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어느 날, 혜영이 임혜영을 인터뷰하다.

 

김¯ 제가 질문지 예시를 몇 개 보내드렸는데요. 그중에 답하고 싶으신 질문이 있으셨나요?

혜영¯ 불안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 생각해봤어요. 깊게는 아니지만 계속 돌아다니는 감정들이요. 저는 작년까지 좀 많이 불안했어요. 상담 선생님이 하는 말이, 제가 불안감을 빨리 느끼는 것 같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주변보다는 조금 더 나만 생각하고, 내가 할 수 있는걸 생각하라고 하셔서.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게 뭐지? 이렇게 다시 시작하는 거 같아요. 지금부터.

 

김¯ 지금부터요?

혜영¯ 네. 지금부터. 그전에는 좋은 학교의 학위를 따 놓아야지 생각했고, 그렇게 했어요. 뭔가 훈장 달 듯이요. 회사도 타이밍은 좋았지만 스스로 한 노력의 결과는 아니었다고 생각하거든요.

 

김¯ 스스로 그렇게 느끼시는 거예요?

혜영¯ 네. 그래서 나는 운은 좋은데 노력해서 얻는 건 약간 더디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거기에서 오는 괴리감이 불안을 만들어내더라고요. 그래서 진짜 제가 좋아하는 게 뭔지 스스로 모르는 거 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김¯ 좋아하는 거요. 그럼 진짜 쉬운 거부터 같이 생각해봐요. 저는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해요. 그림을 그리다 보면 혼자서 사유하는 시간이 길잖아요. 그러다 보니 다른 사람들은 살면서 어떤 생각을 하지? 가 궁금해졌어요. 그래서 혜영 님을 뵙게 된 건데, 그 후에 만들어진 그림을 보고 또 다른 관객은 어떤 기억을 떠올릴까. 그렇게 질문이 이어지더라고요.

혜영¯ 어떻게 형상화가 될지 궁금하네요.

김¯ 저도 궁금해요.

 

혜영¯ 왜 혜영이였는지도 궁금해요. 이름이 가진 의미가 뭘까.

김¯ 혜영이라는 이름이 엄청 평범하잖아요. 제 혜영은 부모님의 성함을 이어 붙인 ‘미혜영희’ 로 이름 지어졌거든요. 이 이야기는 평생을 부모님께 안겨있다는 느낌을 받게 해줬어요. 저는 그 평범한 이름에 나름 의미를 부여한 거죠. 제 프로젝트의 방향성이 ‘우리의 일상 속 고유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프로젝트 속 인터뷰이의 이름은 중요치 않을 수 있어요.

 

혜영¯ 어떤 사람들을 만나고자 하는 건지도 궁금하고요.

김¯ 사실 평범한 사람을 만나는 게 첫 번째 목표고요. 혜영이라는 이름은 저에게 가장 친근하고도 낯선 타인을 만나기 위한 장치예요. 앞으로 계속해서 창작하며 살고 싶은데, 내가 살아보지 못한 삶을 어떻게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을까 궁금했고요. 거기에서 어떤 재미나 감동을 느끼고 싶었어요. 단순하게 흥미만 가져도 너무 좋고요. 그래서 제가 좋아하는 건 그림이니까 이런 경험을 시각화해 보자 했던 거죠.

 

제주도에 다녀와서 그린 그림이 있었는데 어떤 분께서 오래 봐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말을 붙여봤는데, 그분께서 제주도에서 30년 전에 육지로 시집을 오셨대요.

멀지도 않은 곳인데 삶이 바빠서 한 번을 못 가봤다. 그런데 이 그림 속 집이 어릴 때 자랐던 집이랑 너무 닮아서 오래 보고 있었다고. 이렇게 말씀을 해주셨어요. 그러면서 그 그림 앞쪽에 그려진 의자에서 잠시 쉬어갔으면 좋겠다고 하시더라고요.

 

혜영¯ 삶이 너무 힘드셨나 보다.

