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치코

 

이번 달 소소한 산-책은 서울시 중구 필동에 있는 스페인책방입니다. 지하철 3호선과 4호선이 교차하는 충무로역에 가까이, 출구에서 불과 1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있어서 찾아가기 좋은 책방이었어요. 다만, 책방 소개에 적혀 있듯이 엘리베이터 없는 오래된 건물의 5층에 자리한 터라 계단을 조금 오르셔야 합니다. 계단을 오르며 본 안내판에는 4층이 생략되지 않고 순서대로 1층부터 5층까지 표시가 되어 있었는데 왜 5층의 호수가 603호인지는 미처 여쭤보지 못했네요. 그건 아마 건물을 지은 당사자가 아니면 알기 어려울 겁니다. 제가 사는 빌라가 계단 양쪽으로 두 집이 있는데요. 건물을 정면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이 B01호-101호, 오른쪽이 B02호-102호였다가 2층부터는 갑자기 왼쪽이 202호-302호, 오른쪽이 201호-301호가 되어버립니다. 동네를 새로 배정받은 택배기사님들은 마치 통과의례처럼 1호와 2호의 택배를 엇갈려 배송하는 일을 겪으시곤 하죠. 하지만 그 빌라에 사는 당사자인 저도 당최 이유를 알 수가 없습니다. 제가 지은 건물이 아니니까요.

 

스페인이라고 하면 무엇이 가장 먼저 떠오르시나요? 플라멩코, 순례길, 대항해시대, 독감, 피카소, 가우디, 벨라스케스, 돈키호테, 축구, 하몽 등등. 워낙 많아 일일이 나열하기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 자신의 관심사나 취향에 따라 어떤 게 먼저일지는 조금씩 다를 테지만 최근엔 아마도 많은 분이 <종이의 집>을 제일 처음 떠올리셨을 거예요. 워낙 화제가 되었던 드라마니까요. 저도 물론 다 보았습니다. 파트 5의 첫 5회가 공개될 때쯤 드라마를 정주행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현기증 나게 새 시즌을 기다릴 필요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편안하게 즐길 수 있었어요. 심지어 파트 5의 5화가 그렇게(?) 끝나버리는 바람에 3개월 뒤에 공개된 6~10화는 별로 애타게 기다리지도 않았어요. 드라마를 그렇게(?) 만들면 안 되지, 이 사람들아. 아, 도쿄…

 

어쨌거나 저 역시 당분간은 ‘스페인’ 하면 <종이의 집>이 가장 먼저 떠오를 것 같아요. 그런데 제 기억에 깊이 각인된 건 드라마 자체보다는 ‘(연애로서의)사랑’이라는 단어였습니다. 사랑을 다루는 방식이 다른 영화나 드라마와 너무 달랐기 때문이에요. 연애와 사랑 자체가 중심이 되는 로맨스물이 아닌 이상 보통은 극 중에 나오는 사랑 이야기는 메인 스토리를 전개하기 위한 장치로 활용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싸움박질이 메인 스토리인 영화에서 사랑을 잃고 복수한다거나, 고난과 성장을 말하는 드라마에서 떠나간 사랑이 계기가 되어 주인공이 변하게 된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에요.

 

하지만 <종이의 집>에 등장하는 연애와 사랑은 아무런 맥락이 없어 보였습니다. 마치 인도 볼리우드(힌디어: बॉलीवुड, 우르두어: بالیوڈ) 영화에 무조건 노래와 춤 장면이 들어가야 하고 한국 아침드라마에는 곧 죽어도 불륜과 출생의 비밀이 얽혀 있어야 하듯이 스페인 사람들에게는 드라마 속에 연애와 사랑 이야기가 꼭 있어야 하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메인 스토리야 어떻게 진행되고 있든지 간에) 이때쯤 되면 연애 한번 해야지, 라고 누군가 지적이라고 한 것처럼 갑자기 묘한 분위기가 조성되고, 뜨겁게 눈빛을 교환하고, 마음을 고백하고, 키스를 하고, 섹스를 하고, 오해를 하고, 배신감을 느끼고.. 거기다가 이미 형성된 사랑의 Yujibosu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어 보였습니다. 성냥에 불이 붙는 순간처럼 폭발하듯 불타오르는, 사랑이 시작하는 그 짜릿한 순간을 탐미하고 파고드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관계로 묘사된 이들은 드라마가 진행되는 동안 몇 번이나 다시, 새로운 사랑을 만들어내는 것 같았습니다. 정말로 사랑에 빠지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래서 스페인이 정열의 나라인가 싶기도 했고요.

