 모았고 함께 밤을 새워가며 응모작을 정리했다고 하네요) 수상작을 모은 단행본(<군산초단편문학상 수상 작품집>)까지 출간되었습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제2회 군산초단편문학상’도 이어갈 예정이고 ‘군산 도서전’까지 진행할 예정이라고 하니, 정말 대단하다는 감탄사를 연발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리서사를 꼭 방문해 보시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군산을 가신다면, 이라는 단서 없이 마리서사에 들르기 위해 군산을 가보라고 말씀드리고 싶을 정도로 말입니다. 마리서사의 여러 활동 때문은 아닙니다. 의미 있는 지역 활동이긴 하지만 방문객 입장에서 그걸 체감하기는 쉽지 않으니까요. 멀리서나마 박수를 보낼 만한 이유일 수는 있으나 꼭 거기를 방문해야 할 이유가 될 정도는 아닐 겁니다. 마리서사 방문을 적극적으로 추천드리는 건, 책방의 공간 자체가 너무나 매력적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책방을 좋아하게 되는 첫 번째 기준은, 마치 길티 플레저인 양 말을 꺼내기가 쑥스럽지만, 공간의 인테리어(+익스테리어)입니다. 동네책방에서 제일 중요한 게 큐레이션이란 걸 물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머리가 아는 것과 별개로 인테리어가 혹은 건물이 멋진 책방을 만나면 저도 모르게 마음을 홀딱 빼앗겨버립니다. 아직 책장을 둘러보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그런 책방들이 큐레이션과 독자 커뮤니케이션도 다 좋긴 하더라고요 :)

 

 

마리서사 대표님이 아무 연고도 없는 군산에서 서점을 열겠다고 결심한 것도 책방이 자리한 건물 때문입니다. “군산에서 이 집을 발견했는데, 이곳에서라면 제가 원하는 서점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여기서 서점을 한다면 ‘마리서사’라고 이름을 지어야겠다는 영감도 떠올랐고요.”***** 길게 설명할 필요 없이 책방 앞에 딱 서는 순간 대표님 마음을 곧바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간혹 형식이 내용을 압도하는 경우가 있는데 마리서사가 딱 그렇습니다. 저기가 세탁소나 방앗간이라고 해도 무작정 문을 열고 들어가고 싶을 만큼 멋진 풍경을 보여줍니다. 내부 공간의 멋스러움은 더 말할 것도 없고요. “지어진 지 100년이 넘은 적산가옥이에요. (…) 100년이 지났지만 서점 안쪽은 거의 다 처음 지어진 그대로 남아 있어요. (…) 적산가옥은 군산에서는 굉장히 흔하지만 처음 오시는 분들은 굉장히 낯설어하세요. 특히 적산가옥을 매장으로 바꿀 경우 내부도 일본 분위기로 꾸미곤 하는데, 저는 그러지 않았어요. 1920~30년대 지식인의 서재 같은 분위기로 책장을 짜고 가구를 선택했어요.”*****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책장에서 기백이 느껴질 정도로 기품 있는 공간이었습니다. 아, 공간을 가득 채운 책들의 면면도 당연히 훌륭하고요.

 

이쯤 되면 엄청 궁금하실 텐데요. 그러니까 꼭 가보셔야 한다니까요. 위치마저 군산 구경을 할라치면 빠트릴 수 없는 동네라 그냥 지나치기엔 너무 아쉽습니다. 군산근대역사박물관과 옛군산세관 건물 등이 있는 군산근대화거리에서 영화동과 신창동을 지나 월명동까지 이어지는 시간여행마을에 자리하고 있으며, 초원사진관까지 286미터, 이성당 본점까지는 537미터 떨어져 있으니 동네를 쉬엄쉬엄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맞닥뜨리게 되실 거예요. 또한 책방에 들어가면 조금 오래 머물러 보시길 추천드려요. 정성스레 진열된 책들을 구경하는 재미에 더해 책방의 가구는 물론 건물의 기둥과 벽과 바닥을 찬찬히 음미하다 보면 왠지 시간을 건너뛴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하거든요. 해방 직후에서 21세기로, 종로3가에서 월명동으로, ‘몽마르트 같은 분위기’와 ‘인간성을 중심으로 결합될 수 있는 여유 있는 시절’에서 군산 마리서사의 시간으로.

아슬아슬하게 봄의 끄트머리가 남았습니다. 햇빛을 피해 숨지 않아도 되는 계절이 끝나버리기 전에 군산을 걸어보세요. 그리고 사람이 오가는 곳, 사람을 이어주는 곳,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는 곳, 책방 마리서사에서 만나요.

 

*본래 사진 촬영은 불가하지만, 레터 소개를 위해 허락을 구하고 손님이 없는 시간에 담았습니다.

 

마리서사

 

 

*<김수영 전집 2 산문> p.109
**https://daesan.or.kr/webzine_read.html?uid=2942&ho=67 
***http://www.cultura.co.kr/news/articleView.html?idxno=1539 
****https://www.donga.com/news/Culture/article/all/20130107/52094933/1 
*****https://bricksmagazine.co.kr/interview/?idx=16990456&bmode=vie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