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치코

 

“모두 우산을 쓰고 횡단보도를 지나는 사람들 / 탑골공원 담장 기와도 흠씬 젖고 / 고가 차도에 매달린 신호등 위에 비둘기 한 마리 / 건너 빌딩의 웬디스 햄버거 간판을 읽고 있지 / 비는 내리고 … 흐르는 것이 어디 사람뿐이냐 / 우리들의 한 시대도 거기 묻혀 흘러간다 …”

 

이 노래 가사를 기억하시는 분이 계실까요? 정태춘, 박은옥 두 선생님이 만들고 부른 <92년 장마, 종로에서>라는 곡이에요. 노래가 담긴, 노래와 똑같은 이름의 앨범은 1992년이 아니라 1993년에 출시가 되었어요. 92년이라니 참 까마득하네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그해 봄에 서태지와 아이들이 데뷔를 했어요. 여름엔 저 멀리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서 올림픽이 열렸고 폐막을 앞둔 마지막 날에 황영조 선수가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땄어요. 그리고 겨울이 시작될 때쯤 무려 수십 년만에 군인이 아닌 자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어요. 그 정도가 다예요. 소련이 망한 건 이미 한 해 전이었고 한강 다리나 백화점이 무너지지도 않았어요. 격동의 시기였던 80년대를 뒤로 하고 90년대의 새로운 사회/문화적 환경으로 넘어가는 초입의 그저 조용한 일 년이었어요. 그런데 두 분은 그 고요함에 관해 아마 할 말이 있으셨던 것 같아요. 나라를 뒤흔들 만한 큰 사건은 없었지만 한 사회에 되돌릴 수 없는 어떤 변화가 발생했음을 직감하셨던 것 같아요. 1992년은 대체 어떤 해였을까요? 각자의 기억에 따라 여러 가지로 정의할 수 있겠죠. 참, 누군가는 그해에 태어나기도 했을 테고요 :)

 

(한국이란 공간에서 글과 말을 업으로 삼아 살아가는 이들이 많이 저지르는 실수 중 하나는 서울중심주의예요. 서울을 특정 지역이 아니라 한국인 누구나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할 보편적 공간으로 설정해버리는 것이에요. 각종 미디어가 서울에서 일어나는 일을 기본값으로 놓고 또 서울에서 벌어지는 사건 중심으로 보도를 하기 때문에, 다른 지역에 사는 사람들도 서울에 관해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상황이긴 해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서울이 한국이란 나라의 한 지역에 불과하다는 걸 간과해선 안 된다고 생각해요. 국가의 수도이며 교육, 문화, 정치, 경제의 중심지이고 전체 인구의 20%가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에요. 그런데 오늘은 어쩔 수 없이 서울 얘기를, 주변 설명이나 맥락을 생략한 채 하게 될지도 모르겠어요. 지면의 한계 때문이니 양해 부탁드릴게요.)

 

‘소소한 산-책’을 다니는 입장에서 말씀드리자면, 1992년은 종로에 영풍문고가 문을 연 해였어요. 역사를 기록할 때 1992년이란 항목에 차마 한 줄로라도 들어가지 못할 사건이지만 서점에 관해 얘기할 땐 중요한 일이라고 할 수 있어요. 종로엔 대형서점이 3개, 라는 일종의 법칙(?)이 생긴 해이기 때문이에요(그전에 종로서적, 동화서적, 교보문고 이렇게 3개의 서점이 경쟁하던 시기도 있었다고 하는데 그건 무려 5공화국 시절 얘기라…). 그때부터 지금까지 30년 동안 종로서적, 교보문고, 영풍문고, 반디앤루니스, 그리고 다시 (이름만 같고 운영의 주체는 다른) 종로서적이 잠깐의 공백기를 제외하곤 늘 세 곳은 존재하고 있었어요. 세종로사거리에서 탑골공원에 이르는, 채 1km가 안 되는 거리 안에 말이에요.

 

신촌의 맥도날드, 대학로의 KFC, 강남의 뉴욕제과처럼 종로서적이 약속 장소의 대명사였던 시절이 있었어요(종각이나 금강제화 앞을 더 선호했던 사람들도 있긴 했지만 그건 취향의 차이니까요). 그때만 해도 서점 구경을 위해(책 구경이기도 하고요) 종로에 나가는 일이 많았어요. 약속이 있어 나가는 길이라면 일부러 한두 시간 일찍 도착해서 서점을 돌아보며 시간을 보내는 경우도 많았어요.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무척이나 즐거운 일이었죠. 실제로 더 자주 방문하고 책을 더 많이 사는 공간은 자신의 거주지(혹은 학교나 직장)와 가까운 곳에 있는 서점이었을 거예요. 하지만 종로에 나가면 그렇게 큰 서점이 옹기종기 세 개나 모여 있으니 서점 구경을 얼마나 원 없이 할 수 있었겠어요. 종로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즐거움이 존재하던 시절이었어요. 까마득한 옛날얘기인 것 같지만(옛날얘기가 맞지만!) 비교적 최근까지도 그랬어요. 온라인서점의 시장점유율이 높아지면서 우리의 생활 반경 내에서 서점을 찾는 일이 어려워졌기 때문이에요. 동네마다 유동인구가 많거나 학교 근처에 상징물처럼 있었던 중소형서점 대부분이, 교과서/참고서를 판매하는 곳을 제외하곤 거의 사라지고 말았어요. (종로로 상징되었던) 대형 프렌차이즈 매장이 아니면 책을 직접 볼 수 있는 공간이 없어졌으니 결국 종로에 가야 서점 구경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던 거죠.

