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영¯ 인터뷰 이야기를 듣고 많이 설렜어요. 딸들이 인터뷰하는 건 몇 번 봤는데 저에 대한 인터뷰는 처음이에요.

 

김¯ 50대인 혜영 님은 처음이라 저도 많이 설렜어요!

태어나신 후에 첫 번째 기억이 뭔가요? 가지신 기억 중 가장 오래된 거요.

혜영¯ 어릴 때 기억이 많지 않은데… 동생이 태어났을 때가 떠오르네요.

 

김¯ 그럼 많이 어리실 때 아니에요?

혜영¯ 동생이랑 여덟 살 차이가 나요. 그때는 집에 산파를 모시고 아이를 낳았거든요. 학교에서 돌아왔는데 할머니가 실망한 얼굴로 방에서 나오시던 게 기억나요. 동생도 딸이어서요.

 

김¯ 그렇구나. 예전 어른들은 그런 일을 서운해하셨죠.

혜영¯ 맞아요. 혜영이라는 이름도 친척 언니가 혜경이어서, 혜자 돌림으로 지어진 거예요. 그래서 별로 이름에 애정이 없었어요. 꽃부리 영 한자가 무슨 의미인지, 그냥 예쁘게만 살라는 건가 싶었죠.

 

김¯ 혜영 님의 20대는 어떠셨는지 궁금해요.

혜영¯ 20대, 30대 때에는 생각도, 하고 싶은 것도 많잖아요. 그만큼 불안감도 크고요. 불확실한 미래 때문에요. 저는 20대가 그렇게 좋지는 않았어요. 일단은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했거든요. 게다가 오공 시절이라 광주 민주화 항쟁에서 이어진 데모 운동들이 한창이었죠. 대학교 1학년 때는 휴강과 최루탄 뭐 그런 기억들뿐이에요. 맨 앞에 앞장서지는 못해도 시대에 대해 한탄하고 함께 고민하는 게 당연하던 때였어요. 3학년이 되고 나서야 열심히 취업 준비를 했죠.

 

김¯ 그럼 직장은 원하는 곳에 들어가셨나요?

혜영¯ 아니요. 사람을 많이 만나는 활동적인 일을 하고 싶었는데, 교수님 추천으로 어느 기업의 비서직으로 취직했어요. 여자여야 하고, 키가 160이 넘어야 하는 조건들이 있었거든요. 좋은 회사였지만 저와는 잘 안 맞더라고요. 아침에 일어나서 화장하고 유니폼을 입고 만원 버스에 시달리면서 출근을 했는데 막상 하는 일은 제일 처음 가자마자 회장님 커피 타드리고, 신문 챙겨드리는 거였어요. 스케줄도 정리해 드리고요. 서류 번역, 전화 받기 뭐 그런 거요. 그게 다예요.

 

김¯ 영화나 드라마에서만 보던 장면들이 그려져요. 하고 싶으셨던 일과 완전히 반대였네요.

혜영¯ 그렇죠. 내가 아닌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던 찰나에 남편을 만났어요.

 

김¯ 회사에서 만나셨나요?

혜영¯ 아니요. 대학교 선배였어요. 제가 다니던 회사가 여의도에 있었는데 남편이 여의도 증권 거리에 파견 나와서 일을 했거든요. 그래서 퇴근 후에 얼굴 보자, 밥 먹자, 저녁에 술 먹자 하다가 만난 거죠. (웃음)

 

김¯ 그러다가 결혼을 하신 거군요.

혜영¯ 그렇죠. 그때 여성들은 결혼하면 회사를 그만둬야 하는 분위기였어요. 출산하면 당연히 그만두는 거죠. 그런데 저는 그 일에 애정이 없어서 그랬는지 시원하게 사직서를 내고 나왔어요. 지금 일은 큰딸이 세 살 정도 되었을 때 시작했고요. 제가 스물네 살에 결혼을 했어요.

 

김¯ 조금 일찍 하신 거죠?

