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대화에서 종종 튀어나오는 원래,라는 단어는 동그랗고 매끄러운 그 발음처럼 모나지 않으며 동시에 조금은 수동적인 뉘앙스를 담고 있습니다. 해결하거나 돌파해야 할 문제를 회피하고자 할 때 이렇게들 말하곤 하죠. 이 바닥이 원래 그래. 그 인간 원래 그런 거 몰랐어? 이런 말에서 적극성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문제가 그대로 있고 그와 얽힌 상황도 그대로인데 아무 일 없는 것처럼 넘어가라고 말하는 것이니까요. 사건이나 갈등을 해결하는 건 고사하고 그것으로부터 필사적으로 도망치려는 의지도 없습니다. 단지 마음을 바꾸라고, 시선을 돌리라고 하면서 당사자를, 때론 화자도 포함해서, 수동적으로 만들어버리죠. 원래,를 남발하는 이를 만나게 되면 처세술에 (능숙함의 여부와 상관없이) 닳은 운명론자의 기운을 느낄 수 있습니다. 부정, 무마, 전가轉嫁처럼 적극적인 수동성일 경우에는 어둡고 음침하기까지 하죠. 하지만 어떨 땐 체념과 같은 소극적인 수동성이 담겨 있기도 해요.

 

저는 지금 여섯 고양이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원래, 이런 사람은 아니었어요.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닌데…

 

살면서 동물과 인연을 맺은 기억이 거의 없습니다. 억지로 떠올려봐도 시골 할머니 댁에 있던 소에 대한 기억밖에 없어요. 초등학교(국민학교였지만요..) 때만 해도 방학이 되면 할머니 댁에 가서 2~3주씩 지내다 오곤 했어요. 지금처럼 할머니(간혹 할아버지?)가 손주들 집에 와서 육아를 분담해주는 시스템(?)이 생소했던 때라 맞벌이였던 부모님이 자연스럽게 저와 제 동생을 시골에 던져놓았던 거죠. 왜 데려다놓은 게 아니라 던져놓은 것인가? 딱히 데려다준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늦게 잡아도 열 살 정도부터는 동생과 둘이서 할머니 집을 찾아갔던 것 같아요. 마산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시골 읍내 정류장으로 간 다음에 거기서 2km 넘게 떨어진 할머니 집까지, 약간의 갓길만 있을 뿐 차들이 쌩쌩 달리는 국도를 따라서 열 살짜리 꼬마와 그보다 두 살 어린 꼬맹이 둘이서 터벅터벅 걸어가는 여정이었어요. 충분히 던져놓음이라고 할 만한 일이죠. 위험천만한 일이 아닌가, 싶으시겠지만 그땐 무려 군인이 대통령을 하던 야만의 시절이었으니까요. 그래도 저는 그 길을 무척이나 재미있어했던 것 같아요.(동생한테는 물어본 적이 없네요.)

 

할머니 댁에는 외양간이 있었고 거기에 소도 있었습니다. 한두 번 정도는 키우던 소를 팔기도 했고 또 어떤 때는 송아지가 함께 있었던 것 같기도 하지만 그저 흐릿하게 생각날 뿐이에요. 소가 코뚜레를 하고 있었지만 농사일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제 기억이 닿은 가장 오래된 지점에도 할머니 댁에 경운기가 있었기 때문이에요. 쟁기를 끌거나 하지는 않았을 것도 같지만 혹시 경운기가 못 들어가는 밭일 등에는 동원되었을 수도 있고요. 아무튼 그렇게 소가 있었다,는 객관적 사실 외에 감상에 빠질 만한 사건이나 기억은 없어요. 꼬맹이였던 저한텐 외양간의 소가 그저 풍경의 일부였을 뿐이었습니다. 소의 눈망울을 들여다본 기억, 배를 가만히 어루만진 기억 등이 있기는 하지만 그건 동물과의 교류가 아니라 고향 집의 반질반질한 마루를 쓰다듬는 것에 더 가까웠던 것 같아요. 무엇보다 시골 외양간에 있던 소들은 이름이 없었으니까요.