 

그런데 어느 순간부턴가 종로에 나가 서점 구경을 하는 일이 더 이상 즐겁지 않게 되었어요. 두 가지 이유였어요. 첫 번째는 서점 구경과 책 구경이 다른 말이 되어버렸기 때문이에요. 일본 유명 서점의 콘셉트가 한국에서 유행하면서 책이 있던 자리가 각종 휴게/문화시설로 바뀌기 시작했어요. 종종 교보‘문구’라는 말로 놀려 왔듯이, 서점이 문구와 소품 등으로 매출을 올리는 전략을 채택한 건 그보다 훨씬 오래되었고요. 물론 이러한 변화로 인해 예전보다 훨씬 풍성하고 다채로운 경험을 하게 된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제가 옛날 사람이라 그런지, 아니면 옛날 사람인 데다 고리타분하기까지 해서 그런지 몰라도 서점에 가서 ‘라이프스타일을 제안’받는 것보단 그냥 책 구경하는 게 더 좋더라고요. 두 번째 이유는 앞선 이유에서 그대로 이어지는데요, 짧게는 지난 4~5년, 길게는 10여년 사이 동네 곳곳에 작은 서점이 많이 생겼기 때문이에요. 수십만 권의 장서를 보유하고 있다는 대형서점보다 불과 몇 백 종의 책을 갖췄을 뿐인 독립서점/동네책방에서 서점을 구경하고 책을 구경하는 즐거움이 더 크다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요. 세련되게 큐레이션이란 이름으로 불러도 좋고 소박하게 취향을 나눈다는 말로 소개해도 무방할, 자신의 색깔을 가진 작은 서점들 덕분에 굳이 종로에 나가지 않더라도 충분히 즐거운 경험을 할 수 있게 되었어요. 아마 많은 분들이 그렇게 느끼실 거예요.

 

 

서점 구경을 하러 종로에 나갈 일이 없어졌다고 해도, 바로 옆 동네인 을지로에는 한 번쯤 나가보시라고 권하고 싶어요. 종로에서 남쪽으로 청계천과 을지로를 지나 백병원에 이르면 그 맞은편에 바로 ‘노말에이’가 자리하고 있어요. 노말에이는 디자인스튜디오 131WATT가 운영하는 책방이고 2015년부터 을지로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어요. 원래는 을지로 큰길가에 있었는데 건물의 재건축으로 인해 지금 자리로 이전했다고 해요. 노말에이는 공간의 크기에 비해 비치된 책의 종수나 권수가 많은 편은 아니에요. 오히려 책의 진열을 절제했다는 느낌이 살짝 들기도 할 만큼요. 하지만 결고 허술하게 구성되어 있지는 않아요. 책방을 찬찬히 돌아보다 보면 아주 단단하게 짜여 있다는 걸 알 수 있어요. 그러면서 계속 ‘이곳은 뭔가 느낌이 다른데?’라는 생각이 머리를 계속 맴돌게 돼요.

 

독립서점/동네책방에 갔을 때 책이 말을 걸어오는 걸 느껴본 적 없으신가요? 서점의 주인장이 정성스럽게 골라 진열해놓은 평대와 책장를 찬찬히 둘러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책과 대화를 해본 적 있지 않으세요? 어머, 어떻게 여기에 있니? 얘랑 같이 있으니까 달라 보인다! 넌 처음 보는데 누구니? 등등 말이에요. 어떤 책들이 함께 놓여 있느냐에 따라 한 권의 책으로는 드러나기 힘든 맥락이 만들어지기도 하는 것 같아요. 그걸 큐레이션이라고 부를 수 있을 거예요. 그런가 하면 모여 있는 책들이 마치 한 권의 책이 확장된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어요. 그건, 일종의 큐레이션이긴 하지만 취향이라는 말로 따로 불러도 좋을 것 같아요. 어쨌든 이렇게 책의 무리는, 그리고 무리와 무리를 구별 짓는 차이는, 책을 다시 보게 만들고 책에 대해 더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그저 진열된 상품이 아니라 대화할 수 있는 존재가 틀림없다고 생각해요.

