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혜영님 SNS 이름이 혜만사예요. 혜영이가 만난 사람들. 그걸 보고 저랑 비슷한 분일 거 같다고 생각했어요.
혜영¯ 예전부터 SNS에 특별하거나 잘난 모습을 전시하지 말아야지 생각했어요. 서로에 대한 박탈감을 느끼거나 심란한 마음이 생길 수 있잖아요. 그래서 그냥 오늘은 지하철을 탔다. 무엇을 먹었다 같은 소소한 내용을 보정 없이 올려보자 했어요. 단순히 사진 일기로써 어떤 내용을 기록할까 하다가 제게 중요하다고 생각한 게 사람이었죠. 그래서 혜영이가 만난 사람들을 올려요. 오늘 우리도 같이 사진 찍어요.
김¯ 오늘의 혜만사는 저네요. 좋아요. 손목에 타투는 무슨 뜻이에요?
김¯ 어떤 일을 하시는지 궁금해지네요. 일부러 미리 안 여쭤봤거든요.
혜영¯ 문화예술기획을 하고 있어요. 그중에서도 행사와 공연이요. 사람들이랑 모여서 노는 걸 좋아해요. 가장 바라는 건 다른 곳에서는 하지 않았던 걸 창작하는 거예요. 사람들이 꼭 한 번씩 나의 존재 이유를 찾게 되는 주기가 있잖아요. 저는 2019년이었는데 남들은 하지 못하고 또 안 하는,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 분명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기획자로서 인정받고 싶은 욕구도 생겼고요. 올해는 하고 싶은 일보다 해야 하는 일에 치여 지내서 월간 김혜영 프로젝트도 시작은 했는데 끝맺음을 못 했거든요.
김¯ 월간 김혜영이요? 어떤 기획인지 듣고 싶어요.
혜영¯ 정말 작고 소소한 프로젝트들이에요. 의정부에 꽃 지도를 만들어보자라던가, 다 같이 차를 타고 책을 읽으러 떠나는 거예요. 바닷가에 해먹도 설치하고요. 요새 생각이 많이 굳었어요. 사유할 시간이 없어요.
김¯ 현생 때문에요?
혜영¯ 네. 협동조합을 운영하고 있어서 딸린 식구들이 있거든요. 임기가 2년 정도 남았어요. 조합원들도 다 프리랜서고 20대 초중반인데 이 친구들을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을 항상 해요.
김¯ 프리랜서의 어려움이 많죠. 가장은 특히 무겁네요. 보내 드린 질문지 중에 나를 이루고 있는 것에 관한 물음이 있었잖아요. 아까 말씀해주신 현재, 즐거움, 사람 이 세 가지 일까요?
혜영¯ 그건 아닌 것 같아요. 너무 어려운 질문이다. 혹시 제가 이루고 싶은 것들일까요?
김¯ 아니요. 나를 이루고 있는 거, 생각들?
혜영¯ 그렇다면 쉼? 2015년에 기획을 시작했을 때도 주제가 여유였는데 요즘의 최대 관심사기도 해요.
김¯ 여유와 쉼이요.
혜영¯ 네. 이 질문에 답을 하기 어렵다는 게 제 스스로 생각할 만한 지점인 것 같아요. 얼마 전에 신점을 봤는데 제가 단명을 할지 물어봤거든요. 근데 오래 산다는 거예요. 그래서 혹시 노후를 준비해야할지 물었더니 그렇대요. 심란해요.
김¯ 아..! 보통 건강이나 직업운 같은 걸 물어보지 않아요? 단명은 왜요?
혜영¯ 죽음의 시기를 알고 싶어서요.
김¯ 영화 <인타임>처럼요?
혜영¯ 네. 우선순위를 매겨서 살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제가 되게 계획이 없는 타입이에요. 모순적이기는 한데 단순히 미래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한 질문이기도 했어요. 이제는 계획 세우는 걸 포기했어요. 그냥 흘러가는 대로 살자. 그렇게 도착한 곳이 내 목적지가 아닌가 싶어요.
김¯ 흘러가는 대로. 그럼 내일 정도의 계획은 있나요?
혜영¯ 계획은 아예 없고요. 대신에 남은 기간 동안 꼭 하고 싶은 건 있어요. 20대의 끝자락을 맞이하면서 어떻게 잘 마무리할 수 있을까 고민을 많이 했어요. 스스로 수요 안식일도 가져보고 일 외의 시간을 하루라도 만들려고 해요. 이런 것들도 계획이겠지만 그냥 단순한 목표로 봐요. 어떤 프로젝트를 하든 일단 나에게 필요한 걸 찾곤 해요. 제게 필요한 게 세상에 다 있는 건 아니니까요. 그리고 나와 같은 필요를 느끼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이런 프로젝트를 나누려고 하는 거죠. 이번에 8주짜리 워크숍을 진행하게 되었는데 ‘우리는 왜 방황하는가’가 주제예요.