 

풍경으로 겨우 존재했던 그 소들 말고는 동물에 관한 추억이 아무것도 없어요. 심지어 그 흔한 개에 관한 기억마저도요. 할머니 댁이 있던 시골에는 할아버지 삼 형제가 옆집, 건넛집으로 붙어 있었고 저는 그 세 집을 마치 제집인 양 휘젓고 다니며 놀았습니다(가문의 장손이니까요!). 그런데 어느 집에도 개가 없었어요. 지금도 시골에 가면 목줄을 묶어 키우는 개를 자주 볼 수 있고, 시골 인구가 비교적 넉넉했던 당시를 고려하면 지금보다 더 많았을 것 같은데 희한하게 할아버지 삼 형제 집에서는 한 번도 개를 볼 수가 없습니다. 나중에 어른이 되고 나서 이유를 알게 되긴 했는데요. 그 이유란 게 참..

 

지금은 할아버지, 할머니가 살던 집이 없어졌습니다. 집터도 그대로 있고 거기에 역시나 할아버지, 할머니인 사람이 살고 있지만 예전 집은 사라졌어요. 지금의 할아버지, 할머니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제 부모님이 도시 생활을 정리하고 귀향하면서 예전 건물들을 싹 허물고 현대식이자 조립식인 주택을 새로 지으셨어요. 고쳐 살기에도 한계가 있기는 했겠지만 그래도 옛집이 없어진 게 조금 아쉬워요. 거기가 무려 제 생가生家인데 말이에요! 국어사전에 따르면 ‘어떤 사람이 태어난 집’, 병원이란 공간에서 생과 사의 매듭이 완결되는 시대에 자신이 태어난 집이 실체적 공간으로 존재한다는 게 왠지 우쭐할 만한 요소였는데 말이에요. 간혹 우와- 옛날 사람이네,라고 놀라거나 놀리는 분들도 계셨지만요.(옛날 사람 맞기 때문에 놀림에 반응하지 않음!)

 

아무튼 그 생가에서 여섯 살까지는 할아버지-아버지-저, 이렇게 3대가 함께 살았어요. 할아버지 삼 형제 집에 개가 없었던 이유는 아마도 그때쯤 생겨났을 거예요. 부모님인지 삼촌인지 고모인지 기억나진 않지만 분명히 이렇게 얘기했으니까요. ‘니가 어릴 때 개를 하도 무서워하니까 절대 못 키우게 했지 뭐니.’ 세상에 이런.. 여섯 살(혹은 그마저도 안 되었을) 꼬맹이가 동네 개를 무서워하는 게 당연하지, 지금처럼 반려동물로서의 댕댕이도 아니고 시골에서 시큐리티 목적을 겸해 기르던 개를 안 무서워하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나요? 손주가 개를 무서워한다고 절대 개를 키우면 안 된다,고 선언해버린 할아버지 혹은 할머니는 저를 무척이나 아끼고 사랑하셨던 겉 같아요. 그놈의 장손이 뭔지..

 

원래,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주변에 댕댕이도 없는 사람 말이에요.

 

먕이를 만나기 전까지는…

 