 

노말에이의 책들은 취향을 분명히 드러내며 말을 걸어왔어요. 우선 책의 분류를 나타내는 이름표들이 두드러져 보였어요. 서점에 가면 카테고리를 표시하는 이름표가 있잖아요. “소설”, “인문”, “자기계발” 같이 전통적이고 건조한 것일 수도 있고 “페미니즘”, “글쓰기를 위한 책”, “지구의 미래를 위해”처럼 좀 더 의미를 드러낸 것일 수도 있죠. 큐레이션에 중점을 둔 곳일수록 이러한 이름표들이 세밀하고 촘촘하게 나뉘어져 있을 거예요. 그런데 노말에이는 딱 여섯 개의 이름표만 있어요. 매장에 들어섰을 때 맨 처음 보이는 평대에 “이달의 추천도서(7월은 ‘글이 없는 책’)”, 그 다음 평대에 “새로나온 책” 그리고 안쪽과 우측 벽의 책장에 “매거진”, “에세이”, “그래픽노블/만화”, “그림책/일러스트” 이렇게 여섯 개의 이름표가 단촐하게 있을 뿐이에요. 창가쪽 책장 선반에는 따로 이름표는 없지만 정성스럽게 고른 200여 종의 문구류가 알차게 진열되어 있고요. 아마 지금까지 다녀본 서점 중에 카테고리가 가장 적으면서 독창적으로 분류되어 있는 곳이지 않을까 싶어요. 그 이름표들이 츠타야서점과는 다른 방식으로 라이프스타일을 제안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요리책 옆에 꼭 에어프라이어를 함께 팔아야지만 라이프스타일을 제안하는 건 아니잖아요. 노말에이처럼 취향을 분명히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능해보였어요.

 

디자인스튜디오와 서점이 함께 운영되는 공간이라서 그런 것 같았어요. 브랜딩을 중요하게 여긴다고 해야 할까요. 홈페이지를 보고 그런 생각이 더 강해졌어요.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슬라이더로 크게 들어간 ‘MONTHLY PICK’ 영역 바로 아래에, 서점 공간에서는 드러나지 않았던, 출판사나 굿즈 제작사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어요. 워크룸 프레스, the object, 오이웍스, 소소문구, LOG press 등등(여기에 오후의 소묘가 있어서 얼마나 반갑고 또 쑥쓰러웠는지 모르겠네요). 고유한 색깔을 유지하며 책과 작품을 만드는 창작자의 이름을 나열하는 것으로 자신을 소개하는 공간이라면 브랜딩을 중요하게 여길 것이란 일종의 확신이 들었어요. 취향이 명확한 곳이라는 건 말할 것도 없고요. 노말에이를 방문하시면 책을 둘러보고 고르는 즐거움과 더불어 견고하게 구축된 하나의 세계를 여행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거예요. 작지만 풍성하고, 다채롭지만 균형 잡힌, 책으로 쌓아올린 노말에이의 세계를요.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말할 것도 없고 어쩌면 책에 관심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말이에요.

 

참, 서점 방문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휴대폰으로 저녁 먹을 곳을 검색하다가 ‘힙지로’라는 말을 알게 되었어요. 지도 상의 위치로 따지면 노말에이가 있는 곳이 힙지로의 중심부쯤 되더라고요. 책방 구경도 하고 힙지로의 힙함에 빠져보기도 하고, 을지로가 확실히 종로보다 낫네요.(젠트리피케이션이 여전히 진행 중인 곳이라 마음이 마냥 힙하지는 않을 수도 있지만요…)

 

﹅ 노말에이 홈페이지 |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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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묘의 산-책

이치코 실장은 ‘코스묘스’ 필자답게 아파트 재건축으로 살던 곳을 떠나야만 했던 고양이들을 그림으로 담은 <이사가는 둔촌 고양이>와 제로퍼제로에서 제작한 <City Map: Tokyo>를 골랐습니다.

저는 ‘이달의 추천도서: 7월 글이 없는 책’ 중에서 안혜영 작가의 <Fragments of Summer (여름의 조각들)>와 이소현 작가의 <자음과 모음이 밀려오다>를, 독서 문화 프로젝트인 ‘월간 세가방(세상에서 가장 큰 책방)’ 추천도서로 노말에이에서 소개한 배현정 작가의 <걸어서 만든 그림>을 샀습니다. 노말에이의 추천글을 옮깁니다.

차분한 여름 저녁, 같이 산책해요. 생각이 많을 땐 걷습니다. 걷는 것만으로도 많은 위로를 받습니다. <걸어서 만든 그림>은 도심 속 산책로인 동작충효길을 지역주민이자 지역예술가의 시선으로 보고 느낀 것들을 기록한 그림에세이입니다. 별책부록인 산책노트를 써보며 산책과 기록의 기쁨을 함께 느껴요.

 

 

 

 

* ‘소소한 산-책’ 코너에서 독자 투고를 받습니다. 제 걸음이 미처 닿지 못한 곳들의 이야기도 전하고 싶어요. 분량 제한은 없습니다. 짧아도 좋고요. 자유롭게 여러분의 산-책 이야기 들려주세요. 해당 메일(letter@sewmew.co.kr)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선정된 분께는 오후의 소묘에서 준비한 굿즈와 신간을 보내드립니다. 소중한 원고 기다리고 있을게요.

 

‘소소한 산-책’은 [월간소묘 : 레터]에 연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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