 

그렇다고 스페인책방에 사랑과 정열이 가득할 것이란 기대를 하고 방문한 것은 아닙니다. 여기는 한국이고 스페인책방은 정열이라는 단어와 가장 거리가 먼 공간 중 하나인 서점이니까요. 그런데 예상외로 정열이 넘치는 공간이었습니다(잘 모르겠지만, 아마 사랑도 넘쳤을 것 같긴 해요). 책방 주인장이 스페인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어요. 역시나 책방 소개에도 나오듯이 스페인이나 중남미에 관한 책, 세심하게 고른 듯한 스페인 원서와 소품 들뿐만 아니라 직접 제작한 스페인 관련 출판물까지 다양하게 갖춰져 있었습니다. 구석구석 한참을 둘러보며 구경했어요. 한국에서 스페인이라는 키워드로 이렇게까지 공간을 채울 수 있구나 싶어 신기했습니다. 물론 책방지기님의 어느 인터뷰에 나오는 얘기처럼 책방 하나를 스페인과 연관된 것으로 채울 만큼 책이 많이 나오지는 않아서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책을 따로 넣고 있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도 스페인 분위기를 만끽하기에는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스페인책방은 (책방지기님의 정열 때문인지!) 다양한 활동이 함께하는 공간입니다. 독서모임, 북토크 등의 책방 활동뿐만 아니라 외부에서 열리는 각종 북페어에도 활발하게 참여하고 있으며 팟캐스트도 제작하고 계시더라고요(누적 에피소드가 무려 92편!). 저는 일주일에 한 편씩 올라오는 팟캐스트를 보고 약간의 충격과 감동을 받았습니다. 매주 1시간가량의 분량으로 팟캐스트를 녹음하고 편집해서 올린다는 게 보통 일이 아니니까요. 그건 무언가를 진정으로 좋아하지 않으면, 사랑과 정열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정열이라고 하면 잠깐 타올랐다가 금세 사그라드는 불꽃을 생각하실 테지만, 진짜 뜨거운 불은 오래도록 꺼지지 않는 법이에요. 숨 죽은 모닥불처럼 온기만 남아 연명하는 게 아니라 세상을 삼킬 듯한 불꽃으로 영원히 타오를 수 있어야만 비로소 정열이 되는 것이죠. 매번 지치지도 않고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는 <종이의 집> 속 연인들처럼 말입니다.

 

“독립출판을 하면서 책을 입고하러 다른 책방을 많이 다니면서 책방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요. 좀 더 재밌는 일을 좋은 사람들이랑 많이 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책방을 열었습니다.”

앞서 언급한 인터뷰에 나오는 책방지기님의 말이에요. 책방을 시작하기 전부터 콘텐츠를 만들고 사람들과 함께하며 나누는 일을 좋아하며 꾸준히 해왔기 때문에 스페인책방의 정열적인 활동이 가능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콘텐츠 창작자로서의 일은 ‘살리다’라는 이름의 출판 브랜드 계정을 통해 알 수 있는데요. 스페인책방과 살리다, 두 이름의 활동을 함께 보아야 스페인책방의 모습이 제대로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어쨌거나 앞으로도 지치지 않고 오래도록 다양한 모습 보여주셨으면 좋겠네요 :)

 

참, 5층을 올라 스페인책방에 들어서면 책도 아니고 스페인도 아닌 무언가로 인해 깜짝 놀라실 거예요. 무릎이 시린 걸 참아가며 그 많은 계단을 고통스럽게 디뎠던 노고가 한순간에 잊힐 만큼요. 저는 남산 뷰가 그렇게 시원하고 말끔하게 보이는 창을 처음 본 것 같습니다. 창문으로 남산타워(는 옛 이름이고 뭔가 현대적이고 공무원스러운 새 이름이 있는 것도 같지만)가 시원하게 뻗은 모습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그것만으로도 책방을 방문한 본전(?)은 충분히 뽑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위치도 서울 한복판이고 하니 근처를 지나실 일이 있다면 꼭 한번 방문해보세요. 주소는 다음과 같습니다. 서울시 중구 퇴계로36길 29 기남빌딩 5층인데 603호, 스페인책방.