혜영¯ 네. 그렇죠. 그래서 일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었어요. 친구들은 승진도 하고 해외에 출장도 가고 하면서 자기의 삶을 살더라고요. 그런데 저는 뚜렷하게 하고 싶던 일을 해보지 못한 게 많이 아쉬웠어요. 결혼 후에 자연스레 아이가 생겼는데 육아가 너무 힘든 거예요. 도와주는 사람이 없잖아요. 육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아이와 24시간을 붙어 있으니까 감정적으로 많이 힘들었어요.

 

김¯ 혜영 님도 엄마가 처음이셨으니까요. 너무 힘드셨을 것 같아요. 엄마가 되면 자기 자신을 조금은 잊고 살 게 된다는 이야기를 들은 게 생각나요. 누구의 엄마, 아내로 불리는 일이 많다고요. 혜영 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해요.

혜영¯ 회사에서 김혜영 씨, 김혜영 대리님, 과장님 등등으로 불려서요. 남편도 저를 혜영이라고 부르고요(웃음).

 

김¯ 다른 어떤 말보다 다정하게 들리네요. 너무 좋다. 지금까지 혜영 님의 삶을 아주 짧게 들어봤는데요. 혹시 돌아가고 싶을 때가 있으세요?

혜영¯ 없어요. 저는 지금이 제일 좋아요. 우선은 엄마로서 아이들이 잘 커줬다는 안도감과 뿌듯함이 있어요. 아이들이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걸 옆에서 볼 때 너무 기뻐요. 제가 그렇지 못했으니까요. 큰 딸는 무용을 하고 작은 딸은 사진을 해요. 하고 싶은 거 하라고 했더니 진로 선택을 그렇게 하더라고요. 잠깐은 공부를 좀 시켰어야 했나 생각도 했는데 (웃음).

 

김¯ 공부를 강요하는 스타일은 아니셨을 것 같아요.

혜영¯ 네.

김¯ 저희 엄마도 그러시거든요. 저는 하고 싶은 과목만 공부해서 수학은 10점 대인 적도 있었어요. 그래도 혼난 적은 없어요. 친구들보다 구구단을 너무 늦게 외워서 조금 혼난 거 빼고요. 원래는 대학교도 갈 생각이 없었는데 미술을 시작하고 나서는 욕심이 조금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엄마한테 이야기했더니 많이 좋아하셨어요. 하고 싶은 일이 생겨서 좋다고요. 저도 돈이 안 되는 일을 많이 하고 다니는데요. 남들이 보기에는 작가라는 직업이 멋있어 보이지만 저는 아직 아무것도 없잖아요. 당장 물감만 해도 비싼 것과 조금 싼 것 중에 오래 고민해요. 사실 작가로서 잘 가고 있는 걸까 고민도 많이 되고요.

 

혜영¯ 아직 20대시잖아요. 우리 둘째 아이가 삼수를 했는데 대학 동기들이 여자 예비역이라고 불렀대요.

김¯ 아이고. 못됐다.

혜영¯ 자연스럽게 석사나 박사를 하면 몇 살인지 계산을 하더라고요. 서른 살 안에 박사를 할 수 있을지 걱정을 하길래 그 나이에 박사 하는 게 대단한 거지. 요새 인생이 80세 넘어까지 산다고, 충분하다고 해줬어요. 다른 길을 찾게 될 수도 있고요. 여기 카페 사장님도 제 회사 동료였는데 하고 싶은 일 찾으신 거예요. 회사는 정년이라는 끝이 있잖아요. 그 이후의 삶을 위해 독립을 하신 거죠. 사람이 살면서 한 번쯤은 인생의 전환기를 맞게 된다고 하잖아요. 그걸 생각한다면 일찌감치 여러 일을 해보고 경험을 쌓는 게 좋은 것 같아요.

 

김¯ 그럼 혜영 님의 전환기는 언제였어요?

