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너무나도 유명한 <안나 카레니나>(윤새라 옮김, 펭귄클래식코리아, 2011)의 첫 문장이에요. 얼마나 유명하냐면 많은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저를 비롯해서요, 저 문장만은 알고 있으며 심지어 외우기까지 할 정도예요. 첫 문장이 유명한 문학작품의 순위를 논할 때 늘 윗줄 높은 곳에 이름을 올리는 작품이죠. 저는 책을 읽지 않았기 때문에 톨스토이가 왜 행복과 불행이 드러나는 모습에 대해 말하며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소설을 읽었다고 해서 그 이유가 명쾌해지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인터넷 검색창에 ‘안나 카레니나 첫 문장 의미’라고 넣어서 찾아봤더니 해석이 막 제각각이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제 맘대로 저 문장을 가져다 쓰며 글을 시작할까 해요. 책은 나중에 기회가 닿을 때 읽는 걸로…

 

톨스토이가 행복(한 가정의 모습)이 서로 닮았다고 말한 이유는 아마도 본인이 하려는 어떤 불행의 이야기를 강조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싶어요. 그렇지 않다면 대문호라고 하는 톨스토이가 ‘행복한 가정’의 모습을 그렇게 대충, 다 비슷하지 뭐,라고 하며 퉁치고 넘어갔을 리 없을 것 같아요. 저는 -아마 톨스토이도 맘속으로는 그랬을 거예요- 기쁘고 즐거운 것들 역시 불행과 마찬가지로 ‘모두 저마다의 이유’를 가진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이유가 다르다는 건 서로 공감하지 못하는 원인이 되기도 해요. 각자의 처지를 다른 누군가에게 설명하는 게 쉽지 않은 일이 되어버리죠. 불행이 행복에 비해선 나을 거예요. 사람들은 타인의 기쁨보단 슬픔에 더 쉽게 마음이 움직이는 법이니까요. 게다가 다른 이의 행복에 대해선 종종 질투와 폄하의 못난 감정이 끼어들기도 하고요. 누군가 5월의 따뜻한 햇살을 만끽하는 산책을 하며 행복을 느끼는 순간을 두고 다른 이는 미세먼지 속을 부유하는 귀찮은 행위으로 치부해버릴 수도 있잖아요. 우리의 삶은, 행복한 모습이든 불행한 모습이든 서로 그다지 닮지 않은 것 같아요. 늘 각자의 방식으로 행복하고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한 게 아닐까 해요.

 

The Artist’s House at Argenteuil, Claude Monet [출처]

 

누구나 화려한 시절은 있다,라고 할 때의 화려함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모두가 똑같은 모습의 화려한 시절을 보내는 건 어쩌면 모두가 똑같은 이유로 행복한 것보다 힘든 일일지 몰라요. 각자의 현실에 걸맞는 저마다의 화려함이 있을 뿐인 거죠. 그리고 어떨 땐 누군가의 화려함이 다른 이들에겐 초라한 삶의 증거가 되어버리기도 해요.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오자마자 좋은 직장을 구해 남부럽지 않은 연봉을 받으며,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가장 에너지가 넘치는 시기인 20대를 화려하게 보내는 사람을 생각해 보았어요. 좋은 물건을 앞에 두고 망설이지 않아도 되고 다양한 취미와 활동으로 스스로를 발전시키며, 연애나 우정이나 가족 관계 어느 하나 놓치지 않는 역동적이고 부지런한 삶은 충분히 화려한 시절이라고 부를 만한 것 같아요. 저의 20대가 그러지 못했기에 어느 정돈 부럽기까지 해요.