누구나 한 번쯤은 문턱을 넘게 됩니다. 성장의 계기가 되기도 하지만 때론 좌절의 쓰라림으로 남기도 하는 일들이 그 문턱에 걸쳐 있죠. 그렇게나 동물과 인연이 없었던 제가 새로운 세계로 넘어갔던 문턱은 2013년 여름에 불쑥 나타났습니다. 고양이와 교감하는 첫 기억을 안겨준 먕이와의 만남이었죠. 길고양이였음에도 사람을 대할 때 전혀 스스럼이 없었던 아이, 3층 빌라의 계단 꼭대기까지 스스로 올라와 밥과 물을 찾아 먹던 아이, 때론 집 안에 들어와 놀기도 했던 아이, 먕이는 TNR이 되어 있었지만 한때는 사람과 함께 살았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던 아이였습니다.([이치코의 코스묘스] ⑤ 굴러온 돌) 그렇게 먕이와 친해졌을 때, 지금은 불가능할뿐더러 상상할 수도 없는 긴 여행을 다녀왔어요. 무려 한 달이나요. 고작 한 달 아니냐고요? 글쎄요. 사람마다 다를 순 있겠지만 4박 5일(코로나 이후에는 겨우 2박 3일이 최대였지만..) 일정으로 여행을 가려고 해도 탁묘 방문을 최소 두 번은 부탁해야 하는 육묘 집사의 입장에서 한 달이라는 시간은 마치 영원과도 같답니다. 게다가 그렇게나 길게 아이들과 떨어져 있을 엄두가 나지도 않고요.(애들이 저에 대한 기억을 홀랑 까먹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광활한 시베리아를 한 달간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시베리아 여행에서도 낯선 고양이와 교감하는 기회를 우연히 얻게 되었어요. 온천 휴양지로 유명한 아르샨이란 마을을 산책하다 너무 예쁜 턱시도 고양이를 만났습니다. 아이는 사람을 전혀 경계하지 않으며 자연스럽게 산책에 동행했습니다. 부르면 가까이 왔고 쓰다듬으면 배를 드러내며 발라당 눕기도 했어요. 가만히 들어 올려 안아도 발버둥 치지 않고 얌전히 안겨 있을 줄 알았던 아이는, 불과 한두 시간을 함께 있었을 뿐이지만 시베리아 횡단 열차의 지루한 덜컹거림이나 바이칼 호수의 비현실성-이게 호수라고?!-만큼이나 인상적으로 기억에 남았습니다. 잠깐의 인연이었지만 아이에게 ‘루시끼Русский*’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어요. 이젠 노묘가 되었겠지만, 여전히 잘 지내고 있지? 가끔은 보고 싶단다. 루시끼, 작고 아름다웠던 고양이.

 

시베리아 호랭이, 루시끼

 

문턱은 여름에 시작해서 깊어질 대로 깊어진 가을에 절정에 다다랐어요. 시베리아 여행을 다녀온 뒤에도 한동안 머물던 먕이가 갑자기 사라졌고 그 자리에 삼삼이가 등장한 사건이었죠.([이치코의 코스묘스] ⑤ 굴러온 돌) 이듬해 봄에, 골목과 계단과 집을 오가며 지난겨울을 (사실상 함께) 났던 삼삼이를 데리고 이사하기로 결정했을 땐 이미 문턱을 넘은 뒤였어요. 뒤를 돌아보니 문턱을 넘기 전 세계가 흐릿한 실루엣으로만 보였습니다. 고양이와 함께 살지 않았던 삶이라니, 마치 전생의 기억처럼, 평행우주 속 도플갱어처럼 아득하게만 느껴졌어요. 도대체 그게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원래, 이런 사람은 아니었습니다만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어버렸네요.

 

2013년 여름에서 다음 해 봄까지, 불과 일 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문턱을 넘었습니다. 동물과 우정을 나누고 교감하기는커녕 주변에 반려동물이 있는 친구나 친척조차 없었던 과거를 뒤로하고 삼삼이와 식구가 되었죠. 사실 그때가 문턱의 끝이었는지 시작이었는지가 애매하긴 해요. 히루, 모카, 치코, 미노, 오즈, 시월이까지 줄줄이 운명의 타래에 말려들면서 결국 육묘에 이르렀으니까요. 매번 새로운 문턱을 만나고 넘으며 더 큰 세상을 향한 모험을 떠난 사건이라고 해야 할지, 끊어질 듯하고 끝난 듯하면서도 결국엔 능선을 이어 대륙 전체를 관통하는 거대한 산맥 같은 문턱 하나를 종주한 사건이라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어쨌거나 끝이라고 생각했어요. 시월이 다음에 2년 가까이 아무 소식(?)이 없었습니다. 하긴 육묘도 벅찬데 더 엮이면 곤란하지, 문턱이란 놈도 양심은 있겠지, 이젠 정말 조심(?)하면서 살아야겠다고 다짐하며 안도..하려는 찰나.

