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영¯ 헤테로토피아가 뭐예요?

김¯ 대학교 교수님이 추천해주신 책에서 처음 접한 단어인데요. 나만의 다락방, 편안한 공간 같은 거예요. 현실 속의 유토피아라고 생각하면 쉬워요. 유토피아는 닿을 수 없는 곳이지만 헤테로토피아는 현실에 있죠. 어떤 공간이 아니라 순간일 수도 있어요.

혜영¯ 순간이라면… 저는 폭염을 엄청 좋아해요. 어릴 때 꿈이 인어였는데 제가 수영을 아예 못 했거든요. 인어의 몸짓이 너무 좋아서 처음에는 얕은 수영장에 가서 그걸 무작정 연습했어요. 그러다 보니 수영을 하게 되고 앞으로 나아 갈 수 있게 된 거예요. 지금은 스쿠버다이빙도 하고요. 못하던 걸 할 수 있게 된 게 너무 기뻐서 여름마다 물이 있는 곳에 갔어요.

 

김¯ 여름의 물속을 좋아하시는군요.

혜영¯ 네. 물 안에서는 자기의 몸에만 집중해야 하거든요. 숨이 가빠지거나 당황하지 않도록 나에게 집중을 해야 해요. 그런 느낌이 좋아요. 여름은 사실 여자들한테 불편한 계절이잖아요. 속옷에 땀 차고 화장도 지워지고요. 물속에서의 시간을 좋아하게 되면서 불편한 것들을 많이 내려놨어요. 이제는 너무 답답해서 속옷도 잘 안 하고 다녀요. 속옷 안 입고 흰 티까지는 못 입어도 검은 나시티까지는 편해요. 내가 편한 게 제일 좋은 거고 그걸 유별나게 보는 시선이 이상한 거지라는 생각이 들어요.

 

김¯ 저도 실리콘 패치 정도만 하고 다녀요. 아예 안 하기에는 너무 도시에 살아서 최소한의 합의였어요. 인어가 되고 싶었던 이유는 뭐였어요?

혜영¯ 어릴 때 <스플래쉬>라는 영화를 봤어요. 금발의 뽀글뽀글한 긴 머리의 인어가 바다에서 나와 톰 행크스와 사랑에 빠지는 영화였는데 그걸 너무 재밌게 본 거예요. 물속에서 머리카락이 날리는 거라든지 유연하고 묘한 움직임 같은 게 좋았어요. 부끄러워서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는데 목욕탕에서 긴 때밀이 타월을 다리 위에 얹고서 인어를 흉내 낸 적도 있어요(웃음).

 

김¯ 저는 어릴 때 <미이라> 시리즈를 너무 재밌게 봐서 이집트 문화를 좋아했어요. 고인에 대한 기록들, 갖가지 의미를 가진 물건들, 비석에 쓰인 경고 문구 같은 게 인상 깊어요.

혜영¯ 다큐멘터리나 디스커버리 채널 좋아하실 것 같아요.

김¯ 맞아요. 혜영 님도 그림을 그리셔서 아시겠지만, 휴식 시간에도 작업에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을 찾아보게 돼요.

혜영¯ 일하다가 잠시 쉴 때도 눈앞에 있는 걸 작품에 어떻게 녹여낼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 자연스레 들잖아요. 그런데 그게 스트레스가 되면 안 돼요. 완전히 내려놔야 또 뭔가가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이 생기잖아요. 저도 그걸 잘 못해요. 아예 놓을 수는 없어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연습이 필요한 것 같아요. 그래서 물속이 좋아요.

 

김¯ 물속에서는 자신만 생각해야 하니까요?

혜영¯ 네. 위험하니까요. 그게 다 이어지는 이야기 같아요.

김¯ 예전에 친구들이랑 제주도를 오래 걸었던 게 생각나요. 이 닦고 선크림만 바르고 무작정 걸었어요. 바다 보이면 잠깐 들어가서 놀고 걸으면서 말리고 하다 보니까 5시간 코스를 완주한 거예요. 배고프면 옆에 있는 식당 들어가고 카페도 목마르면 가서 잠시 쉬고요.