김¯ 우리는 왜 방황할까요?
혜영¯ 글쎄요. 제가 올해 처음으로 심리 상담을 받기 시작했어요. 어느 순간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시선이 필요하다고 느껴져서요. 그 후로는 주변 사람들에게 적어도 1년에 한 번은 받아야 한다고 권장도 많이 해요. 저희 조합원들 같은 경우는 상담 비용을 지원해줄 테니 연초에 한 명씩 다녀오자고 했어요. 내가 스스로 생각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남과 대화했을 때 알게 되는 나도 있고, 그게 중요하단 생각이 들어서요.
김¯ 맞아요. 말하면서 알게 되는 나도 정말 중요하죠. 우리는 계속해서 남들과 연결될 수밖에 없는가 봐요. 상담을 하게 되면 첫 질문이 뭐예요?
혜영¯ 이 상담에서 어떤 걸 원하는지 여쭤보세요. 어떤 이유로 찾아왔는지. 그때부터 이제 1시간 동안 울기 시작하는 거예요. 사실 심리적으로 무너졌을 때는 조금만 건드려도 눈물이 금방 나잖아요. 어느 정도 마음이 추슬러졌을 때 간 거라 괜찮을 줄 알았는데 상담소는 그 특유의 분위기가 있어요. 은은한 조명에 따듯하고 의자도 편안하고.
김¯ 어디 한번 맘 편하게 울어봐라! 하는 분위기네요. 저는 스스로 지쳤다는 생각이 문득 들 때 울어요. 그런 분위기를 혼자 만들기도 하고요.
혜영¯ 감정에 솔직한 거 좋잖아요. 저는 반주를 한다든지 해서 해소를 하는데 (웃음) 마음 상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요새의 내 마음이 어떤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상대도 그렇게 해주기를 바라고요. 동생들하고 일을 하다 보니까 그런 대화를 아직 어려워하는 친구들이 많아요. 나를 드러내는 것에 대해서 타인의 반응에 대해 걱정을 하기도 하고요. 그래서 제가 약간 주입식으로 계속 물어봐요.
김¯ 너무 좋은 리더인데요? 사람들은 주로 남이 보는 나를 엄청 신경 쓰잖아요. 저도 그럴 때가 많고요. 날이 갈수록 자아가 늘어나요.
혜영¯ 나이가 들수록 성격이 확실히 변하는 거 같아요. 저는 청소년 때 부끄러움이 많았거든요. 남 눈치도 많이 보고요. 첫 알바를 시작하고 나서야 조금 단호하게 화도 내보고 뻔뻔한 면도 생겼어요. 아, 저도 궁금한 게 있는데 작가님은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가실 거예요?
김¯ 어느 과거요?
혜영¯ 학창시절이요.
김¯ 조건이 있어요. 제가 지금의 기억을 가지고 가나요?
혜영¯ 네. 가지고 가요.
김¯ 그럼 가보고 싶어요. 어떠세요?
혜영¯ 저는 안 가고 싶어요.
김¯ 왜요? 부끄럼 많던 시절이 싫어요?
혜영¯ 지금 가진 것들을 만드는 과정을 다시 반복할 자신이 없어요. 주변의 사람들도요. 어느샌가부터 감정의 폭이 큰 게 싫어요. 소모되거나 상처받은 후에 치유하는 과정이 너무 힘들잖아요. 차라리 행복이 크지 않아도 괜찮으니 잔잔하게 살고 싶은데 사춘기 때는 특히 이벤트도 많고 그만큼 상처도 많이 받잖아요. 그런 시기로 다시 가고 싶지가 않아요.
김¯ 감정의 폭이 크지 않았으면 한다는 말이 와닿아요. 그냥 담담하게 별일 없이 지내고 싶죠.
혜영¯ 지나가는 인연을 그냥 놓아주는 법을 배워가는 거 같아요. 인연이 이렇게 또 흘러가는구나. 제가 가진 어떤 면에 대해 아쉬워하는 친구들에게 처음엔 제 상황을 설명해줘요. 그런데도 상대방을 충족시켜 줄 수 없고 반복이 되면 결국 이 사람하고는 어쩔 수가 없구나 생각해요.
김¯ 연인 같네요. 맞아요. 가족들과의 관계도 그렇잖아요. 피가 섞인 사이지만 결국 타인이기도 하니까요.
