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입니다.

아직 더우시나고요? 전국적으로 30도를 웃도는 날씨를 어떻게 가을이라 부를 수 있냐고요? 9월이니까요. 계절을 나누는 기준이 모두 같을 수는 없을 겁니다. 옷장을 정리하는 일로 한 계절을 떠나보내는 이들도 있을 테고, 잠자리의 이불을 바꾸는 것으로 새로운 계절을 맞이하는 사람들도 있을 테니까요. 누군가는 아침 최저기온이나 한낮의 최고기온을 기준으로 봄과 여름을, 가을과 겨울을 구분할 수도 있습니다. 개나리가 필 때를 봄이라 부르는 이들, 벚꽃이 만발해야 비로소 봄이 왔음을 인정하는 이들, 거리의 은행잎이 다 떨어진 걸 보고 가을이 끝났음을 실감하는 이들, 첫눈 소식을 듣기 전엔 겨울이 아니라는 확고한 신념을 가진 이들…. 저는 날짜를 기준으로 계절을 나눕니다. 3월부터 5월은 봄, 6월에서 8월은 여름, 가을은 9월에, 겨울은 12월에 시작합니다. 기후 위기가 아무리 지구적 차원에서 날씨를 뒤흔들어도 매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명확하게 각각의 계절이 시작합니다. 그래서 하늘이 두 쪽 나더라도 9월은 가을입니다. 상당히 더운 가을이긴 하지만요.

 

여름이 끝났습니다.

여름의 기억으로 무엇을 남기셨나요? 저는 몇 년째 똑같은 기억뿐입니다. 복숭아, 여름이라고 하면 복숭아밖에 떠오르지 않습니다. 복숭아 가득한 택배 박스를 열어 냉장고에 넣으며 여름의 한가운데로 들어가서 마지막 복숭아 한 입을 오물거리며 8월의, 그러니까 여름의 마지막 밤을 보냅니다.

— 아, 복숭아를 엄청 좋아하시나 보네요?

— 아뇨. 포도를 제일 좋아하는데요.

— 그런데 왜 여름 내내 복숭아를..?

 

사진: UnsplashIan Baldwin

 

부모님은 제가 여섯 살 되던 해 고향을 떠나 도시로 나왔습니다. 팍팍했던 시골의 삶에 질렸을 수도 있고, (당시로는) 마치 다른 세상으로 변신하는 것처럼 보였을 도시의 삶을 선망했을 수도 있습니다. 직접 여쭤본 적이 없으니 자세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추측건대 시골구석에서 농사 짓기가 싫어서 도망(?)친 게 아닐까 싶습니다. 누구에게 얘길 듣느냐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각색되긴 하지만 공통적으로 ‘농사 못 짓겠다’는 말을 했다는 얘기가 나오거든요. 아무튼 그렇게 30년 넘게 도시에서 살다가 십여 년 전에 다시 고향으로 내려가셨습니다. 오래전부터 계획되어 있었던 귀향인지 돌발적인 선택이었는지는 모를 일입니다. 역시 따로 여쭤보질 않아서.. 굳이 여쭤볼 만큼 중요한 일이란 생각도 안 들었고.. 마산이나 창녕이나, 어차피 서울에서 내려가려면 똑같이 3~4시간 거리인데 무슨 변화가 있을까, 저랑은 아무 상관 없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부모님의 고향은 조부모님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증조부님 때 터를 잡고 살기 시작했으니 한 집안의 역사를 담고 있는 곳이죠.(제가 태어난 고향이기도 하고요. [이치코의 코스묘스]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닌데… 참고) 당연히 농사로 살림을 꾸렸던 논이며 밭이며 있었을 테지만 할머니,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며 모두 정리했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농사지을 사람도 없는데 그 외진 시골에 빈 땅을 가지고 있어 봐야 아무 쓸모도 없으니까요. 하지만 그게 아니었습니다. 분명 논밭을 다 판 줄 알았는데, 동네 야산 기슭에 있는 밭 한 뙈기는 그대로 있었습니다. 밭 하나는 왜 남겼지? 그걸 보면 귀향을 오래전부터 계획하신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부모님 역시 한국인 유전자의 소유자인지라 귀향 후에 그 밭이 노는 꼴을 보지 못하셨던 것 같습니다. 간혹 고구마나 단감(은 밭에서 나는 건 아니지만 창녕 특산품 중 하나라..)이 택배로 도착하곤 했습니다. 박스 단위로 온다는 게 좀 곤란하긴 했지만, 농작물이 원래 조금만 심어도 수확량이 엄청나다 보니까 그냥 그런가 보다 했습니다. 밭에는 고구마 말고도 분명 뭔가 더 있었을 테지만, 집에서 밥을 거의 해 먹지 않는다는 걸 부모님도 알고 있어서 밭작물을 무리해서 보내지도 않으셨고요.