혜영¯ 얘기만 들어도 너무 좋아요.

 

김¯ 친구들도, 날씨도 너무 좋고 바다에 잠시 들어갈 때는 도둑이 있을까 싶어서 배낭 세 개를 묶어뒀던 장면들이 생각나요. 아무것도 안 할 수 있는 시간이 있구나 싶었죠.

혜영¯ 제가 예전에 요가 워크숍을 들으러 갔었는데 요가에서 자신에게 집중하는 수련이 몸과 마음을 한군데에 두는 거래요. 명상이랑 같은 맥락이에요. 그때 에너지가 채워지고 기가 모이는데 운동할 때는 집중을 할 수밖에 없잖아요. 운동하고 난 다음에 몸은 피곤하더라도 좀 더 활기가 생겨요. 사람들이 회사에 가면 힘든 게 몸은 여기에 있는데 마음은 저기에 있는 거죠. 그래서 에너지가 낭비된대요. 일하면서도 집중이 되면 뿌듯한 마음에 에너지가 채워지기도 하고요.

 

김¯ 맞아요. 몸은 여기에 있는데 마음이 미래에 있으면 힘들다는 이야기가 떠올라요. 저는 원래 일 년에 한 번씩 막연한 리스트들을 세웠거든요. 이루고는 싶은데 지금 상황에서는 막연해서 혹시 못 이루더라도 덜 실망하는 것들을 적어요. 그런데 시간이 흐르다 보면 그걸 다 이루기는 했거든요. 뿌듯하고 좋기는 했는데 너무 막연하다 보니 자꾸 제 마음이 미래에 가 있는 거예요. 이때쯤이면 이걸 해낼 수 있을지 고민하다 보니까 오늘의 일에 집중을 못 해요. 제 친구가 자기는 오늘 할 일을 열심히 하면 그런 스트레스를 덜 받는대요. 내일은 또 그날의 일을 하면 된다고 너무 마음을 미래에 두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혜영¯ 미래를 떠올리면서 원동력으로 삼을 수도 있잖아요. 성향 차이 아닐까요?

 

김¯ 맞아요. 예전에는 막연한 걸 다 이뤘다 생각했는데 그중에서 좀 아쉬운 것들을 곱씹게 되어서 하나에 집중을 잘 못했어요. 다 같이 조금씩 올라가고 있는 거긴 한데 치고 올라가는 게 없어서 폭을 좀 좁혀봐야겠다 생각했었어요.

혜영¯ 목표를 줄인다기보다는 오늘 해낸 것 하나를 칭찬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원대한 꿈도 천천히 이뤄나가고 오늘 작은 걸 이뤘다면 스스로 칭찬도 해주고 이런 마음도 필요한 것 같아요. 지금 작가님께 이야기하고 있지만 저한테도 얘기하는 거예요. 나도 그렇게 하고 싶으니까. 저는 매일을 열심히 하자 이런 건 지칠 수 있으니까 작은 것에 행복을 느끼려고 해요. 마당에 심은 작물에 새싹이 난다거나 오늘 날씨가 유독 좋다거나 하는 것들이요. 그걸 여기에 와서 더 많이 느꼈어요. 저는 오토바이를 타니까 오며 가며 아무런 사고 없이 잘 다녀온 거에 감사하기도 하고요. 그런데 예민하고 감정 기복 심한 게 단점이기도 해요. 양날의 검인 거 같아요. 작은 거에 행복하니까 작은 거에 스트레스도 받고요.

 

김¯ 뭔가를 만들어내는 데에 그런 마음들이 분명 도움이 되죠. 그림책에는 주로 어떤 이야기를 담으세요?