 

시월이까지만!

 

사무실 건물의 1층엔 음식점이 있는데, 지난 7월의 마지막 날에 그곳 사장님이 절 부르더니 조심스럽게 속삭였습니다.

 

고양이 안 키우실라우?

네? 저희 집에 고양이가 여섯이에요..ㅎㅎ

 

이야기의 요지는 이랬습니다. 건물 옆 빈터에 고양이가 있길래 가게에서 키워볼까 하고 데려왔다. 그런데 1주일 있어 보니까 냄새가 너무 나서 못 키우겠더라. 집에 데려가서 키울 수는 없고 해서 다시 길에 내놓을까 한다. 아, 뭔 소리래!

상황 파악을 위해 가게로 들어갔습니다. 주방 한편 쪽문이 설치된 식자재 창고에 자그마한 아이가 보였어요. 흰색 몸통에 정수리부터 등을 거쳐 꼬리까지 무늬가 있는 삼색 아이였어요. 완전 아깽이는 아니고 젖을 떼고 막 독립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아이는 건강해 보였지만 설사가 있어 냄새가 나는 거였어요. 화장실을 보니까 납작하게 굳은 모래 덩어리들이 있었고 여기저기 설사 자국이 묻어 있더라고요. 그런데 식자재 창고는 아이가, 건강해서 설사 냄새가 없다고 해도, 지낼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어요. 온갖 식재료들이 선반 가득 있는데 그중에는 비닐로만 포장된 것도 많아서 나중에 다 뜯어놓을 게 분명했고, 선반이 없는 바닥 면은 0.5평도 안 되어 보였습니다. 가게는 테이블마다 불판이 있는 음식점이라 아이가 홀에 나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어요.

 

하, 대체 이걸 어째야 하..긴요, 아이를 사무실로 데려왔습니다. 식당에서 고작 일주일 있었지만, 다시 길에 내놓는 선택지는 배제할 수밖에 없었어요. 허피스가 너무 심해 어미가 곁에 있었음에도 황급히 구조해서 입원시켰더니, 병원에서 딱 5일 지내며 사람 손을 타버리고 사람을 너무 잘 따라서 길에 돌려보내면 안 될 것 같다는 말을 들었던 치코([이치코의 코스묘스] ⑪ 보내는 마음)보다도 더 개냥이였습니다. 식당 사장님이 그다지 알뜰하게 아이를 챙겼을 것 같진 않은데도 마치 오랫동안 사람과 함께 지낸 것 같았습니다. 품에 안자마자 어찌나 골골거리고 편안해하는지..
봉산아랫집 골목에 밥을 먹으러 오는 아롱이라는 아이와 무늬가 거의 똑같았고 다만 코에 있는 점만 반대쪽에 있어서 다롱이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고맙게도 다롱이는 건강했어요. 사나흘 사이로 설사가 잡혀 첫 번째 접종도 무사히 했고, 귀에 이물질이 잔뜩 있어 염증이 아닌가 걱정하긴 했지만 매일 닦아주었더니 차츰 깨끗해졌습니다. 사람 곁에 머무는 걸 어찌나 좋아하는지 사무실에서 일을 제대로 할 수가 없을 정도였어요. 컴퓨터 앞에 앉으면 쪼르륵 달려와서 키보드 깔고 앉기 일쑤였으며 여차하면 무릎에 자리를 잡고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잠을 청하곤 했어요. 소파에 비스듬하게 기대서 제 배를 통통 두드리면 저 멀리서 달려와 배 위로 폴짝 뛰어오르곤 했습니다. 길냥이가 아니라 사람과 함께 살았던 게 아닐까 싶은 정도였어요. 다롱이 때문에 졸지에 찬밥 신세가 되어버린 봉산아랫집 육묘의 밥을 챙기러 퇴근해야 했지만 좀처럼 발길이 떨어지지 않을 만큼 다정한 아이였어요. 주변의 수소문으로 입양처가 정해졌고 다롱이는 3주가량 사무실에 있다가 평생 가족과 함께 달님이라는 이름으로 살게 되었답니다.