혜영¯ 저는 어릴 때 언니랑도 7년 정도 절연했었어요. 그때도 감정 소모되는 게 싫어서 차라리 상처받을 바엔 없는 게 낫겠다 생각했었죠. 그래도 지금은 잘 지내고 있어요.
김¯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요. 가족이라고 다 내 맘을 알아주진 않죠. 모든 관계에는 거리감이 필요한 것 같아요. 난로나 왈츠처럼.
혜영¯ 맞아요. 적절한 밸런스가 중요하죠.
김¯ 너무 내려가지도 올라가지도 않는 지점를 찾는 거죠.
혜영¯ 사실 나에 대해 집중을 해야겠다고 생각되는 순간은 나 자체에 대한 고민이라기보다는 어떤 한 가지에 결핍이 있고 충족이 안될 때인 것 같아요. 왜 그게 안될까? 내가 나를 놓치고 있는 게 아닐까?부터 시작되고 그게 점점 커지는 거죠. 지금 내가 느끼는 결핍에만 집중을 하면 될 텐데.
김¯ 그걸 아는 것만도 대단한 건데. 저는 단순하게 나의 결핍을 해결해야지보다는 일단 잘 자고 잘 먹어요. 그럼 좀 괜찮아져요. 그런 말 있잖아요. 우울은 수용성이니 샤워를 해라. 속는 셈치고 따듯하게 샤워하고, 일찍 자고, 맛있는 밥 먹고요. 이렇게 살면 괜찮지 뭘 고민 하나 싶은데 또 다음날은 괜히 다시 심각해지고요. 그런 반복이죠.
혜영¯ 나를 위로하는 것, 기분 좋게 하는 것들을 찾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그런 부분이 일상의 중간중간에 있기만 해도 잠깐은 버틸 만해져요.
기대앉는 우리들_52x45cm(2ea)_광목에 유화,채색_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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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에는 작업실을 얻기 위해 각종 부동산 앱과 네이버 카페를 하루에도 수십 번씩 들락날락했다. 근처 재개발 지역의 새로 올린 건물들이 마음에 들어왔지만 세 달 정도 월세를 내면 주머니에 남는 게 없을 것이었다. 게다가 관리비가 10만 원이 넘었다. 그사이 엄마는 단골 피부관리숍 건물 3층의 영어학원이 공실이라는 소식을 가져왔다. 영어학원이 이래서야 아이들이 공부가 될까 싶게 화려한 벽지들이 붙어 있었다. 그제야 옆 동네 건물의 비싼 관리비가 납득이 갔다. 깨끗한 계단과 엉덩이가 시리지 않을 화장실을 얻으려면 돈을 많이 내야 하지. 며칠 후 그곳에 짐을 풀었다.
어수선한 공간이 정리되는 동안 친구들은 동네에 아지트가 생긴 기념으로, 생일자를 축하해 줄 공간으로, 내가 자주 외로움을 타기 때문에 등의 이유로 거의 매일 찾아왔다. 한바탕 손님들을 맞이하고 난 작업실에서 혼자 그림을 그리다 짧은 집중력을 견디지 못해 의자를 빙그르르 돌렸다. 또 다른 의자가 눈에 띈다. 머리 닿는 부분이 살짝 해진 투박하고 커다란 가죽 의자. 엘리베이터가 익숙해진 손님들이 오랜만에 낡은 계단을 올라온 후 차지하고 싶어 하는 그 의자는 어쩐지 상담실 의자 같다. 혼자만의 공간을 얻자마자 가장 처음 중고거래 앱을 통해 산 고가구들의 서비스쯤으로 따라온 거였다.
문래동의 한 아파트에서 사방탁자를 꺼내오는데 주인분께서 나를 불러 세웠다.
아버지한테 사드렸던 건데 낡아 보여도 좋은 거예요. 한번 앉아보고 괜찮으면 같이 가져가요.
처음 만난 사람들 앞에서 푹신한 의자에 파묻혔다. 아저씨가 의자 옆 레버를 돌리자 이번엔 눕혀졌다. 여러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낯선 천장을 바라보다가 결국 가지고 왔다.