혜영¯ 주로 경험을 담아요. 최근에 알게 된 건데 제가 ‘다름’에 대해서 서로 인정하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더라고요. 독립출판으로 냈던 <고양이 씨앗>도 그렇고 다른 그림책도 서로 다른 아이들 두 명이 서로를 인정하게 되면서 어우러지는 이야기예요. 남도 그렇지만 제 다름도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 같아요. 항상 생각하는 게 사람은 다 이상해요. 라디오에 사연 보낼 때 저는 몇 살의 평범한 회사원입니다 그러잖아요. 평범한 건 정말 없는 거 같아요.

 

김¯ 예를 들면요?

혜영¯ 그런 거 있잖아요. 뚱뚱하거나 마르거나 외형적인 모습에 대해 점점 더 조심하게 되는 거 같아요. 티비 보면서 연예인한테 쉽게 말할 수도 있잖아요. 방금 지나가는 사람을 평가할 수도 있고요. 요새는 그런 잣대를 두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다른 점을 인정하고 점점 더 이 사람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마음을 가지게 되는 거 같아요. 영화만 해도 누가 뭘 봤다고 하면 “그게 재밌어? 왜?”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부터요.

 

김¯ 맞아요. 제가 좋아하는 것도 남들에겐 아닐 수 있죠.

혜영¯ 다른 사람의 취향에 대해서 진심으로 반대하는 경우가 있잖아요. 저도 예전에는 그래왔고요. 대화할 때 “그렇구나. 난 이래서 싫었어. 넌 이래서 좋았구나.” 하는 연습을 하고 있어요.

 

김¯ 저도 가끔 제 생각을 강요할 때가 있거든요. 젠더 이슈에 관심이 많아서요. 친구들한테 이야기를 해주고 싶은데 저한테는 너무나 당연한 것들이라 조금 강경하게 얘기를 했었어요. 그러다 보니 친구들도 처음에는 조금 당황을 하는 거죠. 그래서 나중에는 영화나 드라 같은 매체들을 함께 볼 때 이런 부분들은 여성 혐오적인 표현이라고 말해줬어요. 부드럽게 의견 전달하는 법을 배워야겠단 생각이 들었거든요. 지금은 자주 같이 의견을 나눠요.

혜영¯ 틀린 건 틀렸다고 얘기하는 것도 중요하죠. 틀린 것과 다른 건 차이가 있잖아요. 그래서 신경 써서 말하게 되는 거 같아요.

 

김¯ 저는 아직도 친구들한테 오늘 내가 또 못되게 굴면서 내 의견만 말하고 온 것 같아 마음 쓰일 때가 많아요. 그런 건 꼭 헤어지고 집에 가는 길에 생각이 나잖아요.

혜영¯ 맞아요. 적당히가 제일 어려워요.

 

<마음과 몸의 모양>, 리넨에 채색, 유화, 42cmx29.7cm, 2021

 

처음으로 이층 버스를 탔다. 목적지가 에버랜드인 버스 맨 앞자리에 앉아 오래전에 만났던 애인을 떠올렸다. 그때는 군인이면 에버랜드가 공짜였는데… 롤러코스터 한가득 까까머리가 빼곡했지. 지금도 그 좋은 할인 제도가 남아 있을지 궁금해하며 혼자 놀이공원에 입장했다. 사파리에 나른하게 누워있는 사자도 보고 두 손을 모아 간식을 받아먹는 곰도 보았다. 동물원과 아쿠아리움은 더 이상 가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던 게 떠올랐다. 사파리에서 시간을 보내느라 인터뷰 약속에 늦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죄송하다는 문자를 여러 개 보내다가 꿈에서 깨어났다.