김¯ 네. 조금 울컥했었어요. 원래 그림 제목이 자전적인 여행 이야기를 담은 거라 <찰나, 다시> 였는데 이제 그분께 마음이 가더라고요. 그래서 <잠시 앉아 쉬어가야겠네>로 변경을 했어요. 그때부터 관객의 이야기를 그림에 쌓아보기로 했죠.

 

혜영 님도 오늘 제게 이야기를 나누어주려 시간을 내주셨는데요. 요즘은 마음이 어떠실지 궁금해요. 저희가 오늘 이렇게 마주 앉아서 이야기하지만, 어쩌면 다시는 안 볼 수도 있는 사이잖아요. 서로가 어떤 사람인지도 전혀 모르고요. 그래서 더 할 수 있는, 해버릴 수 있는 이야기도 있을 것 같아요.

듣기 전에 우선 말씀 드리면, 저는 말도 많고 눈물도 많아요. 그래서 사실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는 게 조심스러워요. 제가 너무 잘 울거든요. 그래서 이 사람이 해주는 이야기가 본인에게는 그렇게까지 울 이야기는 아닌데 내가 울면 어떡하지? 이런 마음이 들어서요.

 

혜영¯ 저도 오늘 뵙기 전에 문득 어디까지 이야기를 하는 게 좋을지 생각해봤어요. 살아오면서 크게 굴곡이라고 생각했던 게 있다면… 아버지가 좀 편찮으셨거든요. 저희 아버지가 집 베란다에서 혼자 쓰러지셨어요. 뇌출혈이셨는데, 동생이 혼자 발견을 한 거죠. 그때 저는 재수 학원에 있었고 엄마는 밖에 계셨어요. 한마디로 아버지를 살리기 위한 타이밍이 너무 안 맞았던 거죠. 그 골든 타임을 놓쳐서 10년 동안 아버지가 누워계시다가 돌아가셨어요. 그 부분이 제일 감당이 안 되는 부분이에요.

 

김¯ 지금은 그때보다는 마음이 괜찮으신가요?

혜영¯ 지금… 지금은 그래도 괜찮죠. 그냥 그때 아버지를 보고 있던 걸 떠올리는 게 힘든 것 같아요. 담담히 받아들이기가 힘들었죠. 돌아가시기 전까지.

 

김¯ 분명히 내 안에 있는 기억인데 꺼내고 싶지 않은 게 있잖아요. 저도 그렇고요. 그거에 대해 더 생각해보고 내 마음을 스스로 추스르고 싶은데 다시 생각하는 거 자체가 두려운 거 같아요.

혜영¯ 맞아요.

 

김¯ 동생 분은 많이 어리셨나요?

혜영¯ 동생이 그때 열아홉이었어요. 그래서 동생한테도 미안한 마음이 있어요. 그때 혼자서 그 상황을 바라보게 한 게 너무 타이밍이 안 맞았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김¯ 후회는 많이 하시나요?

혜영¯ 후회를 많이 했었죠.

 

김¯ 지금은 아닌가 보네요.

혜영¯ 안 하려고 노력해요. 그냥 상황에 최선을 다하는 편이에요.

 

김¯ 저는 미련이 엄청 많으면서 티를 잘 안 내요. “그냥 그렇게 될 일이었어”라고 얘기를 하죠. 제 약점을 제가 제일 잘 아는데, 그걸 남이 조금이라도 아는 게 너무 싫은 거예요. 상대방 눈에 제가 언제나 괜찮은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심적으로요.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항상 그런 마음이 있어요.

혜영¯ 방어기제인가요?

 

김¯ 네. 방어기제예요. 그러면서 남의 이야기를 저한테 해줬을 때… 어? 그래서 그런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남 얘기를 들었을 때 잘 우는 것 같아요. 나는 못 하는 얘기를 이 사람은 나한테 해주네? 같은 마음이 들어서. 와 지금 알았어요. 혜영 님이랑 대화하면서.

혜영¯ 자기가 못 하는 말을 듣게 되니까 그런가 봐요.

 

김¯ 네. 그런가 봐요. (아버지 일이 있으신 후에) 그 후로 어머니는 괜찮으셨나요?

