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오늘 하루 어떠셨어요?

혜영¯ 다행히 오늘은 여유로웠어요. 그동안 계속 바쁘고 야근하는 날이 많았는데 오늘은 퇴근도 빨리했고요.

김¯ 보통은 퇴근이 정해진 시간보다 늦어지나요?

혜영¯ 네. 보통 그래요. 약속이 또 미뤄질까 봐 걱정했어요.

 

김¯ 원래 약속이 2월 말이었죠. 벌써 4월이네요. 혜영 님은 바쁘셨고 저는 조금 아팠고요.

혜영¯ 그러고 보니 어디가 아프셨어요?

김¯ 건강검진을 했는데 증상 없이 아픈 곳들이 꽤 있더라고요. 그래서 병원에 오가느라 조금 바빴어요.

혜영¯ 심각한 건 줄 몰랐어요.

김¯ 괜찮아요! 미리 알았으니 치료하면 된대요. 혜영 님 건강은 괜찮으세요?

혜영¯ 작년 말에 건강검진을 했는데 갑상선에 혹이 있었어요. 크기가 크거나 수술할 정도는 아니고요. 고등학교 때는 위염을 달고 살았었는데 이제는 피곤할 때 몸에 수포가 나요. 이직한 뒤에는 손에 상처가 남더니 2년 내내 낫질 않네요.

 

김¯ 저희 엄마도 갑상선이 안 좋으셨어요. 자주 피곤하고 예민해진다고 하던데요. 제가 약속을 미뤘을 때 어렵게 만나니 더 반가울 거라고 답해주신 게 기억에 남아요. 짧은 문자 속에서 혜영 님을 상상해 볼 수 있었어요. 다정하고 따듯한 사람으로요.

혜영¯ 저도 작가님이 보내주신 질문들이 다 너무 좋았어요. 생각을 많이 하셨을 것 같아요.

김¯ 제가 저한테 하던 질문들이라 어렵지 않게 적을 수 있었어요. 남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궁금했고요. 저는 스스로한테 관심이 많거든요.

혜영¯ 저는 작가님한테 궁금한 게 본인에 대해 잘 아세요?

김¯ 아니요. 관심이 정말 많지만 가장 모르는 것도 저인 것 같아요. 방금만 해도 혜영 님을 만나러 오는 길에 회사에서 퇴근하시는 분들과 반대 방향으로 걸어왔는데요. 좋아하는 일을 위한 길을 가면서도 그럴 땐 왠지 제가 어디에 있는 건지 알 수 없어서 불안하고 어려워요.

혜영 님은 어떠세요?

혜영¯ 저도 스스로가 낯설 때가 꽤 있어요. 다른 사람이 제게 어떤 사람이냐고 물어볼 때 늘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고민해요. 가장 대답하기 어려운 건 취미가 뭐냐는 질문이고요. 취미가 없어서요. 옛날에는 하고 싶은 것도 많고 꿈도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전혀 하고 싶은 게 없어졌어요. 흔한 질문이지만 그게 제일 어렵고 뭐라고 꾸며 낼지부터 생각하게 돼요.

 

김¯ 저는 취미도 특기도 그림뿐인 게 고민인데요.

혜영¯ 좋아하고 잘하는 일을 업으로 삼고 일상이 되신 게 부러워요.

김¯ 그런 점이 좋다가도 싫어요. 자존감으로 연결되는 부분이 많거든요. 제가 만들어낸 것들이 모두에게 좋을 거라고는 생각 안 해요. 그래도 부정적인 의견을 마주하면 막상 너무 상처를 받아요.

혜영¯ 그렇죠. 자기만의 프라이드가 있잖아요.