날씨가 크게 두 번 바뀌는 동안 많은 친구들이 그 낡은 의자에 기대 슬픈 날에는 울기도 하고 지친 날엔 짧은 잠을, 또 작은 한숨 같은 말들을 뱉고 가기도 했다. 가끔은 내가 먼저 연락해 앉혀 두었다. 불을 어둡게 낮추고 낮잠 잘 때 주로 듣는 의미 모를 외국 노래도 틀어주곤 했다. 내 어깨가 무거운 날 스스로 하는 행동이었는데 과거의 내가 부끄럽거나 미래의 내가 괜히 안쓰러운 날이 그랬다. 감정의 곡선이 위아래로 마구 요동치는 날에는 꼭 가까운 사람들에게 모난 말을 쏟아내는 나쁜 버릇이 있어 혼자인 편이 나았다. 혼자서 소모하고 스스로 치유하면 될 일이라 생각했다. 다른 사람의 크고 작은 속상함, 표정과 말들을 들어줄 품을 언제나 만들어 두었지만 반대로는 늘 어려웠다. 마음이 무거우니 몸도 무거운 것 같아 길 건너 병원에 도수 치료를 받으러 갔다. 바닥에 똑바로 누우면 꼬리뼈만이 몸을 지탱하는 것처럼 통증이 느껴져 오래 치료를 받은 터라 언제 방문해도 물리치료 선생님이 눈인사를 해주시는 곳이었다.
좁은 침대에 엎드려 익숙한 손놀림의 치료를 받는다. 뻣뻣하게 굳은 어깨와 등 전체의 뻐근한 통증은 그림을 그릴 때 몸에 힘을 주는 습관 때문인 듯했다. 선생님은 핸드폰 카메라를 켜 차렷 자세를 하고 앉은 내 어깨를 촬영했다.
거울로만 봐도 알겠지만 어깨가 엄청 비뚤어 있지? 우리 또 자주 봐야겠다! 그래도 걱정 마. 다른 사람들도 조금씩은 비뚤어져 있어.
차가운 고무 흡착기들을 등에 주렁주렁 달고 엎드려 다른 사람들의 어깨를 떠올렸다. 평소에 주의 깊게 보는 부위가 아니어서 잘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는 사이 기계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오늘 치료의 끝을 알렸다. 윗옷을 챙겨 입고 엉거주춤 침대에서 내려와 다시 작업실로 돌아가는 길에 친구 브이에게 전화가 왔다. 하루 걸러 연락하는 사이인데 매번 ‘별일 없지?’라고 묻는 애였다.
별일 없지?
별일이야 매일 있지. 지금 등에 페퍼로니 한가득 만들고 작업실 가고 있어.
페퍼로니? 피자?
아니. 저주파 치료 있잖아. 부황 같은데 찌릿찌릿한 거. 그림 그릴 때 자꾸 어깨에 힘을 줘서 귀까지 닿을 지경이야.
자주 통화를 해도 대부분 나는 시시콜콜한 별일이 많았지만 내가 브이에게 되묻는 일은 없었다. 물어도 아무 말 없이 웃을 게 뻔했다. 나의 오랜 연애가 끝나던 다음 날 브이는 여러 친구들이 다 함께 작업실에 온다는 것을 알고 그다음 날로 약속을 미뤘다. 이틀 내내 고장 난 것처럼 멀쩡하던 나는 브이가 나무 의자에 앉아 나를 바라보자마자 눈물이 쏟아졌다. 그애의 다정함에 기대 눈물 콧물을 다 쏟으며 말했다. 브이는 매번 그런 식으로 들어주었다.
나와 예정에 없던 산책을 하다가 별안간 5년 전 잠시 연락이 안 되었을 때의 일을 말해주기도 했다. 그때로 돌아가 얘를 껴안아 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생각하며 앞서 걷는 브이를 본다. 나만큼이나 어깨가 비뚤어져 있다. 몸에 힘을 준 시간들이 길었다 말해주는 것 같다. 한강으로 가는 길목에 멈춰 서서 오늘 병원에서 배워 온 스트레칭을 알려주기로 한다.
이렇게 손바닥을 벽에 붙여서 몸을 지탱하고…
브이와 헤어지고 돌아와 의자에 누워 낮잠을 잔다. 아까까지는 혼자였던 것 같은데, 그래도 괜찮을 것 같았는데 여기에 기대어있다 간 사람들이 떠오른다. 꼬리뼈 혼자서 지탱하기엔 내 몸이 가진 우여곡절의 곡선이 너무 많은 듯했다.
*인터뷰이로 참여해주신 모든 혜영 님께 감사드립니다.
‘조용함을 듣는 일’은 2021년 1월부터 2022년 3월까지 [월간소묘 : 레터]에 연재되었습니다. (연재명 ‘김혜영의 혜영들’)
[조용함을 듣는 일]
물결이 내는 소리 • 홀로 피는 것은 없다 • 막, 막 • 빛추이 • 발가락 사이, 반짝임 • 마음과 몸의 모양 • 이 안에 사랑이 있구나 • 기대앉는 우리들 • 에필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