 

하지만 사회생활이란 걸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자기 명의로 된 빌딩을 물려받을 만큼 부유하며 사회적 교양이 충만하기까지 한 누군가의 눈에 그 삶은 그저 보통의, 하찮음을 겨우 벗어난 정도의 생활일 수도 있겠죠. 물론 교양 있는 이들이기에 서민의 삶을 함부로 낮추어 보진 않겠지만 분명 화려해 보이진 않을 거예요. 아마 각자의 선 자리가 다르기 때문일 거예요. 더 크고 휘황찬란한 화려함에 묻히지 않는다 해도 누군가의 화려한 시절이 타인의 입장에서 빛을 잃은 삶이 될 수도 있어요. 종교적 이유 혹은 개인적 결심으로 스스로를 낮추어 희생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어요. 위험에 처한 이들을 구하고 약한 이들을 돕는 일에 망설임 없이 자신을 던지는 사람들이죠. 그들에게는 앞서 말한 20대의 화려한 시절이 그다지 빛나는 삶이 아닐 거예요. 얕잡아 보거나 질투할 리 없겠지만 절대 부러워하지는 않을 거예요. 아마 각자 어떤 사람인지가 다르기 때문일 거예요.

 

결국 어떤 사람인지, 어떤 환경에 처해 있는지가 각자의 화려한 시절을 결정한다고 할 수 있어요.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모양으로 화려한 시절을 풍미하거나 추억할 거예요. 굳이 자신을 남들과 비교할 필요는 없는 일인 거죠. 다만 자신이 지금 화려한 시절을 보내고 있다는 걸 아는 건 좋은 일 같아요. 일상에 쫓기고 관계에 치이며 허겁지겁 살다가 그 시절이 자신의,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화려한 시절이었다는 걸 뒤늦게 깨닫는 경우가 많이 있거든요. 모르고 지나가버려 아깝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에요. 만약 알았다면 그 시절을 더욱 빛나게 만들기 위해 애썼을 테고 결과적으로 좀 더 화려한 시절이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은 거죠. 이미 지난 일, 특별히 아까울 것이야 없다 하더라도 아쉬움은 오래도록 남을 수 있으니까요.

 

Photo by Holly Mandarich on Unsplash

 

저는 세 번 정도의 화려한 시절이 있었던 것 같더라고요.

첫 번째 화려한 시절은 나고 자랐던 집을 떠났을 때 시작되었어요. 많은 이들이 그렇 듯 저도 학교를 다니기 위해 집을 떠나 혼자 살게 되었어요. 스무 살 때였죠. 새로운 도시, 새로운 환경, 새로운 규칙이 낯설었어요. 하지만 그 낯섦의 틈으로 새어나오는 자유의 냄새가 마치 오랫동안 기다렸던 것인양 반가웠어요. 이제 내가 하고 싶은 걸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사실에 환호했어요. 어쩌면 벅찬 감동을 느꼈을 만큼요. 혼자서 자유로운 결정을 내리는 삶이 되었다고 해서 갑자기 대단한 일을 할 수 있을 리가 만무함에도 불구하고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외계인이 갑자기 침공해 온다면 분연히 떨쳐 일어나 지구를 구할 수도 있을 만큼이나요. 하지만 실제 현실은 누추했죠. 술과 담배가 자유로워지고 기껏해야 늦은 밤까지 거처에 돌아가지 않고 놀다가 거기서 고꾸라져 자더라도 잔소리를 하는 사람이 없다는 정도가 전부였어요.

 

고작 스무 살 아이가 펼치는 방종의 버라이어티쇼에 불과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의 시간을 제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은 중요했어요. 엉망진창으로 그 시간을 낭비하더라도 결과에 책임만 질 수 있다면 누구도 뭐라고 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새로운 경험이었어요. 학교라는 닫힌 공간에서 지켜야 할 규칙이 있긴 했어요. 이를테면 시험을 보고 과제를 제출하고 정해진 기준 이상의 수업시간을 채워야 졸업을 할 수 있는 규정 같은 것들요. 하지만 규칙을 벗어나 정해진 시간, 정해진 장소를 이탈할 수 있다는 가능성 자체가 그때는 마치 자유처럼 느껴졌어요. 아니 실제로 자유였어요. 멋도 모르고 마음껏 누렸죠…

 

Photo by Eric Pedersen Torales on Unsplash

 