 

김¯ 자신만만한 척하면서 속으로 걱정을 많이 해요. 대학교 때도 교수님이 조금만 뭐라고 하면 담배 피우러 도망갔어요. 정신력이 강하고 극복을 잘하는 운동선수들은 경기 후에 실수를 빨리 잊고 다음 라운드를 생각하잖아요. 저는 복기만 하다가 다음 일도 망치게 되는 경우가 많아요. 아주 작은 할 일이어도 일단 끝내면 쉬어야 해요. 과하게 휴식을 해요.

그런데 회사에서는 울고 있을 시간이 없을 것 같아요. 어떤가요?

혜영¯ 저는 디자인 회사에서 7년 정도 일을 하다가 2년 전에 아예 다른 계열의 회사로 이직했어요. 출퇴근 버스에서 참 많이 울었고요. 그런 날이 있잖아요. 슬픈지 모르겠는데 눈물이 안 멈춰요. 회사 생활을 하면서 아침에 눈물이 나는 건 또 처음인 거예요. 휴지가 없어도 다행히 마스크를 끼니까 괜찮겠지 생각하면서 한 시간 내내 울었는데, 눈물 날 때 콧물도 나잖아요. 회사에 도착하고 보니 마스크가 다 젖어서 투명해졌더라고요. 민망할 정도로요. 그렇게 아침저녁으로 운 날이 꽤 있어요.

김¯ 힘들다는 생각을 안 해도 눈물이 막 나는… 민망하고 속상한 아침이네요.

혜영¯ 맞아요. 그냥 눈물이 안 멈추는 거예요.

 

김¯ 저도 그리던 그림을 벽에 걸어놓고 가만히 보다가 운 적이 있어요. 원래 빼곡히 채워서 그리는 그림을 좋아하는데요. 공들여서 그린 마음을 보여주고 싶어서요. 그러다가 그걸 조금씩 내려놓는 중이었어요. 바다가 있고 끝에 집이 있는 긴 그림이었는데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여백이 많았거든요. 그 과정에서 남들은 다 괜찮다고 하는데 제가 저를 괴롭히고 있더라고요. 스스로 계속 안 된다고만 말하면서요.

혜영¯ 그런 과정에서 좋은 결과가 나올 때도 분명 있지만 힘들 때가 많죠. 저도 자신을 괴롭힐 때가 있어요. 겉으로 표출하지는 않아도 자신은 분명히 느끼는 감정들이라 그런 것 같아요.

 

김¯ 맞아요. 예전에 하고 싶던 일 중에는 어떤 게 있어요?

혜영¯ 부모님이 자영업을 오래 하셔서 어릴 때부터 가게 바쁠 때 도와드리는 게 익숙했어요. 그때만 해도 대부분 아버지가 직장에 다니시고 어머니는 가정주부인 친구들이 많잖아요. 그래서 왜 우리 부모님은 늘 바쁘고 집에 안 계실까 생각했고 어린 마음에 속상했어요. 그때부터 자영업 환경을 간접적으로 경험해 보니 포기해야 할 게 많더라고요. 어릴 때부터 자연스레 목표가 회사원이 된 것 같아요. 저도 미술을 전공했지만 무조건 회사원이 되겠다고 정했어요.

 

김¯ 회사원이 되신 후의 생각은 어떠세요?

혜영¯ 모르는 걸 배우니까 처음에는 힘들면서도 재밌었어요. 그래도 회사에 다니는 게 적성에 맞는 건 아니에요. 대학 졸업 이후로는 알게 모르게 우울하기도 해요. 대학 때는 자기 작품을 하잖아요. 지금보다 훨씬 자존감도 높고 즐거웠던 거 같아요.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가장 크게 느끼는 편인데 그게 늘 지속이 되다 보니까 365일 내내 긴장감 속에 지내요. 일요일은 되게 우울해요.

 

김¯ 왜요?

혜영¯ 일주일이 시작된다는 생각에요. 반대로 오늘은 기분이 정말 좋아요.

김¯ 오늘이…

혜영¯ 목요일이요. 저는 목요일 저녁을 좋아해요.