혜영¯ 그 후로… 사실 아버지가 구속을 많이 하시는 편이셨어요. 어머니가 원래 미싱 일을 하셨는데, 아예 못하게 하셨어요. 집 밖에 나가는 것보단 애 둘 잘 키우길 바라신 거죠.

그래서 어머니가 집에서 핀 만들기 같은 부업을 하셨어요. 하나 붙일 때마다 1원, 2원씩 하는 거. 그걸로 한 달에 100만 원 넘게 버시기도 하셨고요.

 

김¯ 대단하시다.

혜영¯ 어머니는 일을 해야 하는 사람인데, 남편 때문에 갇혀 지내다 보니까 그거랑 맞바꿨다는 생각도 들어요. 아버지 쓰러지신 거랑 어머니 일하시는 걸. 지금은 오히려 편안해 보이세요. 그런 부분에서는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했죠. 가족 간에는 아이러니한 관계가 있는 것 같아요. 보완해주면서도 싸우고. 싸울 때는 또 피 터지게 싸우고. 견디는 게 힘들지만, 곁에 있는. 근데 저는 너무 어려서 그랬는지 합의점을 못 찾았던 것 같아요. 저는 아버지랑 너무 안 맞았거든요. 그런데 어머니는 그때도 본인만의 상황에서도 잘 살아내셨죠. 지금도 그렇고요.

 

김¯ 엄마는 정말 강한 것 같아요.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제가.

혜영¯ 저도요.

 

김¯ 사실 저는 약간 마마걸이에요. 엄마를 많이 사랑해요.

혜영¯ 오 저도 저도.

 

김¯ 그러세요? 그 존재가 너무 사랑스럽잖아요. 엄마 덩어리가 저는 너무 좋고 볼 때마다 껴안고 싶어요.

혜영¯ (조금 운다)

 

김¯ (따라 운다) 왜 울까요. 저희는?

혜영¯ 엄마라고 하는 것보다 덩어리라고 하는 게 더 슬픈 것 같아요.

 

김¯ 아 그래요? 제가 덩어리라고 하는 건 엄마라는 단어가 너무 슬퍼서였어요.

혜영¯ 덩어리가 더 슬픈데…!

 

김¯ 왜냐면 덩어리라고 하면 일단 웃기니까.

혜영¯ 웃기지.

 

김¯ 영화나 노랫말에서 엄마 이야기는 대부분 슬프잖아요. 그런데 슬픔과 웃음이 항상 같이 있는 거 같아요.

혜영¯ 그렇죠… 저도 상담받을 때, 제가 자꾸 웃으면서 이야기를 하니까 지금 어색해서 웃는 거죠? 라고 하시는 거예요. 웃음으로 가리려고 하지 말라고 하시더라고요.

생각해보면 진짜 두 개가 같이 가는 거 같아요.

 

김¯ 맞아요. 울다가 웃으면 어디 털 난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웃기다가도 슬프고. 슬픈 것도 가끔은 웃겨요. 나 너무 우네. 좀 웃기다. 이런 생각이 들거든요. 하하.

혜영 님이 좋아하시는 것도 알고 싶어요.

혜영¯ 저는 혼자 여행하는 걸 좋아했어요. 그것도 어떻게 보면 회피였죠. 아버지가 아프시고 누워계시니까 여행 가는 사람이 없었어요. 아버지 돌아가신 후에는 혼자서 여행을 많이 다녔어요. 사실 해방이니까요. 너무 힘들었고, 우울했거든요.

해방감을 너무 느끼고 싶었는데, 그게 여행이었고 여행에서도 물이 많은 곳이 좋았어요. 제주도는 매년 가요. 베네치아는 집이 물에 떠 있는데도 안정적인 게 좋았어요. 그런데 베네치아도 요새 홍수가 많이 난다고 한다더라고요.

 

김¯ 불안해졌네요? 역시 안정적이면서도 그렇지 않은 것들이 있는 것 같아요. 되게 단단해 보이는 사람도 조금만 얘기해보면 꼭 그렇지도 않은 경우가 많고.