보통의 기준으로 봤을 때 당연히 결과가 좋을 리 없지만, 그렇다고 제 이십 대가 아무 성과도 없이 지나가버리진 않았어요. 온전히 제 자신을 위해 살았던 시간은 충분히 의미 있는 시절이었어요. 그땐 정말 아무것도 신경쓰지 않았고 어떤 눈치도 보지 않았어요. 가족의 기대와 염려는 물론이고 제 미래마저 아무 관심이 없었어요. 오직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것이 내가 하고 싶은 일인가 하는 것이 전부였던 시절이었어요. 덕분에 만약 규칙 속에 안주했다면, 가족의 그늘에 눌러앉았더라면 겪지 못했을 다양한 사건을 경험할 수 있었어요.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어요. 때론 일상에 자극을 주고 때론 의지할 수 있는 친구들이 늘 곁에 있었어요. 그렇게 무질서한 자유 속에서 저는 조금씩 자랐어요. 여전히 십대의 미숙함과 단절하지는 못한 시기였지만 제 속에서 무언가 만들어지기 시작했어요. 지금의 제가 세상을 대하는 태도의 절반쯤은 그때 만들어졌던 것 같아요. 그리고 세월을 견뎌온 그 태도는 앞으로도 계속 저를 지탱해주길 바랄 만큼 중요한 것이기도 하고요. 한계를 모를 정도로 당돌하고 거침없었던 저의, 한참을 지나고 나서야 깨닫게 된 첫 번째 화려한 시절이 남긴 유산이에요. 미리 알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어요. 그랬다면 더 많이 부딪치고 더 많이 실패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에요.

 

저의 두 번째 화려한 시절은 새로운 기예를 배우며 시작되었어요. 우연히 악기를 배우고 다른 악기를 다루는 이들과 만나 직장인 밴드를 하게 된 일이 먼저고 역시나 우연히 목공 수업을 듣고 가구를 만들게 된 일이 다음이었어요. 누군가에겐 그저 취미생활일 수도 있겠지만 제게는 새로운 세상과 만나는 계기였어요. 악기를 연주하고 가구를 만드는 일을 통해 저를 표현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어요. 음악을 듣는 입장에서 연주하는 입장이 된다는 건 단지 악기를 다루는 기술이 생겼다는 것 이상이었어요. 나의 감정, 기분, 생각을 그렇게도 표현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노래방에서 배경으로 흘러나오는 음악에 올라타 노래를 부르는 것과는 달랐어요. 다른 악기의 소리를 들으며 내가 연주하는 악기의 소리를 덧붙여 음악을 만들어간다는 것은 나를 표현하는 법에 대한, 세계를 해석하고 조화를 이루는 법에 대한 고민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어요.

 

그렇지만 기타는 못 쳐요 🤔

 

목공 역시 악기를 연주하는 일과 비슷했어요. 보통은 손으로 직접 뭔가를 만들어내는 재미에 대해 말하곤 하는데 저는 조금 달랐어요. 물론 어떤 물건을 획득하는 경로가 상점에서 공방으로 바뀌는 자체만으로, 그러니까 직접 만들어 쓰는 일만으로도 일상에 많은 변화들이 생기는 건 맞아요. 때론 그 매력에 푹 빠져 직업으로 삼게 될 정도로 재미있는 일이에요. 하지만 저는 가구를 구상하고 디자인을 고민하고 구조를 설계하는 일이 훨씬 즐거웠어요. 필요한 기능을 적절한(그리고 기왕이면 아름다운) 디자인으로 구현하는 과정이 일종의 모험이자 무대였어요. 재료의 특성과 한계를 이해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며 때론 절충하고 때론 틀을 깨는 과정을 통해 머릿속의 추상적 이미지를 종이 위에 도면으로 정착시키는 일이 마치 제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는 과정처럼 느껴졌어요. 때론 설계도면을 다 완성하고 나면 실제로 만드는 일이 귀찮아질 때도 있을 만큼 즐거웠어요.