 

‘딱복’의 대표 선수격인 ‘유명’ [경향신문에서 인용 / 사진 : 농촌진흥청]

 

밭의 존재에 대해 알고는 있지만 크게 신경 쓸 일 없는 상태로 그렇게 몇 년을 지내던 어느 해 여름, 드디어 사건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부모님이 보낸 택배 박스를 열었는데 복숭아가 잔뜩 들어 있었습니다. (보내면 보낸다고 말이라고 하시지..) 어머나 이게 뭐야. 맨날 보던 녀석들이 아니어서 얼마나 놀랐던지. 여기 복숭아가 왜 있지?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알고 보니 밭이 조금씩 과수원으로 바뀌고 있었습니다. 복숭아나무 몇 그루를 시작으로 매년 과수를 심어 왔던 것이죠. 먼저 심은 나무들이 자라서 첫 수확을 하게 됐던 것이고요. 나중에 과수원으로 변모한 밭을 직접 가봤더니 자두, 복숭아, 사과 나무들이 스물대여섯 그루 가까이 늘어서 있었습니다. 넝쿨로 자라는 포도와 키위도 보였고요. 아니 노인네 둘이서 언제 이렇게.. 100평 남짓한 땅이었으니 망정이지 더 넓었다면 아예 기업형 과수원을 운영할 태세였습니다. 과수 중엔 복숭아가 제일 많았고, 나중에 심은 나무도 커가면서 초반에 한두 박스 오던 택배가 어느 해부턴가 (특별히 흉년만 아니라면) 네 박스씩 꼬박꼬박 도착하고 있습니다.

 

복숭아 네 박스를, 평소 과일을 즐겨 먹는 편이 아닌 두 사람이 7월 중순부터 8월 말까지 정해진 기한 내에 소비하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한 박스에 거의 서른 개가 들었는데, 6주 동안 매일 3개씩 조져야(!) 다 먹을 수 있다는 얘긴데 저는 복숭아를 그렇게 못 먹습니다. 포도라면 몰라도.. 어쨌거나 일단 주변에 최대한 나눠 줍니다. 근데 매년 편차가 커서 얼마를 나눌 수 있을지 예상할 수 없습니다. 근방에 친구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복숭아 몇 개 나눔하자고 따로 약속을 잡을 일은 아니라서, 우연히 사람들을 자주 만나면 복숭아가 팍팍 줄어드는 거고 그렇지 않으면 1차분 복숭아도 채 소진하기 전에 3차분까지 도착하는 사태가 생기곤 합니다. 사무실 근처의 단골 가게들도 나눠보지만 여름 내내 냉장고엔 언제나 복숭아가 가득합니다.

 

2017년 국내에서 육성된 속이 하얀 천도종인 ‘이노센스’ [경향신문에서 인용 / 사진 : 농촌진흥청]

 

김치냉장고라도 있으면 어느 정도까지는 장기 보관이 가능할 텐데 집에는 그 흔한 4도어 냉장고도 없습니다. (음식을 안 만드니) 냉장고에 뭘 넣을 일이 없어서 대개는 텅 비어 있는, 위아래 2단으로 된 436리터짜리밖에 없습니다. 연식도 오래돼서 비실거리는 냉장고라서 거기 보관해 봤자 복숭아는 빠르게 쭈글쭈글해집니다. 어머니는 (본인도 그만큼의 양을 둘이 다 먹기는 벅차다는 걸 아시는지) 복숭아를 키친타월로 감싸서 밀폐용기에 담아 보관하면 오래간다고 말씀하셨지만 복숭아가 들어갈 만큼, 그것도 박스를 소분해서 넣을 만큼 큰 밀폐용기가 집에 없는걸요. 그렇다면 ‘지퍼백에 나눠 담아도 될 텐데’라고 혹시 생각하셨나요? 과연 지퍼백이라고 있을까요.. 사실 어떻게 잘 보관한다고 해서 복숭아를 제철에 수확해서 박스째 보내는 속도를 감당하기는 힘듭니다. 그저 최대한 빨리 소비할 수밖에요. 복숭아 청도 만들고 통조림(황도)를 만들어 보기도 합니다.(그 와중에도 귀차니즘이 발동해 만드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잼은 시도하지 않고요..) 하지만 최종적인 해결책은 결국 부지런히, 많이 먹는 것으로 귀결됩니다.