 

대학교 실기수업 마지막 주에 한 명씩 앞에 나가 그림 이야기를 하면서 학기 마무리를 하거든요. 그런데 동기들이 그림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가 우는 거예요. 근데 저는 당시에는 잘 몰랐어요. 나는 드라마 주인공 같은 사건이 없나? 이런 건방진 생각을 한 거죠. 근데 지금 생각해보니까 그렇지 않았어요. 그냥 제가 외면한 거더 라고요.남한테 내 슬픈 이야기를 하는 거조차 싫은데 그걸 그림으로 그리려니 당연히 그렇게 못했던 거죠.

혜영¯ 다 드러나니까?

 

김¯ 네. 그러고 보니 혜영 님 이야기를 들으려고 온 건데 저 스스로에 대한 생각도 많이 하게 된 것 같아요. 우리가 오늘 뭘 만들어 냈을지 궁금하네요.

 

홀로 피는 것은 없다_광목에 채색, 유채_2021

 

(세부)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자 눈 덮인 흰 산이 어둠에 묻혀 있었다. 낯선 사람과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 시간만 뺏는 건 아닌지 걱정스러웠는데 우리는 만난 지 몇 시간 만에 서로의 눈물을 봤다. 이상하게도 프로젝트를 시작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그 찰나에 들었다.

 

그와 헤어진 후 혼자 걸으며 휴대폰 음성메모에 쌓인 이야기들을 다시 들었다.

인터뷰 원고에 다 옮겨 적지 못한 ‘엄마에게 실망한 날들’에 관한 부분이 재생되고 있었다. 온 우주에서 가장 멋지고 커다란 사람으로 여기던 엄마가 사실은 작고 여린 사람이란 걸 깨달은 날이 우리에게 있었다.

 

일을 해야만 하는 사람이라던 그의 어머니는 아주 오래전의 직업이었던 미싱 일을 다시 시작했다. 그는 얼마간 이른 아침부터 다음 날 새벽까지 익숙하고도 낯선 환경과 마주한 어머니와 함께했다. 어릴 적에 젓가락을 사용하는 법, 왼쪽 오른쪽 신발을 구분해서 신는 법처럼 사소한 것부터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많은 것들을 가르쳐준 엄마 옆에서, 그렇게 일을 도왔다.

 

15초 전으로 돌아가기 버튼을 눌러 그 부분을 다시 들었다. 제주도 길가에 홀로 핀 실유카를 보았던 날이 떠올랐다. 날카로운 칼 모양의 잎 가장자리에서 흰 실 같은 섬유가 나와 이름에 실이 붙었단다. 그 위로 소복이 핀 흰색 초롱꽃들은 관상용으로 훌륭해서 주로 한 번에 많이 심어져 있는 걸 볼 수 있다.

 

아무도 모르게 발아되어 홀로 자라났나 생각하며 다가가니 잘 자란 실유카 뒤에 작아서 보이지 않던 게 하나 더 있었다. 큰 실유카에 기대어 있는 듯한 작은 실유카는 자라나고 있는 건지 이미 모두 자라 시든 건지 알 수 없었다. 오늘의 나는 그날 저녁 제주도에서 만난 실유카의 기억에서 그와 어머니의 이야기를 본다.

 

그는 주변에서 들려오는 결혼 소식에 조바심이 났던 적도 있었지만, 이제는 엄마를 보듬으며 둘이 잘 지내보고 싶다고 했다. 너무 사랑해서라는 말도 덧붙였다.

 

앤서니 브라운의 책 <우리 엄마>에는 우주비행사가, 무용수가, 영화배우가, 어쩌면 사회적으로 더 멋진 사람이 될 수 있었던 사람이 나의 엄마가 되었다고 한다. 그는 결혼하지 않겠다고 했으니 엄마가 될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사랑을 돌려주고 싶은 엄마 덩어리와 함께할 것이다. 그리고 그 둘은 각자의 일을 한다.

 

나눠 들은 이야기가 많아서 어쩐지 낮보다 더 힘이 생긴 밤이었다.

 

 

 

*인터뷰이로 참여해주신  모든 혜영 님께 감사드립니다.

 

 

‘조용함을 듣는 일’은 2021년 1월부터 2022년 3월까지 [월간소묘 : 레터]에 연재되었습니다. (연재명 ‘김혜영의 혜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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