 

악기 연주와 목공 작업 모두 기술을 꾸준히 연마해서 한계를 돌파하는 일보단 주어진 기술만이라도 잘 활용해서 제가 지향하는 바를 표현하는 것에 더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아직까지 두 영역의 기술은 여전히 서투름을 갓 벗어난 아마추어 수준에 머물고 있어요. 그래도 상관은 없어요. 대신에 다른 걸 얻었으니까요. 세상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자신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고민하며 살게 되었어요. 이걸 모르고 어떻게 살았을까 싶을 정도로 중요한 걸 배웠어요. 그런데 이 두 번째 화려한 시절은 아직 진행 중이긴 하지만 이제 끝자락이란 생각이 들 때가 종종 있어요. 악기를 만지는 시간도 나무를 만지는 시간도 점점 줄어들고 있거든요. 하지만 아쉬움이 남진 않아요. 한창 빠져 있던 시기에 이미, 지금이 너무나 좋은 시절이구나,라는 생각을 했었고 그래서 기회가 있을 때 조금이라도 더 즐기기 위해 애썼거든요. 게다가 세월이 흘러 나이를 많이 먹게 되더라도 인생을 여전히 재미있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찾기도 했고요.

 

이런 걸 만들고 그랬는데요…

 

첫 번째와 두 번째 화려한 시절은 제 자신과 직접 관련된 사건들이었어요. 자유에 관해, 자신의 표현에 관해 충만해 있던 시절들이었죠. 그런데 지금 막 시작된 세 번째 화려한 시절은 제 바깥의 존재에 관련되어 있어요. 2016년 봄이 끝나고 여름이 막 시작되려던 때였어요. 이미 삼삼이와 함께한 지 2년이나 지났지만 여전히 길냥이들과는 적당한 거리를 둔 채 살고 있었어요. 우연히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고 다가오는 아이들을 만나면 얼른 가까운 편의점에서 참치캔을 사다가 주는 일이 유일한 관계맺기였고 나머지 대부분은 길냥이들의 퍽퍽한 삶을 안쓰러워하며 지나치는 정도였어요. 아직 길냥이들의 세계와 연결되지는 않은 채였어요. 그러다 우연히 길에서 한 아이를 보게 되었어요. 이제 갓 젖을 뗐을 것 같은 조그만 치즈 아이였는데 엄마와 함께 있었어요. 그런데 행동이 이상했어요. 저러다 상처가 생기면 어떡하나 싶을 정도로 벽에다 얼굴을 부벼대고 있었어요. 가까이 다가 서니 콧물 때문에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쉭쉭거리는 소리까지 들렸어요. 허피스가 심해서 얼굴이 온통 짓물러 있었어요. 저대로 두면 죽겠다,라는 생각이 번쩍 들었고 당장 아이를 붙잡아 병원을 향해 뛰었어요. 그리고 그 아이는 나중에 치코가 되었죠.

 

치코 덕분에, 아마 치코 덕분이 맞을 거에요, 고양이가 풍년인 인생을 살게 되었어요. 그전까지는 한 번도 듣지 못했던 길냥이들의 소리가 들리게 되었거든요. 으슥한 골목길에서 살려달라고 외치는 소리가요. 지금까지 1년에 한 아이씩 꼬박꼬박 구조했어요. 함께 사는 고양이가 어느덧 다섯이 되었고 임보 후 입양을 보내는 경험까지 하게 되었어요. 딱히 길고양이를 찾아다니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나 자주 절박한 울음소리를 만나고 또 구조할 수 있다니, 흔한 일은 아니거든요. 이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라고 생각해요. 치코가 저한테 준 선물일 거예요. 가끔 제 자신이 신기하고 슈퍼히어로가 된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어요. 물론 누군가에겐 시덥잖은 호들갑으로 보이기도 할 거예요. 하지만 저는 지금이 막 자랑하고 싶을 만큼 화려한 시절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한 생명의 살려달라는 외침이 내게 닿는다는 것, 그 생명을 구하는 일, 멋지지 않나요?

 

구조할 당시의 치코 모습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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