 

올해 여름도 정말 열심히 복숭아를 깎았습니다. 당신에게 여름의 기억은 무엇인가요? 라고 물으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복숭아! 라고 대답할 수 있을 만큼요. 그런데 몇 년째 물리고 질릴 만큼 복숭아를 먹어 오면서도 복숭아에 관해 별로 아는 게 없다는 걸 최근에야 문득 깨달았습니다. 박스를 열었을 때 겉모습만 보고는 딱복인 줄 알았습니다. 복숭아 색깔도 그랬고 만졌을 때 단단함이 느껴졌거든요. 그런데 막상 먹어보니까 거의 물복에 가까웠습니다. 과육이 몰랑거렸고 달콤함이 진했습니다. 이건 뭔가 좀 다른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제대로 설명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아, 복숭아에 관해 아는 게 하나도 없구나! 시장이나 마트에서 그만큼의 복숭아를 사 먹었다면 차라리 뭔가를 좀 알았을 텐데, 매년 도착하는 택배를 기계적으로 처분(?)하다 보니, 복숭아에 관해 아는 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크기가 비교적 작고 반들반들하면 천도복숭아, 색이 좀 연하고 아삭거리는 식감이 있으면 딱복, 노랗게 잘 익어 입안에서 몰랑거리면 물복, 그 정도가 전부였습니다. 이렇게 무식해서야.. 복숭아 먹을 자격도 없는 놈 같으니!

 

9월 상중순에 출하되는 황육계 털복숭아인 ‘장호원황도’ [경향신문에서 인용 / 사진 : 농촌진흥청]

 

그래서 복숭아에 관해 찾아봤습니다.*

 

• 역사 : 원산지는 중국 화북의 고원지대. 동양 문화권에서는 무릉도원, 선과 등 신선(神仙)의 과일로 여겨졌고 장수와 불로장생의 과일로 불렸다. 서양 문화권에는 기원 전 2~1세기경에 페르시아를 통해 전파되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페르시아 원정 때 전해졌다는 설도 있으나 고고학적 증거가 발견된 적은 없다고 하네요.] 이 때문에 유럽에서는 ‘페르시아 사과’로 불렸으며 학명Prunus persica 역시 페르시아를 포함하고 있다. 1902년 경기도 부천에서 최초로 근대적인 재배가 시작되었으며 지금은 경북이 전국 생산량의 절반을 차지하는 최대 생산지이다. 가장 유명한 축제는 조치원복숭아축제이다.

 

• 품종 : 국내 유통되는 복숭아 품종은 100가지가 넘는다. [세상에!] 크게 유모계와 무모계로 나뉘며 털 있는 복숭아는 황도와 백도가 대표적이고 털 없는 복숭아는 천도 품종이 있다. 2017년 기준 전체 재배 면적 중 83%가 유모계, 17%가 무모계이다. 우리는 유모계와 무모계 모두 복숭아라고 부르고 있으나 서양에서는 서로 다른 이름(peach/nectarine)으로 불린다. [아예 다른 과일로 취급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 2013년에 복숭아 게놈이 모두 해독되었는데 과육이 흰 백도에서 유전자 하나에 돌연변이가 생겨 과육이 노란 황도가 나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백도는 향이 짙으며 황도는 향이 옅은 대신 단맛이 더 많다. 황도와 백도 모두 각각의 딱복과 물복 품종이 있다. 한때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재배된 ‘유명’은 1977년 육성된 한국 1호 복숭아 품종(백도/딱복)이다. 이후 ‘미홍’, ‘수미’ 같은 백도 품종이 개발되었으며 최근에는 ‘옐로드림’, ‘스위트퀸’처럼 당도를 높이고 신맛을 줄인 품종이 인기를 얻고 있다.