 

김¯ 금요일 저녁이 아니고요?

혜영¯ 네. 목요일 저녁부터 마음이 편안해져요. 하루 중에서는 해 질 때가 좋은데요. 한쪽 하늘은 빨갛게 물들고 반대쪽은 아직 파란색이어서 그 모습이 하나의 건물에 담기는 시간이요.

 

김¯ 어떤 감정인지 알 거 같아요. 그런 시간에는 왠지 위로받는 마음이 들잖아요. 저는 비슷하면서도 다른데요. 해뜨기 전에 가장 어두운 순간부터 어느새 환해지는 순간을 좋아해요.

혜영¯ 이유가 있어요?

김¯ 작년까지만 해도 도전해야 할 일이 생기면 그 목표를 깨부수는 게 재밌다고 말해왔어요. 어느 순간부터는 지치더라고요. 부수는 게 아니라 되려 제가 맞는 경우가 더러 생겨서요. 어두운 순간에는 숨을 돌리고 빛이 들어오는 때는 그래도 다시 한번 힘을 얻고 싶어져요. 자신을 다독이면서요. 그래서 여명의 시간이 좋아요.

혜영¯ 사람들은 다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요. 고독하고 외롭기는 해도 그럴 때 잦아드는 게 있어요.

 

김¯ 그렇죠. 해가 밝아오는 거처럼 마음에도 작은 빛이 번지기 때문에 삶이 반복되는 건 아닐까… (웃음). 저는 최근에 달리기를 시작했어요. 취미를 만들어보고 싶어서요. 달리기 애플리케이션의 도움을 받아서 뛰는데 1단계를 넘기기가 정말 힘들어요. 1단계가 1분 동안 달리고 2분을 걷는 건데 몇 번 반복해야 해요.

혜영¯ 맞아요. 1분을 쉬지 않고 달리는 게 쉽지 않아요.

 

김¯ 저만 그런 게 아니었네요. 심장이 정말 터질 거 같아요. 제 초등학교 성적표에 미술은 늘 우수였지만 음악과 체육은 항상 미흡이었어요. 못할 걸 알면서 시작한 건데요. 이제 3분은 뛸 수 있어요.

혜영¯ 늘었네요?

김¯ 네. 저만 아는 속도로 늘어요. 너무 못하다가 조금 못하게 되는 순간이 재밌더라고요. 그래도 욕심이 생기지는 않아요. 잘하고 싶고 자꾸 스스로한테 기대를 하게 되는 일들은 취미로 삼기 어려운 것 같아요. 제게는 그림이 그렇고요.

어떤 순간을 가장 좋아하세요?

혜영¯ 해 질 때랑 야경을 바라보는 게 좋아요.

 

김¯ 밤 풍경 너무 좋죠.

혜영¯ 예전에 왕가위 감독의 영화를 보고 무작정 홍콩에 갔어요. 야경으로 유명한 빅토리아 파크라는 곳이 있는데 보통은 트램을 타고 내려가요. 그런데 줄이 너무 길어서 저는 작은 마을버스를 탔어요. 천천히 길을 따라 돌면서 내려가는데 위에서 봤던 풍경 속 집들을 다시 천천히 보는 게 너무 좋았어요. 풍경에 젖어드는 느낌이요.

 

김¯ 풍경에서 치유를 받으시는 것 같아요.

혜영¯ 네. 몇 달 전부터 독립을 하려고 집을 알아보고 있는데 창밖 경치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김¯ 독립은 왜요?

혜영¯ 너무 삶의 의미가 없는 채로 살아가는 느낌이어서요. 나의 인생을 사는 거 같지가 않아요. 힘들더라도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그러고 보니 작가님은 오늘 어떠셨어요?

김¯ 저는 조팝나무라고 선물 받은 꽃을 정리하다가 왔어요.

혜영¯ 기다랗고 흰색 꽃이 피는 거요?