혜영¯ 음. 아직 안 온 것 같아요. 이제 조금 있으면 정년인데 그 이후가 온전히 나를 위한 삶이라고 생각해요. 그때가 전환기가 아닐까요?

 

김¯ 기대되시나요?

혜영¯ 기대는 되지만 걱정도 많죠.

 

김¯ 주변에서 여자는 30대에 멋있다, 40대엔 더 멋있다는 이야기를 많이들 해주셨어요. 완벽한 준비는 없다고 하지만 그래도 그때를 위해 잘 준비하고 싶어요.

혜영¯ 맞아요. 어떤 걸 완벽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김¯ 저는 전시 준비를 할 때 제 그림이 부족하다,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다고 생각해요. 시작은 호기롭게 했는데 완성이 항상 어려워요. 어디까지가 이 그림의 끝인지 모르겠고요. 그래서 최근에도 좋은 기회를 스스로 놓친 적이 있었어요. 준비가 덜 됐다고 생각해서. 그런데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완벽한 준비는 없더라고요.

혜영¯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완벽에 가까워지는 게 아닐까요? 자꾸 해봐야 이렇게 하는 게 더 좋았다. 그런 것들이 쌓여서 20대보다는 30대가 더, 그 후에 더 쌓여서 좋아지는 것 같아요. 살다 보면 변수가 정말 많거든요. 완벽이라는 건 있을 수가 없어요. 주변에 부자인 친구들을 보면 사는 데에 불편함이 적은 거지 다 만족하며 사는 건 아니더라고요. 자꾸만 뭐가 부족하다고 생각해요. 저는 두 자녀가 다 예술을 해서 사교육비가 많이 들었어요. 그런 부분에서 저는 여유롭게 산 건 아니지만 스스로 내 잘난 멋에 만족하며 살았어요. 물론 돈이 없어서 불편하거나 카드값 걱정을 할 때도 있지만, 내 삶이 불행하다 느낀 적은 없었어요.

 

김¯ 저희 엄마도 제게 큰돈 들 일이 있을 때마다 갑자기 돈이 들어온다고 말씀을 해주셨어요. 저를 안심시키시려고 한 말씀인지는 모르겠지만 걱정 말고 하고 싶은 일 하라고 해주셨던 게 생각나네요.

혜영¯ 엄마 너무 멋지시다. 질문 중에 조건 없이 사랑을 주고 싶은 존재가 무엇인지 있었죠? 엄마들에겐 당연히 아이들이에요. 자식에 대한 사랑에는 조건이 필요가 없어요.

 

김¯ 제가 처음으로 인터뷰했던 또 다른 혜영 님은 이 질문에 대해 엄마라고 대답하셨어요. 딸의 입장으로요. 예전에 어머니가 혜영 님을 키우셨으니 이제는 본인이 돌봐드리고 싶다고요. 관계는 그렇게 다 변화를 하는구나 싶었죠.

혜영¯ 예전엔 저도 그랬어요. 이 나이가 되면 부모님은 자식과 같기도 해요. 돌봐드려야 하는 존재가 되죠. 저는 제 딸들한테 나이가 들어도 나를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은 말라고 이야기했어요. 그런 건 지금의 젊은 사람들 생각엔 맞지 않는 거 같아요. 내가 너에게 투자를 했으니까 나를 책임져줘라. 그런 생각은 너무 구태의연한 거 같아요.

 

김¯ (웃음)

혜영¯ 거봐요. 웃잖아. 예전에는 딸들의 대학 진학이 흔하지 않았어요. 주변에 친구들만 봐도 형제자매 중에 공부를 제일 잘해도 여자아이니까 상고를 졸업해서 적당히 은행에 취직했어요. 아들은 대학에 보내고요. 결혼하면 직장을 다 그만둔다는 전제이니까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런데도 저희 엄마는 세 딸 다 대학을 갔으면 좋겠다고 하셨어요. 그런데 제가 애를 키워보니까 어머니가 너무 힘드셨겠다 생각이 들더라고요.