 

이부자리에서 일어나 정말로 에버랜드행 버스를 타러 강남역으로 향했다. 꿈속과 달리 에버랜드역을 지나쳐 용인의 어느 마을에서 인어가 되고 싶었던 사람을 만났다. 인어공주가 되는 건 실패했지만 스스로를 편하게 만드는 모습을 찾았고 못 하던 수영을 하게 되었단다. 금발은 아니지만 검고 길게 뽀글거리는 머리를 가진 그가 물속에서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오직 자신만을 생각하는 시간. 몸과 마음이 한군데에 있는 순간. 기분 좋은 소진과 그만큼을 채워내는 활기. 나 또한 새벽 수영을 다니는 어린이였는데 왜 지금은 물에 뜨지도 못하게 되었는가. 숨 쉴 곳 없이 빼곡한 머릿속 생각들을 비우고 호흡에만 신경 쓰며 물속에서 유영하는 먼 미래의 내 모습도 즐겁게 상상해본다.

 

나와 가장 가까운 또 다른 사람은 어릴 때 부엌에서 참기름병을 훔쳐 옷더미에 숨겨놓았다. 또래보다 자주 감정이 오르락내리락 거리던 그 어린이는 마음이 심란할 때마다 참기름병을 꺼내 냄새를 맡았다. 사실 아이는 커서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로 자란다. 심란한 마음도 함께 자라나 이제는 그림을 그리면서 가다듬는다. 좋은 그림이 뭔지는 모르지만 이왕이면 잘 그리고 싶어서 하루 온종일 그 생각에 가득 차 있다.

 

인어와 참기름은 서로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각자의 이상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우리가 가진 공통의 이상적 모습은 다른 이의 다른 모양을 이해해 보자는 것이었다. 서로에게 이야기하는 동시에 스스로에게도 다시 한 번 말했다. 타인의 다름을 이해하는 것은 곧 나의 다름도 이해받길 바라는 마음과 함께 올 테니까.

 

그러기에는 우여곡절이 필요하고 돌이켜 본 내 모습은 부끄러움의 연속이다. 어쩌면 앞으로도 부끄러운 일들을 만들며 살아갈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자신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거쳐 계속해서 호흡하는 이는 자연스레 확장되는 심폐 지구력처럼 넉넉한 마음을 가지게 될 테다. 우리는 그런 단계를 훈련 중이다. 점점 더 다른 이상함에 대해 ‘난 이래서 그랬어. 넌 그래서 이랬구나’로 마무리 짓는 단계로 향해보자고 말했다. 헤엄치던 물 밖으로 걸어 나오면 그 후에는 여러 개의 모양들을 바라보자고.

 

이달의 가장 중요한 일정을 마치니 꾸벅꾸벅 잠이 온다. 집으로 가는 버스 라디오에서 또 한 번 자신을 평범한 직장인이라고 소개하는 이상한 사람의 사연이 흘러나온다. 사연은 평범하지 않다. 대게 웃기거나 이상하거나 조금 슬픈 일이 생겼을 때 라디오에 손수 사연을 보내기 때문일 것이다.

 

피곤을 떨치고 헬스장으로 간다. 수영은 먼 미래에 하기로 하고 지상 6층에서 운동을 한다. 아끼던 그림을 팔아 번 돈의 반절로 6개월치의 운동 비용을 지불했더니 하루하루가 소중하다. 그중에서도 두 팔을 앞으로 쭉 펴서 밀어내는 운동을 좋아하는데 며칠 사이 10kg 정도를 10회 더 밀어낼 수 있게 되었다. 한번은 다른 생각을 하다가 손목이 돌아갈 뻔해서 도저히 여러 생각을 끼워줄 머릿속 공간이 없다. 내쉬는 숨에 숫자를 세며 아무쪼록 그림을 그리고 싶은 이상한 마음이 없어지지 않게 해달라고 말한다. 어디에 빌어야 할지 몰라 좁고 앞으로 말려 있는 내 어깨를 펴면서 다짐한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참기름 향기를 대신해 인센스 스틱을 하나 꺼내 불을 붙인다. 오늘은 아무래도 이 정도면 될 것 같다.

 

 

 

*인터뷰이로 참여해주신  모든 혜영 님께 감사드립니다.

 

 

‘조용함을 듣는 일’은 2021년 1월부터 2022년 3월까지 [월간소묘 : 레터]에 연재되었습니다. (연재명 ‘김혜영의 혜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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