 

 

 

스페인책방

살리다

스페인책방 라디오 <5층인데 603호>

 

*책방지기님이 책값을 계산한 다음에 스페인책방 여권이라는 이름의 회원증(?)을 만드실 거냐고 여쭤봤을 때 머뭇거리다가 네, 라고 대답하고 말았습니다. 동네가 달라 언제 다시 방문할지 모르니까 보통은 아니오, 라고 하는데 말이에요. 여권 모양의 수첩이 너무 예쁘더라고요.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토요일 오후라 그런지 책방에 손님이 무척 많았습니다. 두세 명 짝을 이뤄 온 분들도 있었고 대여섯 명이 함께 온 분들도 있었습니다. 계산을 마치고 책방지기님께 오후의 소묘에서 왔다고 인사를 드리려고 했는데 제 뒤로 세 팀이나 계산을 기다리며 줄을 서 있어서 그냥 책방을 나오고 말았네요.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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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묘의 산-책

이실장은 스페인과 중남미 역사와 인문 기행(?)이랄지 문학 책들이 모여 있는 서가 앞에 오래 서 있었고요. 저는 키 큰 전면 책장에 놓인 그림책들과 낮은 책장의 원서 코너에서 몸을 쪼그렸다 한껏 펼치기를 반복했습니다.

그렇게 고른 책은, 제 손이 닿을락 말락 하는 맨 위칸에 있던 <Inventario ilustrado de los árboles>(나무 도감)과 맨 아래칸의 <El arquitecto y el árbol>(건축가와 나무)예요. 정원 그림책의 여파가 이렇게 큽니다, 여러분. <나무 도감>은 도감 시리즈의 한 권으로 판형이 크고, 다른 도감과 다르게 나무만이 아니라 나무를 둘러싼 존재들을 함께 묘사한 점이 인상적이었어요. 코알라, 사람, 사슴, 새, 오리, 닭, 원숭이, 소, 토끼, 들판, 호수…

Thibaut Rassat의 그림책 <건축가와 나무>는 쓰러질 듯 기운 큰 나무를 베지 않고 그 나무를 살려 설계하려는 까칠한(?) 건축가의 고심과 그 결과물이 놀랍습니다. 어딘가에서 꼭 내주시면 좋겠네요… 보고 계신가요, 편집자 선생님들…

(두 책 모두 공교롭게도 프랑스어 판본의 스페인어 번역본입니다. 원제는 각각 Inventaire illustré des arbres, Mauvaise herbe.)

이실장은 <세계사를 품은 스페인 요리의 역사>와 <피와 불 속에서 피어난 라틴 아메리카>를 샀습니다. 이하 생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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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책방>

  스페인, 중남미 관련 책 / 스페인어 원서 / 독립출판물

  스페인 덕질 / 다양한 모임과 워크숍 / 스페인책방 라디오 기획, 진행

  서울시 중구 퇴계로 36번길 29 기남빌딩 5층인데 603호

  *스페인책방 라디오 <5층인데 603호>는 팟캐스트, 팟빵, 오디오클립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본문으로]

 

 

 

* ‘소소한 산-책’ 코너에서 독자 투고를 받습니다. 제 걸음이 미처 닿지 못한 곳들의 이야기도 전하고 싶어요. 분량 제한은 없습니다. 짧아도 좋고요. 자유롭게 여러분의 산-책 이야기 들려주세요. 해당 메일(letter@sewmew.co.kr)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선정된 분께는 오후의 소묘에서 준비한 굿즈와 신간을 보내드립니다. 소중한 원고 기다리고 있을게요.

 

‘소소한 산-책’은 [월간소묘 : 레터]에 연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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