김¯ 네. 맞아요. 줄기에 꽃이 길게 달려 있잖아요. 줄 이라도 서있는 것처럼요. 그래서 시드는 것도 밑이나 위에서부터 순서대로 일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더라고요.

혜영¯ 그럼요?

김¯ 중간중간이 갑자기 시들어요. 그래서 나머지 부분이라도 며칠 더 보려고 정리를 하다 왔어요. 제 요즘의 가장 큰 관심사가 건강 이어서 그런지 우리 몸이나 마음도 비슷하겠다 생각이 들었어요. 순차적인 것도 아니고 증상도 없이 아픈 곳들이요. 그런 마음을 알고 다독일 시간들이 필요한 것 같아요.

 

 

빛추이_50x73cm(2ea)_광목에 채색,유화_2021

 

 


지난 2월에 받은 건강검진 결과를 시간 차를 두고 통지받았다. 당신은 여기가 안 좋으니 큰 병원에 가봐야겠다고,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니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이 따라왔다. 당장의 통증이 없는 내 몸에 대해 생각하다가 금방 잊고 당장의 해야 할 일들을 했다. 금방 전화가 다시 울렸다. 마지막으로 나온 검사 결과지에 문제가 있다고, 의뢰서를 써줄 테니 역시나 대학병원에 가보라는 말이었다. 걱정하지 말라는 말이 이번에는 없었다. 핸드폰 화면에 두 건의 병원 예약 메시지가 미리보기로 떠 있었다.

 

며칠 뒤 처음 가본 병원에서 접수를 하다가 핸드폰을 떨어뜨렸다. 깨진 핸드폰 뒷면을 보고 긴장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지금은 괜찮은 것 같아도 이대로 두면 안 된다며 다음 진료 예약을 했다. 작은 수술을 앞두고 사전검사를 하기 위해 커다란 병원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는 증상 없이 아픈 곳들에 대해 생각했다. 조금 울고 싶었는데 엄마가 너무 속상해해서 그럴 수는 없었다. 그래도 미리 알아서 다행이라고 엄마도 달래고 나 자신도 달랬다.

 

그렇게 미뤄진 약속으로 겨우 만난 이번 달의 혜영은 우리가 대화하는 동안 내가 그림으로 그릴 만한 이야기를 들려주지 못할까 봐 걱정했다. 그를 잦아들게 만드는 풍경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줄 때 어떤 장면을 그릴지 확실히 정할 수 있었다.

 

희미하게 날이 밝아오는 빛, 그 무렵을 우리는 여명黎明이라 부른다. 지난 2019년에는 여명이라는 단어의 한자 ‘검을 여黎’를 ‘남을 여餘’로 바꾸어 제목을 붙인 그림을 그렸고 밝음이 남았다는 단순한 의미를 담았다. 어둡고 고요한 밤을 좋아하지만 안정되지 않는 아득한 밤도 분명히 있다. 그리고 그런 날도 어떻게든 밝아지곤 했다. 칠흑 같은 어둠의 순간이 나를 잡아 삼킬 것만 같은 이 밤들을 견디면 어딘가엔 반드시 남아 있을 빛이, 실낱같은 희망이 나를 맞아줄 것이라고. 턱을 괴고 이제 막 다 그린 그림을 보던 날도 그렇게 나를 달랬다.

 

그가 이유 없이 울던 날도 같을 것이다. 증상 없이 아픈 곳들은 사물함 속 썩은 우유 혹은 난데없이 시드는 식물과도 같아서 외면할 수가 없다.

 

남을 여에 명조용히 걸어와 곁을 지켜주렴

 

 

 

*인터뷰이로 참여해주신  모든 혜영 님께 감사드립니다.

 

 

‘조용함을 듣는 일’은 2021년 1월부터 2022년 3월까지 [월간소묘 : 레터]에 연재되었습니다. (연재명 ‘김혜영의 혜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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