 

김¯ 딸들을 키우시면서 어머니 생각이 많이 나세요?

혜영¯ 많이 나죠. 그때 우리 엄마가 나보다 현명하셨지. 더 많이 헌신적이셨다고 생각해요. 그때는 삶이 넉넉하지 않고 먹고사는 일이 우선일 때였을 텐데.

 

김¯ 그런 가르침을 받으신 게 딸들을 교육하시는 데에 도움을 받으신 거죠?

혜영¯ 딸들한테 항상 이야기해요. 나중에 너희가 자식을 낳은 후에 하던 일을 그만두고 집에서 아이만 잘 키우겠다는 이야기는 절대 듣고 싶지 않다고요. 그러면 엄마가 너무 속상할 거 같다고요. 저는 제 아이가 원하는 일을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요.

 

김¯ 궁금한 게 있는데 내리사랑이라고 하잖아요. 자신의 어머니와 아이가 있을 때 자식을 더 사랑한다는 의미일까요?

혜영¯ 네. 그렇죠.

 

김¯ 저는 아직 엄마뿐이라 이보다 더 사랑할 존재가 생길 수 있는지 궁금했어요.

혜영¯ 생기더라고요. 내가 태어나고 살아가면서의 기억은 일부가 흐리잖아요. 하지만 내 아이가 나와 함께한 순간은 전부 기억해요.

 

김¯ 엄마란 모든 순간을 기억해 주는 사람이군요. 마지막으로 주말에는 주로 뭘 하세요?

혜영¯ 주말에는 나를 위한 시간을 보내려고 해요. 평일에는 퇴근하면 집안일 조금 하고 머리 식힐 겸 드라마 한 편 보고 잠들죠. 오늘은 아침에 일어나서 미장원 다녀왔어요. 이따 저녁에는 맛있는 안주 만들어서 와인 한잔할 거예요. 영화도 보고요.

 

 

발가락 사이, 반짝임 1-2_100x65cm_광목에 채색, 유채_2021

 

 

여름이 정말이지 푹 익었다. 집에서 3분 거리의 작업실을 가는 길에도 신호등에 서 있으면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레이스가 잔뜩 달린 엄마의 양산을 쓰고 도착한 작업실에는 여러 화분이 있다.

전시 때마다 선물 받았던 화분들을 3년간 차근차근 떠나보내고 겨우 남은 것이다. 내 키를 훌쩍 넘어버린 청하각 선인장과 커다란 잎이 달린 극락조, 꽃피우기를 멈춘 환타지아. 이번 개인전 때 선물 받은 익소라와 필리핀 디시디아. 새로 개업한 친구의 꽃집 로고를 그려주고 받은 아라리아. 엄마가 예쁘게 기르던 걸 훔쳐 온 흑토이 선인장. 그림 재료를 사러 가던 길에 안국역 길가에서 산 아스파라거스 두 개.

잎이 피고 지는 게 가장 잘 보이는 극락조는 최근에 생긴 새순이 끝을 채 다 펴지 못하고 힘겨워하길래 물을 듬뿍 줬다. 며칠 후 살펴보니 생생하던 다른 잎 두 개가 갈색으로 상해 있었다. 아라리아를 준 꽃집 친구에게 물어보니 과습이 문제였다.

물을 잘 주래서 화장실까지 이고 날라 흠뻑 주었는데 잎이 상하다니, 아직 통실통실한 줄기를 가위로 자르자니 미안했다. 쓰레기통에 들어가지도 않는 길이라 몇 번을 더 잘라 버려야 했다.

그다음 문제는 통풍이었다. 나의 낡은 작업실 창문은 겨우 1/4 정도 열리기 때문에 모든 화분이 충분히 통풍하기에는 아쉬운 크기였다. 그런데 비가 들이닥칠 때는 갑자기 너무 큰 크기라 장마철에는 집에서 낮잠을 자다가 뛰어가기 일쑤였다.