 

책상은 다롱이(달님이) 차지!

 

해피엔딩, 그러나 저의 문턱 세계관에는 혼돈이 찾아오고 말았어요. 혼자 조심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었던 거예요! 뜬금없게도 이웃이 사건을 일으키고 거기에 말려들다니,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전개였어요. 무한히 증식하며 서로 영향을 미치는 멀티 유니버스인가요? 고양이를 자꾸 구조하게 되고 식구가 계속 늘어나는 문턱 넘기가 어느 정도 진정된 줄 알았는데 이렇게 또 뭔가를 넘어야 할 줄 누가 알았겠어요. 물론 어떤 상황에서도 위험에 처한 고양이(뿐만 아니라 다른 동물일지라도)를 만났을 때 못 본 척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이미 ‘슈퍼히어로’([이치코의 코스묘스] 길어질 게 뻔한 변명(3))의 숙명을 받아들였으니까요. 그렇다고 해도 왜 이웃 아저씨가 벌려놓은 상황까지 수습해야 하는지, 이 정도면 이웃사촌이 아니라 웬수고 이웃이 생길 때마다 자기가 구조한 동물은 스스로 책임지도록 합시다,라고 각서를 받아둘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웃 없는 곳에 가서 혼자 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아휴, 정말!

 

이치코의 코스묘스는 대체 어디까지 확장하려는 걸까요?

진짜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마침.

 

*Русский : 러시아인, 러시안 / 표기상으로는 ‘루스키’가 맞을 테지만 여행 중에 들었던 현지 발음은 ‘루시끼’에 더 가까웠습니다.

 

 

 

‘이치코의 코스묘스’는 [월간소묘 : 레터]에 연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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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코의 코스묘스]

시즌 1, 코스묘스의 오묘한 시작

Episode 1. 한낮의 작고 짙은 온기를 닮은 고양이, 오히루

① 반짝이는 삶   |   ② 막연한 기다림   |   ③ 기쁨의 크기

Episode 2. 잃어버린 시간에 관하여, 김삼삼

④ 각자의 자리   |   ⑤ 굴러온 돌   |   ⑥ 잃어버린 시간

Episode 3. 미래에서 온 카오스, 강모카

⑦ 빈 책상   |   ⑧ 혼돈의 카오스   |   ⑨ 오래된 미래

Episode 4. 이치코,의 세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⑩ 화려한 시절   |   ⑪ 보내는 마음   |   ⑫ 이치코의 코스묘스   

Episode 5. 어느 날  갑자기 – 불쑥, 고미노

⑬ 뜻밖의 여정   |   ⑭ 회색의 미궁   |  ⑮ 약자의 마음 (1)   

Episode 6. D의 의지를 잇는 자, 송오즈

⑯ 소리치는 일   |   ⑰ 총체적 난국   |   ⑱ 엔드게임 and..

시즌 2,

길어질 게 뻔한 변명(1)   |   길어질 게 뻔한 변명(2)   |   길어질게 뻔한 변명(3) 

원래 그런 게 어딨나요? 

공감과 교감 사이에 어중간하게(1)   |   공감과 교감 사이에 어중간하게(2) 

고양이의 버킷리스트 

떨림이 멈추지 않는 세계에서(1)   |   떨림이 멈추지 않는 세계에서(2) 

시즌 1, Again

• Episode 7. 고양이, 장소, 환대, 시월이

⑲ 1, 2, 3, 4, 5, 6, 북적북적   |   ⑳ 혁명의 선봉   |   ㉑ 앙시앵 레짐    |   ㉒ 우정과 환대      

시즌 2, Again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닌데… 고양이에게 배운다 보이지 않는 존재들 고양이 책 #1 총, 균, 쇠 다정한 반복 치코의 일기 선물 같은 시간 마지막 겨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