 

• 유통 및 보관 : [이 부분은 충격적입니다. 내가 알던 거 다 틀렸어..] 농촌진흥청의 ‘복숭아 적기수확 및 수확 후 관리요령’에 따르면, 복숭아는 상온에서 유통 시 쉽게 연화되어 부패하며, 사과, 배 등과 달리 장기간 저온 저장하면 식미도의 감소 및 저온장해과가 발생하여 장기 저온 저장이 곤란하다. [그래서 복숭아는 오직 여름 한 철에만!] 또한 복숭아는 10℃이하의 온도에서 장기간 저장하게 되면 과육의 섬유질화 및 과육 갈변 등 저온장해 현상이 나타나며, 모든 품종은 5℃ 미만의 온도에 노출되면 단맛과 향이 저하될 수 있다. 다만 부득이하게 저장 기간이 길어질 때는 중간에 온도 상승(25℃)을 한번 시켜주면 저온 장해 증상을 완화시킬 수 있다. 백도계의 상온 유통 한계일는 2~5일이고 적정 저장 온도는 8~10℃(저온 유통 한계일 1~2주), 황도계의 상온 유통 한계일는 4~7일이고 적정 저장 온도는 5~8℃(저온 유통 한계일 3~4주), 천도계의 상온 유통 한계일은 5~10일이고 적정 저장 온도는 5~8℃(저온 유통 한계일 2~3주)이다. [냉장고 냉장실의 온도가 1~3℃, 김치냉장고의 온도가 -2~0℃이므로 복숭아를 냉장고에 넣는 순간 맛과 향 모두 저하된다는 얘기고, 가정에서 적정 온도로 복숭아를 보관할 방법은 없다고 보면 됩니다. 그러니 복숭아는 냉장고에 넣지 말고 상온 유통 한계일이 지나기 전에, 가능하면 사자마자 곧바로(유통/판매 과정에서 날짜를 잡아먹을 테니까)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1주일에 한 박스씩이라니..]

 

자료를 찾다 보니 의외로 복숭아의 효능에 관해선 구체적인 정보가 없습니다. 식당 벽에 붙어 있을 법한, 들깨/콩/호박/감자에 갖다 붙여도 어색하지 않을 ‘소화촉진, 피부미용, 다이어트, 니코틴 해독’ 같은 뻔한 얘기들만 있더라고요. 동의보감 같은 옛 문헌에도 복숭아의 씨, 꽃, 잎, 가지 등을 언급하고 있을 뿐인 것처럼 보이고요. 건강/의학적으로야 별 효능이 없을지 몰라도 (그만큼 맛있으면 그게 곧 효능이죠!) 저한테는 특별한 효능이 있습니다. 복숭아는 여름을 기억하게 해줍니다. 한 계절의 기억을 오롯이 담을 수 있는 과일이 있어 다행입니다. 냉장고에 잔뜩 쌓인 복숭아 더미를 보며 곤란함을 느낀 적도 있지만 그래도 매일 깎고 자르고 먹었던 복숭아들 사이사이로 여름의 기억을 훨씬 선명하게 차곡차곡 쌓을 수 있었습니다. 복숭아가 없어도 여름은 여름이겠지만, 폭염을 견디는 일도 일상을 기억하는 일도 훨씬 밋밋했을 것입니다. 시간이 한참 흘러도 여전히 저는, 여름을 복숭아로 기억할 듯합니다. 제일 좋아하는 과일은 포도지만 말이에요.

 

추신) 여름 끝난 지금 (너무나 덥지만요..!) 아직 복숭아를 충분히 즐기시지 못했다고 아쉬워하지는 마세요. 8월을 지나 9월 늦게는 10월까지 출하되는 만생종 품종들이 있으니까요. 조생종~만생종을 나누는 기준은 꽃이 만개한 후 수확할 때까지의 기간이고, 만생종인 ‘수미’는 만개 후 135~145일경인 9월 상순에, ‘장호원황도’는 145~155일경인 9월 중순에 수확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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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ekr.or.kr/Kkrpub/webzine/2022/08/subpage-002.html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3685

https://en.wikipedia.org/wiki/Peach

https://m.dongascience.com/news.php?idx=29414

https://www.grandculture.net/bucheon/toc/GC01602004

http://dailydgnews.com/news/article.html?no=126291

https://www.khan.co.kr/life/life-general/article/202108130953001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053266.html

https://www.rda.go.kr/middlePopOpenPopNongsaroDBView.do?no=1178

 

 

 

‘소소한 리-뷰’는 [월간소묘 : 레터]에 연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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