서투른 내가 고군분투하는 동안 멋대로 자라난 화분들은 모두 자연에서 온 것이고 그만의 규칙이 있어 지켜보는 즐거움이 컸다. 복숭아도 먹고 옥수수도 먹을 수 있어 좋지만 이번 여름은 특히나 식물 돌보기의 즐거움을 알게 된 것이 큰 기쁨이다. 화분들이 있는 작업실 중간 공간에는 에어컨이 없어 숨이 턱턱 막히지만, 초록색 이파리들을 만지고 물을 주고 바람 쐬어주는 동안은 아무래도 괜찮다. 무언가를 돌본다는 건 땀이 나도 즐거운 일인가 보다.

작은 창문을 대신해 선풍기를 틀고 극락조 뒤에 앉아 땀을 식혔다. 이파리가 기분 좋게 흔들리며 시원해지자 어느 선선한 날의 대화가 떠올랐다.

 

SNS 계정에 인터뷰에 대한 글을 올린 후 많은 혜영 들과 연락이 닿았지만 다양한 연령대를 만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 화상으로 만나 각자의 작업 과정을 나누는 동료 작가들에게 이야기했더니 나만 볼 수 있는 메시지가 도착했다.

 

[저희 엄마도 혜영이에요.]

 

메시지를 준 작가의 어머니와 한 달 뒤 답십리 카페에서 만났다. 나에게는 낯설고 그에게는 익숙한 동네 카페의 문이 활짝 열리며 쾌활한 목소리가 들렸다. “하이~ 나 찾아오신 분 없었어?” 설레는 마음을 가진 사람의 기분 좋은 미소와 함께 대화를 시작했다.

인터뷰를 시작하기 전 나는 완전히 그에 대한 이야기만을 나눌지, 이 자리를 만들어준 작가의 어머니로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물었다. 엄마가 되면 자신의 이름을 조금 잃게 된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기 때문이다. 그 질문이 바보 같았다는 건 대화를 시작하고 얼마 안 돼 알 수 있었다. 그는 혜영이기도 하면서 너무나도 두 딸의 엄마였다.

그의 대학교 시절 이야기를 들을 때에는 어쩐지 경쾌한 리듬 같은 게 느껴졌다. 생기있고 건강한 학생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첫 직장생활의 이야기를 할 때는 색색깔 화장을 하고 단정한 유니폼을 입었다 해도 어쩐지 배경 음악이 끊긴 흑백영화를 떠올리게 했다.

그는 여자아이가 태어나면 어른들의 얼굴에 실망이 비치는 시절에 나고 자랐다. 때로는 뜻대로 되지 않은 일들에 그저 흐르듯 살아왔대도 딸의 대학 진학을 응원하던 어머니가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그보다 더욱 사랑하게 된 두 딸이 있다. 서툴렀던 육아와 병행하면서도 놓칠 수 없던 일에 정년이 오면 그가 말한 전환기가 찾아올 것이다.

 

손에 쥔 모래 같은 과거 말고 발가락 사이의 모래를 떠올려 본다. 반짝이는 바다로 나아갈 발판이 되어줄 발가락 사이의 모래. 조금 성가시고 조금은 기분 좋은 따듯한 모래. 그리고 그곳에 앉아 그저 아이와의 모든 순간을 기억하며 앞으로를 응원해 줄 것 같다. 하고 싶은 일을, 좋아하는 일을 반드시 계속하라고 말이다.

다시 화분을 본다. 상한 이파리는 잘라냈지만 새 이파리의 끝이 모두 펴졌다. 느리고 못나도 좋으니 원하는 대로 자라주길 바라본다.

 

 

 

*인터뷰이로 참여해주신  모든 혜영 님께 감사드립니다.

 

 

‘조용함을 듣는 일’은 2021년 1월부터 2022년 3월까지 [월간소묘 : 레터]에 연재되었습니다. (연재명 ‘김혜영의 혜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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